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좀 안 좋으시네?”
윤도가 고개를 갸웃하자 옆 좌석의 안미란이 운을 떼고 나왔다.
“TS전자 김 전무님요?”
“예.”
“백혈병 때문 아닐까요?”
“백혈병요?”
“잠깐만요.”
안미란은 뭔가를 검색하더니 윤도 앞에 내밀었다. TS전자 관련 보도였다.
“이슈가 되길래 읽어봤는데 그쪽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 두 명이 백혈병에 걸렸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직원이 같은 생산라인에서 근무한 사람이라네요. 그러니까 A가 먼저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퇴사했는데 그 자리에 들어온 B직원이 2년 만에 또 백혈병 판정을 받은 거예요. 나중에야 서로의 사실을 알게 된 직원들이 회사에 백혈병 배상을 요구했는데 TS에서는 인과관계가 없다며 거절하고 치료비만 일부 대준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두 직원이 언론에 호소를...”
“그래요?”
윤도시선이 기사로 옮겨갔다. 기사의 맥락은 안미란의 말대로 였다.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두 직원의 연속 백혈병 진단.>
<다른 라인의 직원들은 정밀 역학조사에서 관련 없음 판정.>
<회사는 작업환경평가서를 들어 두 직원의 주장을 일축.>
기사만 보면 양 쪽 다 공감이 가는 일이었다. 같은 라인에서 일한 두 직원의 연속 백혈병 진단. 우연일까? 회사는 우연으로 보고 직원들은 필연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댓글은...
당연히 직원들 편이었다. 그들이 약자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회사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상황. 그렇기에 윤도가 필요한 눈치였다.
백혈병...
생각하는 사이에 서울에 닿았다. 그런데, 도로가 좀 복잡했다. 소방차들도 분주히 출동을 했다.
“어디 불이라도 났나?”
핸드폰을 체크하던 안미란 얼굴이 하얗게 굳어버렸다.
“원장님...”
화면에 꽂힌 그녀는 뒷말조차 잇지 못했다. 화재현장, 바로 일침한의원 쪽이었다.
화마火魔 속의 소방관-2
“......!”
얼어붙기는 윤도도 마찬가지였다. 불이었다. 그것도 노도처럼 타고 있었다.
“원장님!”
안미란의 목소리가 찢어졌다.
“안전벨트 조여요.”
윤도 목소리가 변했다. 동시에 가속 페달에 힘이 들어갔다.
바아앙!
스포츠카가 치고 나갔다. 뒤에서 쫓아오던 진경태로부터 전화가 들어왔다. 그들은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윤도가 받지 않자 안미란에게 전화가 왔다.
“한의원에 불이 난 것 같아요.”
안미란이 외쳤다. 진경태의 차도 폭주를 시작했다. 앞서 가던 차량을 추월하며 쏜살처럼 달려나왔다. 소방차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시커먼 화마가 보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윤도가 미친 듯이 뛰었다.
“원장님.”
안미란이 외치지만 돌아보지도 않았다.
불...
불이었다.
소방차가 빨갛게 모여 있었다. 윤도가 다가서자 통제 경찰들이 윤도를 막았다.
“저기 한의원 원장입니다.”
윤도가 경찰을 밀었다.
“위험합니다. 들어가면 안 됩니다.”
경찰은 비켜주지 않았다. 불길은 심각했다. 한의원 인근에서 발화된 불이 옆 건물로 옮겨 붙었고 지금은 윤도 한의원과 나란한 목조건물을 태우고 있었다. 불길에 휩싸인 3층 건물. 천연목재로 리모델링을 한 건물이었다. 구조로 보아 윤도의 한의원이 불 붙는 건 시간문제였다.
“원장님!”
진경태와 종일이 도착했다.
“천영희 아줌마는요?”
윤도는 직원의 안부부터 물었다. 미화원인 천영희는 한의원이 문을 닫는 날에도 나와서 청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에 있답니다. 지금 여기로 나오고 있다고...”
“그건 다행이군요.”
화답하는 윤도의 시선은 여전히 불길에 있었다. 인명피해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한의원 안에는 무척 소중한 물건이 있었다. 바로 신비경이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입니까?”
윤도가 통제 경찰에게 물었다.
“저희 서장님과 소방서장이 현장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어디죠?”
“저쪽입니다만...”
윤도는 경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뛰었다. 동시에 청와대 정 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의원은 아직 불 붙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열복을 빌려서라도 신비경을 가지고 나와야했다.
