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 채 선생님에게 말 좀 해주지 그랬어요? 맨날 좋은 건 혼자서 다 하시고...”
영부인의 미간이 살포시 일그러졌다. 그러자 대통령이 조크를 날렸다.
“아이고, 우리 채 선생. 용하신 분이 갱년기 쪽은 영 아닌가 보네요.”
“예?”
“우리 영부인님 말입니다. 치료가 되었으면 나긋나긋해져야할텐데 이건 평소하고 똑 같이 바가지잖아요?”
“대통령님!”
듣고 있던 영부인의 목소리가 빼액 높아졌다.
“저 것 봐. 치료된 게 아니라니까.”
대통령의 너스레에 윤도가 웃었다. 영부인도 웃었다. 퍼스트레이디와 대통령 부부. 이럴 때는 그들도 영락없는 보통 사람일 뿐이었다.
“이거 엄청난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 할 텐데... 애로사항 있나요?”
집무실로 돌아온 대통령이 운을 떼었다.
“의견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만...”
“뭡니까?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죠.”
“제가 조제해 드린 그 새 치아나는 약 말입니다. 대량생산은 불가능하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제가 대통령님께 드리지 못했을 겁니다.”
“왜죠? 채 선생이 만든 약인데?”
“제가 만들었지만 전문의약품이나 일반의약품으로 등록을 하면 의사만 처방권을 가지게 됩니다. 한의사는 그 약을 쓸 수 없게 됩니다.”
“그런 모순이?”
“한의사로서 비애를 느끼는 제도죠. 적어도 한방생약이나 생약원료로 만든 약만이라도 처방권을 가졌으면 하는 게 바람입니다.”
“말씀은 알겠습니다. 다만 내가 의약품처방에 대해 잘 모르니 비서관들 통해서 공부 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일단은 운을 떼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대통령이 관심을 표명한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채 선생님.”
영부인은 보답이라며 선물을 바리바리 내주었다. 그녀가 외국에 나갔을 때 받은 기념품 중의 일부였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윤도, 대통령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청와대를 나왔다.
대물은 큰 그림을 그린다-2
대물은 큰 그림을 그린다-2
“청와대 일은 잘 보셨습니까?”
음식점에서 만난 류수완이 말을 건네 왔다. 그는 차 이사와 둘이었다.
“한약 처방만 전하고 왔습니다.”
“우리 채 선생님은 몸이 두서너 개 쯤 있어야 하는데...”
“제 말이 그겁니다.”
옆 자리의 차 이사가 거들고 나섰다.
“아, 엘리자베스 건도 말씀드리세요.”
류수완이 차 이사를 돌아보았다.
“CF건 말이군요?”
“CF건이요?”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이틀 전에 연락이 왔는데 얼굴 피부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답니다. 사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차 이사가 사진을 꺼내놓았다.
“우와!”
사진을 본 윤도가 감탄사를 토했다. 완전한 생얼의 엘리자베스. 흉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미국에서 말하던 영화가 머잖아 크랭크 인 될 거라고 합니다. 해서 선생님 말대로 CF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분위기 떴을 때 밀어붙이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광속이군요.”
“그래서 말인데... 그녀 말이 광고료는 진짜로 선생님께 드려야한다고...”
“그건 맞습니다. 엘리자베스에게 받을 치료비거든요.”
윤도가 웃었다. 계산은 계산이었다.
“아무튼 저희 광고대행사에게 물었더니 엘리자베스 정도라면 1년 계약에 기본 30억은 책정한다고 합니다. 해서 그대로 책정했습니다.”
“부담이 되면 좀 깎아드릴까요?”
“천만에요. 사장님 말씀은 이슈를 위해서 오히려 50억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사장님.”윤도가 류수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십시오. 실탄은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주가는 연초 대비 무려 12배나 올랐고 각국의 판매독점권으로 들어온 계약금과 선금이 1억불 가깝습니다. 선생님 지분 입금하고 R&D 투자에 공장 확충까지 해도 실탄이 남아도는 실정입니다.”“그건 반가운 소리로군요.”
“광고도 R&D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치매 스토리까지 담겼으니 100억을 줘도 남을 장사입니다.”
차 이사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그 문제는 사장님 생각에 맡기겠습니다.”
윤도는 류수완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박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대우를 해준다는 데야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두 번째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차 이사가 다른 서류를 꺼내놓았다. A4에 정리된 국가치매추방사업건에 대한 요약이었다.
“국가치매추방사업 계획안? 이건 왜?”
윤도가 물었다.
“복지부 직원들이 오는 이유입니다. 원래는 회사에서 만날까 했습니다만 일단은 의견청취 성격이라기에 밥집을 택했습니다.”
“우리 신약이 관련 문제일까요?”
