“물론이죠.”
“......!”
“어떡할까요?”
“제가 정할 수 없습니다. 수석 닥터와 상의를 해야...”
“이 병원의 결정권자는 누구입니까?”
“그야 원장님...”
“아까 원장님께서 뭐라고 지시했습니까?”
“진료권은 선생님께 일임한다고...”
“그럼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거네요?”
“......”
“슬라이드 몇 장 부탁드립니다.”
윤도가 쐐기를 박아버렸다.
치료는 당연히 비장부터였다. 치매의 원인이기도 한 비장의 기혈 저하. 윤도의 판단으로 비장은 오래 전부터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야 암이 발병한 건 쌍둥이의 행운이기도 했다. 진작 발병했다면 윤도를 만나기 전에 사망했을 일이었다.
나노 침이 출격을 했다. 오장직자침으로 들어갔다. 침은 같은 자리에 세 번을 들어갔다 나왔다. 이어 장침이 뒤를 이었다.
장침.
이번에는 아주 다른 스킬을 선보였다. 암 부위를 적중한 윤도, 침 끝을 휘감아 조직을 묻혔다. 손가락에 가벼운 스냅을 주고 뽑아올리자 암세포가 묻어나왔다. 그걸 슬라이드에 올려주었다. 그리핀이 받아 암검사를 넘겼다. 그 사이에 윤도의 나노 약침이 들어갔다. 침의 기세는 후끈한 화침이었다. 동생에게도 과정은 같았다.
22분.
신기하게도 쌍둥이는 암세포 녹는 시간도 거의 같았다. 암의 명혈 양문혈을 추가로 찔렀다. 삼음교와 합곡혈을 동원해 잉여물을 치워냈다.
그렇게 비장을 회복한 후에야 치매치료에 돌입했다. 혈자리는 신문혈과 중층혈, 구미혈, 후계혈, 백회혈을 잡았다. 동생도 똑 같았다.
그런데...
발침을 하는 순간 정나현의 목소리가 찢어졌다.
“원장님!”
“......?”
윤도가 돌아보니 언니의 반응이 없었다. 동생도 그랬다.
“뭡니까?”
놀란 그리핀이 다가섰다. 윤도가 서둘러 맥을 짚었다.
“후우!”
바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두 분 다 잠이 든 겁니다.”
윤도가 말했다. 바짝 곤두섰던 촉각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윤도의 신약은 90%의 효과로 신경정신과 팀을 매료시켜버렸다. 환자에 따라 회복시간이 달랐지만 문제가 될 수 없었다. 90%로 나온 건 두 환자 때문이었다. 그들은 시침을 받았지만 보호자가 확인검사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완연한 호전이었다.
치매 관련 혈자리에 특이적인 반응으로 치료하는 한방소재신약. 스태프들의 혀를 내두르게 하는 약효였다.
짝짝짝!
임시 결과가 발표되는 자리, 열렬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발표회에 참가한 환자들 일곱 명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아직 한 사람이 남은 거 아닙니까?”
발표를 마친 후에 윤도가 물었다. 그리핀의 말에 의하면 환자는 21명이었다. 그러니 아직 한 명이 남은 게 맞았다.
“그 분은...”
이번 대답은 수석 닥터가 대신했다.
마지막 환자는 여자였다. 45세의 혈관성 치매 환자. 배우출신이었다. 하지만 대역없이 위험한 역할을 연기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네 번의 미세성형수술을 받으며 회복하나 싶었지만 돌연한 부작용으로 피부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병소는 넓고 딱지는 흉측했다.
‘내 인생은 끝났다.’
그 상실과 자괴감에 음주를 시작했다. 원래 있던 고혈압이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결국 혈관성 치매까지 얻게 되었다. 그녀의 보호자가 치매 치료를 거부했다. 치료에서 제외된 이유의 전부였다.
“제가 보기만이라도 하면 안 될까요?”
“그게...”
“슐츠, 부탁합니다. 혹시 얼굴 때문이라면 제가 그 비방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이 환자는 특실 환자라서 말이죠.”
“무슨 말씀이죠?”
