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9화 (219/265)

“정말요?”

“당연하죠. 대 광희한방대학병원 출신이시잖아요? 우리처럼 손바닥만 한 한의원이 넘볼 재원이 아니죠.”

“쳇, 그 손바닥만 한 한의원이 대한민국 최고 침술인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데요?”

“세상은 넓어요. 전국 어디엔가 저보다 센 고수들이 많다는 거 명심하세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원장님.”

안미란이 장난스레 허리를 접었다.

“며칠은 저를 도와 같이 진료 보면서 적응하시고요 그 다음부터 본격 진료상담과 시침 시작하세요. 그럼 되겠죠?”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안미란은 거수경례까지 붙이며 의욕을 불태웠다.

잠시 후에 조수황 과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채 원장, 우리 안 선생 출근했나?”

“그렇습니다만.”

“팍팍 좀 굴리시게. 내 등을 치고 간 친구니...”

“다시 돌려보낼까요?”

“안 돼. 나도 존심이 있지 한 번 배신 때린 친구는 안 받아.”

“으음, 그럼 어쩌죠? 원래 배신 때려본 사람은 또 배신을 때린다던데...”

“하핫, 농담이고 잘 좀 부탁하네. 그 친구가 좀 버벅거리기는 해도 침에 대한 열정은 송재균이나 마혁 선생보다 몇 수 위야. 이제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으니 빛 보기 시작할 거야.”

“제가 스승까지야 되겠습니까? 둘이 공부하는 마음으로 잘 해나가겠습니다.”

“어련하시겠나. 나중에 한 번 보자고.”

“네, 과장님.”

통화가 끝났다. 조수황은 쿨했다. 자기 과에서 수련의를 하던 한의사. 더 큰 병원도 아니고 손바닥만 한 한의원으로 간다니 싫은 감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안미란을 응원하고 있었다.

안미란과 함께 시침할 첫 환자는 치통을 호소하는 환자였다. 윤도가 눈짓으로 진맥을 맡겼다. 환자가 침대에 눕자 안미란이 손목을 잡았다.

“어때요?”

환자가 침구실로 옮겨가자 윤도가 안미란에게 물었다. 윤도는 첫 방문 때 이미 진찰을 마친 환자였다.

“위장병입니다!”

안미란의 답은 엉뚱하게 나왔다. 그 말을 들은 윤도 입가에 미소가 스쳐갔다.

“그동안 공부 많이 하셨군요?”

“맞았어요?”

안미란이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일단 소견을 더 들어볼까요?”

“치아는 위장경락이 주관하니까요. 환자는 윗니와 아랫니가 다 아픈데 위장에 열이 뭉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아랫니 역시 대장이 약해지면 그럴 수 있고요.”

“좋아요. 하지만 아랫니는 반만 맞았습니다.”

“네?”

“대장에 문제가 생기면 아랫니가 아파질 수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인체의 질병은 공식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잖습니까? 몸이 피로해도 아랫니는 아플 수 있습니다.”

“아!”

“이제 생각이 나죠?”

“네, 대장 때문에 그런 거면 차가운 음식을 싫어하겠군요. 그걸 빼먹었어요.”

“광희에서는 여러 선배님들과 과장님이 계셨지만 여기서는 제가 없는 날, 안 선생님이 원장자격으로 진료해야 합니다. 간과하는 일 없이 차분하게 체크하세요. 혹시라도 엉뚱한 처방을 하면 환자에게는 큰 피해가 될 수 있으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시침하러 갈까요?”

“아, 원장님.”

“질문 있나요?”

“이빨 이야기 나왔으니 말인데 저희 병원 치과 쪽에, 아니 이제는 제 병원이 아니군요. 아무튼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요.”

“어떤 소문 말이죠?”

“선생님이 모 회장님 이빨을 새로 나게 하는 처방을 썼다고...”

“누가 그래요?”

“치과 수련의가 저랑 친하거든요. 그 사람이 동창들 모임 갔다가 들었다는 거예요. 문대성이라고 치과 쪽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분인데 그분이 한 말이라며...”

“......”

“뻥인가요?”

“안 선생님 의견은 어때요? 가능할까요?”

윤도가 웃으며 물었다.

“솔직히 학교에서 동의보감 수업 때 들은 적은 있는데 그냥 전설이라고 생각했어요. 쥐를 약으로 쓰는 처방도 그렇고 경옥고와 신침법(神枕法) 같은 처방도...”

“팩트만 말씀드리죠. 제가 모 회장님 이빨을 새로 나게 한 건 맞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정치인 한 명에게도 새 이빨을 나게 해드렸습니다.”

“......”

쩌적!

안미란의 대뇌에 금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보편적인 약재라 아니라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처방을 내지 못합니다. 아셨죠?”

“원장님...”

“하지만 안 선생님은 운이 좋네요.”

“예?”

“며칠 후에 새 환자가 이빨 나는 처방을 받게 될 겁니다. 제게 세 번째 환자인데 어렵게 약을 준비했거든요.”