“그렇습니다. 기존 제약사들의 반발이 있기는 한 모양인데 우리 신약 ‘그노몬’의 효능이 북미시장에서 인정을 받았으니 표면화 시키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서류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부가 치매와의 전쟁을 선포하려는 프로젝트입니다. 치매 심각성을 이제 깨달은 거죠. 이대로 가면 30여 년 후에는 노령인구 2할 가까이가 치매환자가 될 판이거든요.”
“치매가 심각하긴 합니다. 게다가 평균 연령은 더 늘어날 테고요.”
윤도도 동의했다.
“사실 의약계에서 지속적으로 위험신호를 주었지만 예산과 정치적 우선순위에 밀려 받아들여지지 않았지요. 그 결과 지난해 기준으로 치매환자가 70만여 명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굉장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지부의 의중은 뭘까요?”
“계획안을 보면 치매치료제 연구개발과 조기진단이 역점사업입니다. 일단 10여 년 간 약 2조원을 투입해 토탈 치매관리책을 마련하겠다는 건데 우리에게는 치료약 쪽을 상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의라면?”
윤도는 구체적인 의견을 원했다.
“가격문제 같습니다. 우리 약의 단가가 기존 약보다 조금 높게 책정되었지 않습니까? 약효로 보아 당연한 겁니다만 국책사업은 예산이라는 문제가 있으니...”
“단가는 최대 12%까지 여유가 있습니다. 대량납품이라면 말이죠.”
류수완이 수치를 제시했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사장님, 지난번에 통화로 말씀드린 사안 말입니다. 오늘 분위기 봐서 화두로 삼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의약품 제도 말이군요?”
“예.”
윤도가 답했다.
의약품제도.
청와대에서 말한 문제였다.
<한의사>
의료인에 속하지만 의사에 비해 제약이 많았다. 우선 의약품 조제와 처방권에서 그랬다. 한의사가 질병치료를 위해 전문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을까? 슬프게도 ‘없다’가 정답이다. 그럼 일반의약품은 어떨까? 그 또한 ‘없다’ 쪽이었다.
한의사는 자신이 치료용으로 사용하는 한약 및 한약제재를 자신이 직접 조제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 일반의약품이나 전문의약품을 처방, 조제할 권한은 없었다.
대통령에게 말했듯이 여기서 모순이 발생했다. 현행법에 의하면 윤도가 개발한 치매신약 ‘그노몬’. 개발자인 윤도조차 처방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저희 법무팀에서 법안 분석을 해보았는데 개발자라고 해도 일반, 전문의약품으로 등록되면 처방은 불가능해지는 것으로...”
류수완이 뒷말을 흐렸다.
“쩝... 법이라는 게 참...”
차 이사도 쓴 입맛을 다셨다.
“방법이 없는 겁니까? 신약 자체야 치매환자들을 위한 거지만 생약 중심에 한방 혈자리 원리를 적용한 신약을 한의사들은 건들릴 수도 없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법안이 문제인데 부령이나 예외조항을 넣게 되면...”
류수완이 의견을 냈다.
“하긴 이 문제는 채 선생님만이 이의제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분위기도 그렇고... 분위기 될 때 큰 그림 한 번 그려보시죠.”
차 이사가 힘을 실어주었다.
“도착했다는군.”
류수완이 문자를 보며 말했다. 잠시 후 발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들어왔다. 노 차관과 이 국장, 그리고 지 과장이었다.
“노 차관님.”
윤도가 반색을 했다. 차관 일행도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윤도 쪽에서 셋, 복지부에서 셋. 모두 여섯 사람. 일단 식사부터 했다. 공적인 자리였으니 식사비는 개별 2만원에 세팅을 했다. 김영란법 때문이었다.
화제는 단연코 윤도였다. 노 차관도 미국의 일을 알고 있었다.
“월드 스타 엘리자베스를 직접 본 소감은 어떠셨나?”
노 차관이 호기심을 보였다.
“차관님도 팬이신가요?”
“나는 뭐 남자 아닌가? 그 친구가 미모도 미모지만 연기가 되잖나?”
“그렇긴 한데 저는 얼굴에 피부갑착증이 심할 때 만나는 바람에 처음에는 매력을 몰랐습니다.”
“허어, 가진 자의 배 부른 소리...”
“나중에 공항에 배웅을 나왔는데 그때는 매력이 보이더군요.”
“미모 얘기는 조크고 아무튼 대단했네.”
“으음, 조크가 아닌 거 같은 데요?”
“응? 그런가? 내가 이거 표정관리가 미숙해요.”
노 차관이 웃자 일동이 함께 웃었다. 몇 마디 덕담이 오간 후에 노 차관이 본론에 시동을 걸었다.
“실은 오늘 채 선생과 류 사장님 고견이 필요해서 말이지...”
“말씀하십시오.”