“지금은 아니지만 몇 년전까지만 해도 세계적인 스타였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신분이나 직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제가 그 얼굴을 고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겁니다.”
윤도가 거듭 강조했다.
“그렇다면 보호자에게 타진은 해보겠습니다.”
슐츠가 나갔다. 그 사이에 윤도는 회복된 환자들과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윤도의 장침에 호기심을 보였다. 윤도와 인증샷 촬영도 원했다. 기꺼이 응해주었다.
“채 선생님.”
머잖아 수석 닥터 슐츠가 돌아왔다.
“보호자를 만났습니다. 당신 짐작이 맞더군요. 딸이 치매에서 깨어나면 얼굴 때문에 더 괴로워할 걸 알기에 그냥 두겠다고 합니다.”
“제 말을 전했습니까?”
“얼굴 말입니까? 전하긴 했지만 고개를 젓더군요. 그녀는 이미 미국 최고의 성형전문의 팀에게 수차례 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지구상에서 그녀의 피부병을 고칠 의사는 없다고...”
“제가 만나보고 싶다는 건요?”
“채 선생의 소문을 들었는지 만나는 건 상관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치매 치료는...”
“특실이 어디죠?”
윤도가 움직였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더구나 치매발병 사연이 딱한 경우였다.
“......!”
윤도가 걸음을 멈췄다. 특실은 느낌부터 달랐다. 일단 한적했고, 문 앞에 여자경호원까지 버티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서면서 또 한 번 놀랐다. 최고급 병실이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었다. 보호자가 보여준 환자의 사진 때문이었다.
환자는 어마무시한 스타출신이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물론이고 한국의 개봉관에서도 천만관객을 찍었던 대작의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마약으로 몸을 망쳤니 알코올 중독이니 하는 소문이 돌더니 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얼굴에는 얇은 베일이 쓰여 있었다. 한 때 톱스타였던 연기자의 자존심은 바이올렛 빛 얇은 베일 한 장만이 지켜주고 있었다. 그 베일 안을 보았다. 최악의 피부갑착증이었다. 피부가 거북이등처럼 갈라지는 피부질환이다. 얼핏 봐도 분명했다.
이제는 초라하기 그지 없는 한 사람의 환자. 그녀에게서 오롯한 건 목에 걸린 장신구였다. 순금으로 된 장신구에는 소원을 담은 듯 한 글자들이 속절없이 반짝거렸다.
“어머니.”
윤도가 보호자를 바라보았다. 보호자는 쓸쓸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치매치료는 안 돼. 고갯짓에 담긴 의미였다.
“그럼 얼굴치료는 어떻습니까?”
“......?”
“얼굴 치료를 해드리면 치매치료도 받을 수 있겠죠?”
“그야...”
“지금까지 들어간 얼굴성형 비용이 얼마나 되나요?”
“천문학적이에요. 우리 엘리자베스가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처박았지요. 대충 따져도 약 2000만불?”
“어떤 의사가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제대로 고쳐준다면 얼마까지 낼 수 있나요?”
“돈은 문제없어요. 1000만불이든, 2000만불이든.”
“1000만불 하죠.”
“뭐라고요?”
“제가 따님의 얼굴에 깃든 흉측함을 없애주면 1000만불을 내십시오. 현금은 필요 없고 CF로 대신하면 됩니다. 1000만불어치 전속광고 말입니다.”
윤도의 딜이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21세기 톱스타의 한 사람이었다. 사고로 발생한 비극이라면 복귀도 문제없다. 아니, 오히려 고난극복과 인생반전의 케이스로 더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을 광고모델로 쓴다면 대박예약이다.
“미국 최고 성형의 드림 팀도 못한 일을 당신이 하겠다고요? 그것도 혼자서요?”
“한의학이 뭔지 시범을 보여드리죠.”
“시범?”
“간호사 선생님.”
윤도가 배석한 백인 간호사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양해를 구하고 침을 넣었다. 피부가 좋지 않은 게 딱이었다. 신장혈자리 두 곳에 장침을 넣자 피부표면의 솜털이 누우며 찌꺼기가 떨어져 나갔다. 간호사의 얼굴은 몰라보게 깨끗하게 변했다.
“......!”