“원장님.”

안미란의 눈동자는 제어할 길 없이 떨렸다. 새 이빨이 나는 처방. 그저 호사가들의 입방아로 들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니...

그녀를 약제실로 데려가 준비 중인 영약을 보여주었다. 산해경의 영목에서 딴 열매와 뿌리를 말려서 만든 영약환이었다. 그믐에 시작해 보름까지 말려야하는 법제 때문에 이제야 완성이 된 영약환이었다.

척 보기에는 그냥 환약. 그러나 약에서 나오는 상서로운 기운이 안미란을 사로잡았다.

‘천하의 비방...’

그녀는 첫눈에 감지를 했다. 윤도의 신침만큼이나 신묘한 비방이 틀림없었다.

“침 놓을 시간입니다.”

윤도가 안미란의 등을 밀었다. 안미란은 가출한 정신줄을 간신히 수습해 넣었다.

침구실에서 시침에 돌입했다. 윤도의 장침은 단 두 방이었다. 합곡혈과 내정혈에 넣어 치통을 잡았다. 환자는 침이 들어가기 무섭게 통증에서 해방되었다.

“이야!”

발침을 하자 입맛을 다셔보며 좋아했다. 눈까지 찡그리게 하던 격통이 눈 녹듯 사라진 것이다. 그걸 바라보는 안미란의 두 눈이 장침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환자에게 다감한 윤도를 보며 뒷말을 이었다.

‘원장님의 반이라도 되었으면...’

한주일 동안 쉴 틈도 없이 바빴다. 안미란의 합류가 원인이었다. 사람 하나를 더 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적응하는 동안은 그녀에 대한 관리까지 윤도의 일에 속했다.

목요일 오후, 윤도는 이빨이 나는 영약환을 챙겼다. 청와대에 들어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 동안 대통령과 두 번 통화를 했다. 일정을 알아야 약을 처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원장님!”

왕진준비를 마친 윤도가 안미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원장님.”

호칭에 놀란 그녀가 화들짝 일어섰다.

“제가 없을 때는 안 선생님이 원장이라니까요.”

“그래도 그렇죠. 놀리는 거 같잖아요.”

“절대 아닙니다. 쫄지 말고 하세요. 제가 볼 때 안 선생님 침은 이미 훌륭해요.”

“열심히 해보기는 할 게요.”

안미란은 비장했다. 오늘 처음으로 한의원을 지키게 되는 안미란. 그동안은 윤도와 함께였지만 이제부터는 그녀가 사령탑이다. 이런 책임감은 스스로 경험하지 않는 한 표현하기 힘든 일이었다.

“잘 다녀오세요.”

간호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도로로 나왔다. 도중에 류수완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선생님 진료 중이세요?”

“지금 왕진가는 중인데요?”

“멀리 가십니까?”

“아닙니다. 청와대로요.”

“......”

“무슨 일이신데요?”

“그게... 복지부 쪽에서 선생님과 함께 만나 논의할 사항이 있다고 해서요.”

“복지부에서 저를요?”

“저녁에 시간 좀 될까요?”

“뭐 청와대에서 별 말 없었으니 가능할 겁니다.”

“그럼 일단 약속 잡아두겠습니다.”

“예.”

대답을 하고 통화를 끝냈다.

‘복지부...’

무슨 일로 만나자는 걸까? 어쩌면 치매신약 때문인지도 몰랐다. 미국 사건 이후 윤도의 치매신약은 더욱 부각되었다. 국내병원과 요양병원 등에 날개 돋힌 듯 나가고 있었다. 그 시작은 SS병원과 JJ병원, 광희한방대학병원이었다. 원래도 윤도의 치매 논문에 참여했던 세 병원이 앞 다투어 신약처방을 내준 것이다.

그건 단순한 안면관계가 아니었다. 신약의 치료율은 기존 약과는 비교불가였다. 부작용의 우려도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으로 퍼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그건 약품제도였다. 윤도가 개발한 치매신약, 전문의약품으로 분류가 되었다. 그건 곧 의사들의 전유물이 된다는 의미였다. 애석하게도 한국의 의료법상, 한의사에게는 전문의약품 처방이 막혀 있었다. 한의사가, 한약재로, 한약의 원리에 맞춰 개발했음에도 처방권이 없는 모순이 되어버린 것이다.

“적어도 생약 중심의 전문의약품만이라도 허용되면 좋으려만...”

장백교 박사에게 들어온 의견이었다. 윤도도 공감하는 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공론화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채 선생님.”

차가 도착하자 정 비서관이 반겨주었다.

“오시는데 불편하지는 않았습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늦은 건 아니죠?”

“늦은 건 아니지만 대통령께서는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좀 서두를 걸 그랬네요.”

“그런데...”

정 비서관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말씀하세요.”

“실은 저희 장모님께서 난감한 질환이 있으신데 혹시 선생님이 치료 가능하신지...”

“어디가 불편하신데요?”

“그게 엉치 꼬리뼈 쪽이... 벌써 오래 되셨답니다.”

