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그는 선이 굵고 중후했다. 입이 무거운 사람의 전형으로 보였다.
“채윤도 선생님?”
약간의 침묵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예.”
“엘리자베스의 얼굴 악성 피부병... 선생님께서 고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윤도가 답했다.
“병원 측에서 듣기로는 굉장한 악성이라 피부과 차원에서 손을 든 경우라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환부가 이런 케이스 맞습니까?”
카터가 사진 몇 장을 꺼내놓았다. 두툼하면서도 집요한 군락을 이룬 악성 반진사진이었다.
“맞습니다만...”
“단 하루 만에 병세를 잡으셨다고요?”
“당분간은 관리를 해야 하니 하루라고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
“혹시 이런 질환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카터가 다른 사진을 내놓았다. 그걸 집어든 윤도, 처음에는 서양의 골쇄보 군락 일부인 줄 알았다. 어떻게 보면 나무조각을 붙여놓은 것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짐작하게 되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건 인유두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의 최악의 사진이었다.
“인유두종 바이러스 감염으로 보이는군요?”
윤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카터 역시 조심스레 맞장구를 쳤다.
인유두종 바이러스(Human Papilloma Virus)...
간단하게 HPV로도 불린다. 인체에 감염될 경우 사마귀나 자궁경부암의 발생 원인이 되는 이중 나선형의 DNA 바이러스다. 주로 자궁경부암의 주요 원인으로 알려져 있고 곤지름이나 사마귀로 발현하기도 한다.
감염 시 대부분의 경우에 증상이 없다. 증상이 없는 바이러스 감염에 대해 치료법도 없다. 몇 가지 인유두종 바이러스에 자궁경부암 예방의 목적으로 백신이 나와 있다지만 치료제로서의 효과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거의 없었다. 만약 생식기에 감염되었다면 세포성 독성물질에 의한 치료나 인터페론, 기타 새로운 약품들을 처방하고 있었다.
인체에 감염된 인유두종 바이러스는 대부분 면역체계에 의해 제거된다. 그런데 사진처럼 인체의 일부라고 식별하기 곤란한 경우라면 악성 중에서도 악성이었다. 이것이 체내에서 생식기 감염을 일으켰다면 암에 다름이 아니다. 하지만 사마귀의 형태로 피부 감염을 일으켰기에 당장의 생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고 안도할 일도 아니었다. 이처럼 손과 발 등이 나무껍질처럼 변하면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다. 손톱이나 발톱처럼 각질로 자라는 게 아니라 껍질 하나하나에 신경이 연결된 까닭이었다.
함부로 제거할 수도 없는 데다 크기가 점점 커진다. 세계적인 불치병 중에서도 희귀한 경우에 속한다. 운이 좋으면 수술로 상당수를 제거할 수 있으며 손 발 등에 나무가 자란 것 같다는 이유로 나무인간 증후군으로도 불린다.
이와 비슷한 질병으로 늑대인간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이건 선천성 다모증이다. 정상인에 비해 털의 밀도가 높고 지나치게 길게 자란다. 털은 몸 전체에 나는데 주로 얼굴, 귀 어깨 부위에 밀도가 높다. 선천성 다모증 역시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나무인간 증후군에 댈 게 아니었다.
“어떻습니까?”
카터가 고개를 들었다. 윤도도 고개를 들었다. 그가 뒷말을 이었다.
“혹시 닥터의 의술로 치료가 가능합니까?”
‘치료?’
“참고로 말하자면 이 환자 역시 메이요와 이 메사추세츠 병원에서 두 손을 든 환자입니다.”
“......!”
“집중 면역치료에 백혈구 생성촉진 주사까지 다 동원해 보았죠. 나중에는 몇 달에 한 번 환부를 잘라내는 정도... 그나마 환자 상태가 좋지 않아 중단한 지 꽤 되었습니다.”
“이 환자가 이 병원에 있다는 겁니까?”
“아뇨.”
“......”
“전에 있었죠. 지금은 집에서 가료하고 있습니다.”