어머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신 딸이 그토록 원하던 현역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제게 맡겨보시겠습니까?”
윤도의 눈이 보호자를 겨누었다. 보호자는 입을 떼지 못했다. 이제는 체념하고 있던 보호자. 실은 인도의 요가 대가와 중국의 기공치료사도 만났었다. 남아공에서 온 주술사 역시 돈을 노린 허풍선일 뿐이었다.
하지만 윤도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모두 소문을 가지고 왔지만 윤도는 실체가 있었다.
응급실에서 죽은 환자 둘을 살렸고,
치매병동에서 18명의 치매환자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가 쓰는 건 오직 장침.
그러나 그 침에 실린 신기...
흘려듣던 말에 눈앞 시범이 더해지자 보호자는 흔들렸다. 갈대처럼 휘청휘청...
수렁 속의 월드 스타-1
수렁 속의 월드 스타-1
호텔로 돌아온 윤도는 여배우 일을 류수완과 상의했다.
“가능하겠습니까?”
류수완이 물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직접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유불문 윤도의 결정을 존중했다. 게다가 일정도 남는 편이었다.
“가능합니다.”
윤도가 잘라말했다.
“잘 되면 우리 신약의 모델로 쓰자고요? 그것도 모델비 없이?”
“그 모델비 예산은 제게 주셔야합니다.”
윤도가 웃었다.
“당연히 드리지요. 선생님 말처럼 되기만 한다면 최고의 광고효과가 있을 일입니다. 우리 신약으로 회복된 톱스타출신 치매환자가 될 테니 움직이는 광고판이지요.”
“행운을 빌어주세요.”
“제가 도울 일은요?”
“죄송하지만 자리를 비켜주시는 일입니다.”
“아, 예...”
말귀를 알아들은 류수완이 일어섰다.
탁!
문소리가 나자 윤도 혼자 남았다. 가방에서 산해경을 꺼내놓았다. 신비경도 함께 내놓았다.
신비경...
다시 볼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항의 사건 때문이었다. 그때, 검색직원이 그대로 버렸더라면. 유리가 아니니 깨지지야 않겠지만 흠집이나 우그러짐이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어떨까? 산해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전율과 함께 닭살이 보글보글 돋아 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후로 신비경을 시험해 보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산해경을 겨누었다.
‘후우!’
안도의 숨이 나왔다. 약간 탁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기능에는 문제가 없었다. 산해경이 보이고 그 안의 동식물들이 고스란히 보이는 것이다.
‘순초...’
피부를 곱게 만드는 영약. 윤도의 눈이 바삐 움직였다. 순초는 초행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원래 있던 자리의 순초들이 사라진 것이다. 차분하게 주변 탐색을 계속했다. 엘리자베스를 생각하니 이야 말로 심산에서 산삼을 찾는 기분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날보다 한결 비장해지는 윤도였다.
한 시간이 지나갔다.
순초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훑어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 다음 재도전에 나섰다. 동서남북의 방위를 정하고 조금씩 반경을 넓혔다.
다시 한 시간.
순초는 보이지 않았다.
‘순초가 없는 계절일까?’
괜한 생각까지 들었다.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났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정나현이었다.
“간식 좀 가져왔어요.”
그녀가 과일과 주스를 내려놓았다. 윤도를 생각해 쇼핑을 다녀온 것이다.
“가서 푹 쉬고 계세요.”
윤도가 말했다.
“네, 원장님도 너무 무리마시고요, 시킬 일 있으면 전화나 카톡 주세요.”
정나현은 군말 없이 객실을 나갔다.
‘다시 도전...’
몇 번 실패하고 나니 겸허해졌다. 이제는 언덕과 바위 틈, 벼랑까지 낱낱이 살피는 윤도였다. 그게 먹혔다. 골쇄보들이 널린 바위틈새에 순초가 보였다.
“......?”
반가운 마음에 채집하려는 순간, 윤도가 주춤 멈췄다. 순초는 맞았다. 다만 빛깔이 약간 달랐다. 과일로 치면 성숙도가 덜한 느낌이었다. 대안이 없으므로 일단 채취를 했다. 현실로 나오기 무섭게 생체분석을 가동했다.