“굉장히 불편한 쪽이로군요. 앉는 것도 불편하실 테고...”

“가능할까요?”

“저희 한의원으로 보내주세요. 제가 우리 실장에게 말해두겠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제가 오늘 우리 마누라에게 점수 좀 따겠습니다.”

정 비서관이 반색을 했다.

“채 선생!”

윤도가 들어서자 대통령이 다가왔다. 비서관의 말처럼 오래 기다린 눈치였다. 왜 아닐까? 치아는 오복의 하나로 꼽힐 만큼 굉장한 비중을 차지한다. 마치 공기와도 같아 치아가 건강할 때는 실감하지 못하지만 이빨이 부실하거나 빠지고 나면 진가를 알게 된다. 씹는 즐거움이 식욕이나 색욕에 못지않다는 걸.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빨이 부실해지면 씹고 싶고 뜯고 싶어진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부족한 것에 강한 미련이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이빨이 나는 일.

대통령은 물론이오, 치과 전문의 자문의들도 상상조차 못한 일.

그러나 태산전자 이 회장 쪽에 은밀히 확인까지 해보고 나니 기대감이 폭발한 대통령이었다. 그 처방자는 채윤도. 가는 곳마다 기적을 행하는 한의사였으니 일언반구의 의구심도 없었다.

“늦어 죄송합니다.”

윤도는 꾸벅 인사부터 했다.

“아닙니다. 앉아요, 앉아.”대통령이 자리를 권했다.

“잠을 설치셨습니까? 눈이 피로해 보이는군요.”

“솔직히 그랬습니다. 우리 영부인 마님하고 내기를 했거든요.”

“내기라고요?”

“새 이빨 말입니다. 우리 영부인 마님, 채 선생 실력을 알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이빨은 가능할 거 같지 않다고 하기에...”

“무슨 내기를 하셨나요?”

“이빨이 나면 임기 후에 평생 가사 면제권을 걸었지요.”

“대통령께서도 가사를 하시나요?”

“뭐 지금이야 여기 들어와 있으니 직원들과 비서관들이 해주지만 영부인과 함께 있으면 이 사람도 마당쇠에 불과하답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우리 사모님, 갱년기 짜증이 보통이 아닙니다.”

“영부인도 같이 봐드릴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윤도의 제안하자 대통령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대통령의 진맥부터 잡았다. 지난번에 이상을 보이던 위마비는 제대로 풀려 있었다. 영약 처방에 대한 문제도 없었다.

“받으시죠.”

윤도가 영약환을 건네주었다.

“이게... 이빨이 나는 묘약입니까?”

“잠드실 때 잇몸으로 물고 주무시면 됩니다. 3일을 반복하면 새 이빨이 나올 겁니다.”

“오오!”

“이제 영부인을 불러주시겠습니까?”

“아, 우리 사모님.”

대통령이 소탈하게 반응을 했다. 처음에는 어렵게만 보이던 대통령. 몇 번 만나다보니 소박한 인품이 좋았다. 그래서 뭐든 돕고 싶은 윤도였다.

영부인은 전형적인 갱년기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수족냉증이 심했다.

수족냉증.

일단 비장의 기혈문제가 대두된다. 다음으로 몸이 차고 양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반대의 케이스도 있으니 바로 상열하한의 경우였다. 현대인들은 스트레스와 피로, 섭식의 불균형으로 간과 심장에 화가 쌓인다. 이렇게 되면 열이 위쪽으로 몰리면서 손발 등의 말단으로 혈액공급이 잘 되지 않아 수족냉증이 나타난다. 40대 이후의 여성이 냉증에 걸리면 호르몬의 변화가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사실 침도 많이 맞아봤는데...”

영부인이 진료실 침대에 누웠다. 진맥을 잡았다.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호르몬이 아니라 자궁냉증이었다.

“관절도 좀 안 좋으시죠?”

윤도가 물었다.

“예. 요즘 들어...”

“제가 편안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윤도의 시침이 시작되었다. 첫 침은 소장수혈과 차료혈에 들어갔다. 자궁의 이상을 바로 잡는 시침이었다. 다음으로 삼초를 조절해 울혈을 없앴다. 삼초에 문제가 생기면 혈맥계열의 병이 생긴다. 마지막은 손가락의 관충혈, 합곡혈, 외관혈에 더불어 등 쪽의 지향혈을 잡아 상열하한의 문제를 정리했다. 중심부의 열을 말단으로 밀어준 것이다.

침감을 몇 번 조절하자 한열의 편차가 개선되었다. 대미는 비장의 비수혈과 장문혈이었다. 미래의 보험용이자 마무리였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윤도가 발침하며 웃었다.

“어머!”

손을 만져본 영부인이 소스라쳤다. 냉랭하던 손발에 온기가 돌고 있었다. 두근거리던 가슴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던 얼굴의 홍조도 사라진 후였다.

“아휴, 이렇게 간단한 걸...”

영부인이 윤도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대통령에게 건너간 시선은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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