“......”
“치료 가능합니까? 그 답을 듣고 싶습니다.”
“대답을 하려면 환자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진료정보는 여기 있습니다.”
카터가 USB를 꺼내놓았다.
“제가 말하는 건 병원의 검사 데이터가 아닙니다. 물론 그 또한 참고가 되지만 한의학적인 방법의 진단을 말하는 겁니다.”
“한의학적 진단?”
“환자의 맥과 오장육부의 상태, 나아가 기혈의 수준 말입니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직접 보셔야한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저희가 준비할 건 뭡니까?”
“아무 것도... 환자만 보여주면 됩니다. 댁이 여기서 멉니까?”
“멀지만 문제없습니다. 비행기가 있으니까요.”
‘비행기라면 자가용 비행기?’
윤도가 미간을 좁혔다. 환자 쪽은 굉장한 집안이 분명했다.
“언제 모시면 되겠습니까? 저희는 지금 당장이라도 좋습니다만...”
“기왕이면 내일 이른 새벽이 좋습니다.”
“새벽에는 아이가 잠을 잘 텐데...”
“지금 아이라고 했습니까?”
“환자는 아홉 살 소녀입니다.”
“......!”
나무인간 소녀? 그것도 아홉 살. 그렇다면 더욱 희귀한 케이스였다. 방글라데시에 소녀환자의 첫 케이스가 있었으니 이 아이는 두 번째 케이스가 될 판이었다. 그런데도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철저한 보안이었다. 보호자 쪽에서 비밀에 붙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터가 옵션을 걸어왔다.
“죄송하지만 계약서에 사인을 해줄 수 있습니까?”
그가 종이를 내밀었다.
“계약서라고요?”
“환자의 신상에 대한 일체 함구 말입니다. 이 병원은 원장님의 지휘 하에 보안이 이루어졌지만 선생님은 여기 소속 닥터가 아니기에...”
“그런 거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료인의 기본이니까요.”
“그러니...”
카터의 시선은 계약서 위에 있었다.
“이건 부당한 경우입니다. 일단 환자를 보고 치료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때 계약을 하시죠.”
윤도는 상황에 끌려가지 않았다. 환자도 보지 않고 넙죽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환자는 치료의 대상이지 팔고 사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제가 좀 앞서 갔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터가 계약서를 거두었다.
약속은 내일 이른 아침으로 잡혔다. 장소는 여기 병원 입구였다. 윤도가 병원장실을 나왔다. 현관으로 나오자 잔디 위의 나무들이 보였다. 나무껍질은 딱 나무인간의 그것과 닮았다.
나무인간 증후군...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병이었다. 그저 그런 질병이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믿기지 않게도 그 질환이 윤도 앞에 다가왔다.
새로운 도전...
기꺼이 겪어보기로 했다. 아직 젊은 윤도. 더 많은 경험은 윤도의 의술 여정에 차곡차곡 길이 되고 살이 될 일이었다.
살아있는 인간 조각상 ‘다프네’-2
살아있는 인간 조각상 ‘다프네’-2
호텔에 딸린 카페 테라스에서 성수혁을 만났다. 성수혁 역시 윤도 만큼이나 바빴다. 그는 일반적인 ‘기레기’들과 달리 발로 뛰는 기자였다. 편안하게 앉아서 이메일을 받거나 남의 기사를 가공하는 기사는 쓰지 않았다.
“보세요.”
그가 사진 몇 장을 내밀었다. 기자회견장의 모습이었다.
“이런 건 또 언제 뽑았대요?”
“제가 가지면 초상권 침해 아닙니까? 두 장만 본사에 송고하고 전부 가져왔습니다.”
“독도 지도 문제는요?”
“어렵네요. 일본계 부시장이 고집스럽습니다. 아마 일본 정부와 연결이 된 듯 합니다.”
“그럼 해결되지 못하는 건가요?”
“아무래도 장기전에 돌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민회를 중심으로 상하원 의원들이나 이 지역 유명인사들을 상대로 지지를 얻어 실력행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나 참... 우리 땅을 우리 땅으로 표기도 못하다니...”