[원산] 산해경.
[약재수령] 2년
[약성함유등급] 中下품
[중금속함유] 무
[곰팡이독소] 무
[약재사용유무] 독성 주의를 요함.
[용법용량] 수령 5년 미만이므로 강력한 초독(超毒)이 있음. 독소제거 후에 사용가능. 독소는 그늘에서 석달 열흘간 말리면 완전히 제거됨. 독소 미제거시 치명적 생명 위협.
[약효기대치] 下上
‘독소 주의?’
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시 분석해도 변하지 않았다. 산해경에서 나온 영약으로는 처음이었다. 미성숙한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생산한 독소. 순초가 성장하면 없어지지만 이 단계에서는 강력한 독을 품고 있는 것이다.
‘쉣!’
한숨이 나왔다. 기껏 채집한 영약이 이렇다니? 게다가 약성함유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中下품이라면 현실의 약재로 쳐도 최상품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윤도, 기운이 쪽 빠져나갔다. 어떻게 된 걸까? 공항에서의 사건 때문에 부정이라도 탄 걸까? 이전과는 다른 결과물에 한숨이 나오는 윤도였다. 하루 한 번의 옵션을 잊고 다시 신비경을 들이댔다. 산해경은 엄격했다. 윤도에게 허용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하루...
그 하루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냥 놀지는 않았다.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을 방문해 인사를 나눴고 제임스에게도 장침의 위력시위를 구현했다. 제임스에게 있어 장침 맛은 하나의 파라다이스였다. 그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점심식사까지 건너뛰고 말았다.
시간이 되자 윤도는 다시 순초 채집에 나섰다. 산해경은 손바닥만 한 텃밭이 아니었다. 어딘가 제대로 된 순초가 있을 수 있었다. 어제 살피지 않은 지역을 뒤졌다. 첫 채집은 실패였다. 두 번째에 유의미한 순초집단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들은 어제 채집한 것보다 더 어려 보였다. 다른 대안이 없기에 혹시나 하고 추가 채집을 했다. 생체분석에 돌입했다.
“......!”
기운이 쪽 빠져나갔다. 이 순초는 어제 것보다 미달이었다. 약성등급이 下上품으로 나온 것이다. 하상이라면 현실로 쳐도 중상급. 그야말로 평범한 약효에 불과했다.
망연자실 순초를 바라보았다. 실망은 일찌감치 내다버렸다. 인생이다. 날마다 꽃길만 가는 사람은 없다. 저 유명한 히포크라테스도 그랬고 저 신화적인 편작과 화타도 그랬다. 윤도는 현실을 냉철하게 받아들였다.
대안.
그걸 찾기 시작했다. 가져온 영약 중에 웅황이 있었다. 몸의 사기를 몰아내고 독을 제거해준다. 신장과 폐의 기운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순초와 웅황을 더해 쓰면?
‘으음...’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인 피부병이라면 가능했다. 하지만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난 얼굴이었다. 다른 영약을 떠올렸다. 피부병에 관련된 것이라면 동거가 있다. 터진 피부를 감쪽같이 치료한다. 적유도 피부병에 걸리지 않게 한다. 하지만 법제가 필요하다.
‘어쩐다?’
소용도가 낮은 순초를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약침액도 쳐다보았다.
<중산경의 낭-요절하지 않는 영약>
요절할 질병이 아니니 관계없음.
<북산경의 백야-머리가 이상해지는 병을 고치는 영약.>
치매는 윤도가 해결 가능하므로 관계없음.
<서산경의 웅황-나쁜 기운과 온갖 독을 물리치는 영약.>
여기서 윤도 머리가 맑아졌다. 순초의 법제에 필요한 석달 열 흘. 그 목적은 독소 제거였다. 그런데 웅황은 탁월한 독소 제거 효과에 나쁜 기운의 제거. 그렇다면 어린 순초의 독을 제거하고 사기(邪氣)를 없애 상승작용을 기대할 수 있었다.
아쉬운 대로 실험에 들어갔다. 순초를 찧어 즙을 낸 후에 웅황을 두 방울 떨구었다. 반응을 끝낸 즙에 생체분석기를 들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