윤도가 추임새를 넣었다.
“이 국장이 말씀드리시게.”
노 차관이 이 국장에게 공을 넘겼다.
“길게 이야기하자면 한이 없고 간단히 얘기하겠습니다.”이 국장은 명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정부가 치매사업에 역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조기진단, 치료, 환자간병, 인프라 구축이 주요 골자인데 이 자리에서는 신약문제입니다. 그 전에 미리 밝힙니다만 저희가 이미 기존 병원의 의사와 환자들을 상대로 당해 네 개 제약사의 제품에 대해 전수조사를 마쳤습니다. 아울러 국제공인기관의 약효 분석 또한 받아둔 상태고요.”
“......!”
전수조사와 국제공인기관 검사.
두 용어에서 류수완과 차 이사가 꿈틀 반응했다. 전수조사까지 끝났다면 거의 내락이 된 수준일 수 있었다. 약효에는 자신이 있는 류수완.
그러나 전수조사와 약효 분석이란 어떤 측면에서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니 여론조사와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일부 측면만을 부각한다면 왜곡된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많은 정부 사업들은 그런 선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꿀꺽.
류수완이 마른 침을 넘겼다. 차 이사 역시 이 국장에게 꽂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결과...”
핸드폰의 자료를 보던 이 국장이 뒷말을 붙여 놓았다.
“강외제약의 새 치료제 ‘그노몬’이 압도적인 최고점을 받았습니다.”
“오!”
긴장하던 류수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결과는 이미 특별위원회 쪽으로 넘어가 있습니다. 원래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여러 제약사에 고른 기회를 주려고 했습니다만 사업의 목적이 치매퇴치가 되다보니 재고 말 것도 없는 분위기가 되었고 대통령께서도 법에 얽매여 형식 찾지말고 내실을 기하라는 엄명이 계셨습니다.”
형식보다 내실.
윤도의 신약에 이로운 발언이었다.
“해서 특별위원회에서도 따로 검토 중이긴 합니다만 뒷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딴죽을 방지하기 위한 의견을 좀 드릴까 싶어서...”
“......”
“그노몬 치매신약... 특허도 나왔지요?”
“그렇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연합도... 모든 심사를 통과했다는 통보가 와 있습니다.”
차 이사가 대답했다.
“이 약에 대한 원천권리는 채윤도 선생님, 생산판매권한은 강외제약... 맞습니까?”
“맞습니다.”
“해서 두 분에게 묻습니다만... 저희가 이 약을 수의계약식으로 진행하는 방식으로 독점권을 드린다면 위원회가 사전에 조사한 시장평균가격보다 조금 낮은 가격으로 파트너가 되어주실 수 있는지요?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약의 성분이나 주요 함량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국장이 윤도와 류수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답은 저희 채 선생님께서 해주실 겁니다. 저는 채 선생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니까요.”
류수완이 윤도에게 결정권을 넘겼다.
“사장님.”
“그게 맞습니다. 이 약의 주인은 선생님입니다.”
“......”
“그러니 선생님의 신념대로 하십시오.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
윤도는 황망했다. 신약개발자인 것은 맞지만 신약의 경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OK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더구나 류수완으로부터 12%의 여유를 들은 상황...
“치매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대승적 차원에서 수용하겠습니다.”
잠시 골똘하던 윤도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고맙습니다. 그럼 강외제약의 입장도 같은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 국장이 류수완을 돌아보았다.
“다만...”
거기서 윤도가 말꼬리를 잡고 나왔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시게.”
노 차관이 답했다.
“세 분은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제가 개발한 치매신약 말입니다. 현행법에서는 저조차 치료처방을 내게 되면 불법이 되더군요.”
“......!”
세 관료의 눈이 동시에 출렁거렸다. 그들 역시 오는 막간에 나누었던 화제였다.
“그렇습니까?”
윤도가 확인 차 물었다. 겸손하지만 묵직한 눈빛이었다.
“그렇네.”
차관이 답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노 차관이 침묵했다. 이 국장과 지 과장도 그랬다. 윤도가 만든 한방 치매신약. 그러나 윤도가 처방할 수 없게 되는 현행법. 누가 봐도 ‘유구무언’이 되어버리는 현실이었다.
“제가 개발했지만 제가 사용하려면 원방을 가지고 매번 탕약을 만들어야합니다. 백 명이 오면 백 번, 천 명이 오면 천 번. 간편하게 쓸 수 있는 약을 만들어놓고도 말입니다.”
“채 선생...”
“이건 굉장한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래 가지고서는 다음 신약을 만들 의욕이 나지 않습니다.”
“......”
“죄송하지만 이 약만은 한의사들에게, 아니 그조차 안 된다면 최소한 저라도 제 신약을 처방할 수 있는 방법을 부탁드립니다.”
윤도의 딜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