윤도도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괜찮으시면 나중에 엘리자베스도 지지의견 표명 좀 부탁해주세요. 그런 정도의 유명인이라면 지지표명만으로도 힘이 되거든요.”
“그렇게 하죠.”
“그럼 올라가서 쉬세요. 저는 한인회장님과 이주민 연합회장님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성수혁이 먼저 일어섰다. 윤도가 입맛을 다셨다. 뭔가 돕고 싶지만 윤도의 영역은 아닌 일. 미국땅에서 곱씹어보는 독도 문제는 한국에서와 달랐다.
‘잘 되어야할 텐데...’
성수혁의 건투를 빌며 숙소로 올라왔다.
인유두종 바이러스.
윤도는 한국에서 가져온 한의서를 펼쳤다. 애석하게도 이 고서에는 인유두종 바이러스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관련 사이트에서 유사한 자료를 찾았다. 바로 사마귀였다. 나무인간에게 자라는 피부감염도 사마귀의 일종. 찬찬히 자료를 탐색해 나갔다.
양방의 치료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병변이 크거나 다발성일 때는 면역요법을 쓰고 있었다. 디페닐사이클로프로페논(diphenylcyclopropenone)을 이용한 치료가 그것이었다. 기타 난치성 사마귀의 경우에 블레오마이신으로 직접 병소 내에 주입하기도 한다. 더욱 광범위한 케이스라면 레티노이드 처방도 한다고 한다.
<중산경의 낭>
<서산경의 웅황><북산경의 백야>
한국에서 가져온 영약을 보았다. 웅황은 이제 거의 바닥이었다. 낭과 백야 또한 이 경우의 특효약은 아니었다. 신비경을 바라보았다. 산해경을 다 뒤지면 치료제가 나올 지도 몰랐다. 하지만 법제가 따르니 오늘 내일 당장 쓸 수 있는 약은 제한적이었다.
면역...
윤도는 명제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오장육부의 부조화에 이어 대두되는 게 면역저하였다. 누구든 나이가 들면 면역체계가 약해진다. 누구든 병이 들면 면역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결론은 면역력이 떨어졌기에 병이 침입한 것이다. 인유두종 바이러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결론은,
‘면역’이었다.
면역의 강화는 윤도가 간간히 읽어대던 마법으로 비교하면 치유의 마나 포션과도 같았다. 면역력이 높아지면 질병은 저절로 낫는다. 피부병은 물론이고 바이러스도 같은 선상에 있었다.
면역의 중요성은 중증 질환에서 더욱 중요성이 높아진다. 경증의 질환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중증에서는 목숨과 연결되는 까닭이었다.
그 분야에서도 윤도는 이미 임상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건 HIV, 즉 에이즈 치료였다. 중증 암과 에이즈를 치료 당시 전신경락을 열어 면역활성을 극대화 시켰다. 가까이는 엘리자베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치료도 따지고 보면 기혈강화로 인한 면역력의 상승이었다.
‘나무인간...’
비슷한 경우로 중국에는 산호인간이 있었다. 사마귀의 형태나 성질에 따라 달리 불릴 수 있다. 세계적으로는 아직 완치 기록이 없는 나무인간 증후군...
한의사라면 욕심이 나는 일이었다. 명예가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쪽에서 검색을 하다가 성수혁 기자 사진을 만났다. 지역 신문에 난 기사였다. 앞서 말한 시청과 시의회 등의 지도에서 빠진 독도 문제였다. 기사가 작은 걸 보니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한 모양. 그래도 열심히 사명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다음 자료를 뒤지다 재미난 걸 보았다. 노화세포에 대한 기사였다.
인체의 세포는 수시로 분열하며 신참 세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무한정이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면 인간의 몸에는 40-50번 분열하여 늙어버린 세포가 증가한다. 면역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면 이런 노화세포를 이물질로 인식해 청소해버린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면역력이 떨어지게 되어 이 노화세포의 처리가 적체되면서 염증을 일으키거나 노화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과학자, 의학자들은 이 노화세포를 제거할 수 있는 물질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은 찾아냈다. 다만 아직 광범위한 경우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현대판 영약이군.’
윤도의 시선이 산해경으로 향했다. 이런 물질을 약침으로 쓴다면? 그 또한 면역력 개선에 탁월한 효과가 될 수 있었다.
똑똑!
한참 몰입할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류수완과 차 이사, 그리고 제임스가 몰려와 있었다.
“선생님, 미국 인터넷 기사 보셨습니까?”
차 이사가 노트북을 펼쳤다. 미국 유수의 사이트가 나왔다. 화면 터치를 하자 전성기의 엘리자베스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그걸 밀자 윤도 사진이 등장했다. 엘리자베스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지금 미국이 난리가 났습니다. 동방의 기적이 죽어가던 월드스타를 살렸다고 말이죠.”
차 이사의 흥분도는 점점 높아졌다.
“이건 의술이 아니라 미러클이다. 기사 밑의 댓글들이 전부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제임스 목소리도 높았다.
“그래도 의술입니다.”
윤도가 강조했다. 기적은 대개 일회용이다. 하지만 윤도의 장침은 일회용이 아니었다.
“지금 한국 본사 전화에 문의가 폭주하고 있답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영국, 스웨덴, 덴마크 할 것 없이 말입니다.”
류수완의 차분한 목소리도 공중에 떠있다. 윤도의 뚝심이 빗어낸 반향은 벌써 지구 반대편까지 강타하고 있었다.
“온 보람이 있으니 다행이군요.”
윤도가 웃었다.
“보람 정도가 아닙니다. 주문 폭주에 선납금까지... 당장 라인을 증설해도 모자랄 지경이랍니다.”
차 이사는 아예 진땀까지 쏟아냈다.
“그럼 파티 한 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윤도가 류수완을 바라보았다.
“해야죠. 그런데 다른 병원에서 긴급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몇 시간이라도 좋으니 자기들 병원에 좀 와달라고 말입니다.”
“또요?”
“무려 열두 군데가 넘는데 가장 적극적인 곳은 이쪽 메사추세츠 최대 전통을 자랑하는 치매전문병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조건대로 준비를 하겠다고 합니다.”
“낭보로군요?”
“이 병원이 메사추세츠 병원 정도의 인지도는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치매 선도병원에 속하는 곳입니다. 선생님이 허락하시면 단 한 시간만이라도...”
“가야죠.”
“선생님!”
윤도의 대답에 류수완이 반색을 했다.
“하지만 당장은 추가 환자가 있어 곤란합니다.”
“추가 환자라고요? 그럼 아까 병원장이 보자고 한 게?”
“그렇습니다.”
“치매환자입니까?”
“치매는 아니고 악성 피부병환자입니다. 희귀한 케이스 같아서 수락을 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 치료가 끝나면 스케줄을 잡겠습니다.”
“그보다... 혹시 이 약을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윤도가 검색자료를 내놓았다. 노화세포를 제거하는 신물질이었다.
“어, 이건?”
자료를 본 차 이사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번에 실리콘밸리에서 한국인 과학자가 찾은 물질이잖습니까?”
류수완도 아는 눈치를 보였다.
“두 분이 아는 물질입니까?”
“알죠. 우리가 이 기술을 살까 생각했는데 아직 상용화 단계가 아닌 데다 글로벌 제약회사가 나서는 바람에...”
차 이사가 쓴 입맛을 다셨다.
“안정성은 어떻습니까?”
“안정성은 문제없습니다. 다만 복용약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이거 소량 구할 수 있을까요? 주사용으로.”
“지금 말입니까?”
“예, 빠를수록 좋습니다.”
“환자 치료에 필요하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구해드려야죠. 선생님 스케줄이 빨리 끝나야 치매병원에 갈 수 있을 테니까요.”
차 이사가 바로 전화기를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