하지만...
‘젠장!’
비서관에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계속 통화 중인 것이다. 다행히 소방서장은 안면이 있었다. 구대홍 덕분이었다. 15년 전 화재 진압 시 허리를 다친 소방서장. 고질병 달고 살다 구대홍의 소개를 들었다. 가까운 곳이니 긴가민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허리를 펴준 게 윤도였다.
“소방서장님.”
윤도가 지휘소에 뛰어들었다.
“원장님.”
“죄송합니다. 한의원에 좀 들어가야 합니다.”
“환자가 있습니까? 저희가 체크했습니다만...”
“중요한 물건이 있습니다. 불에 타면 안 되는 물건입니다.”
“하지만...”
소방서장의 시선이 한의원으로 향했다. 한의원은 이미 화재의 사정권이었다. 게다가 옆 건물이 전소직전까지 치달으면서 한의원 쪽으로 기운 상황. 들어가면 목숨을 기약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죄송합니다만 허락할 수 없습니다.”
“가야합니다. 방열복을 내주세요. 안 된다면 그냥이라도 가게 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소방서장님!”
“이봐, 여기 원장님 모셔. 지금 흥분하셔서 좀 쉬셔야겠어.”
소방서장이 대원들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불길 속으로 뛰어들까 내리는 사전조치였다.
“들어가야 합니다. 내 목숨만큼 소중한 게 있다고요.”
윤도가 소리치는 사이, 누군가가 한의원으로 뛰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둘이었다.
“막아, 위험해!”
현장 지휘관이 소리쳤다.
‘아저씨?’
윤도 눈이 무한확장되었다. 화마가 일렁이는 마당으로 뛰어든 건 진경태와 종일이었다. 종일은 현판을 떼어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진경태를 따라 한의원으로 들어갔다.
“뭐하나? 당장 구출하지 않고.”
소방서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쿨럭!”
한의원으로 들어선 진경태는 기침부터 토했다. 접수실 쪽은 연기와 열기로 가득했다. 벽을 더듬으며 방향을 가늠했다. 진경태는 알고 있었다. 윤도의 보물이 무엇인지.
‘거울...’
쓰임새는 몰랐다. 그러나 윤도가 몹시 아낀다는 것만은 아는 그였다.
“건물이 쓰러집니다!”
현관으로 진입하는 소방관들에게 외침이 들려왔다. 불길에 휩싸인 옆 건물이 기울고 있었다. 일침 한의원으로 무너지면 단숨에 불바다가 될 한의원.
“이봐요. 옆 건물이 무너져요. 빨리 나와요!”
소방관이 안에 대고 외치는 순간, 건물이 속절없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원장님!”
안미란이 소리쳤다. 그 눈은 무너지는 건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건물... 한의원을 위협하던 옆 목조건물... 윤도 쪽으로 기울던 각도에 반전이 일어났다. 우지끈 소음과 함께 반대방향으로 주저앉은 것이다.
“천운이군. 불길 잡아.”
소방서장이 확성기로 외치자 무너진 건물로 물줄기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의원으로 들어간 진경태와 종일이 소방관들에게 이끌려 나왔다. 그들은 간절했지만 연기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소방관이 지옥의 불덩이와 연기를 뚫고 나왔다. 이번에는 옆 목조건물 쪽이었다. 그는 동료 소방관을 들처 매고 있었다.
“아저씨.”
윤도가 진경태에게 뛰었다. 한갓진 곳에 눕히고 응급 혈자리를 잡았다. 종일의 혈자리도 함께 잡았다.
“후아!”
콜록콜록.
진경태와 종일이 가쁜 숨과 기침을 몰아쉬었다.
“무슨 짓입니까? 미쳤어요?”
윤도가 다그쳤다.
“그러는 원장님은요? 우리가 안 들어갔으면 원장님이 들어갔을 거 아닙니까?”
“아저씨...”
“젠장, 원장실이 코앞이었는데... 더 견딜 수가 없었어요.”
“아저씨...”
“종일이는요?”
“저기 옆에요.”
대답은 안미란이 대신했다.
“아, 저 자식, 젊은 놈이 나보다 약해가지고...”
진경태의 핀잔에는 연기보다 진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촤아아!
물길이 잔불을 잡았다. 소방관들이 두 번의 확인을 끝내고서야 한의원 출입이 허락되었다. 한의원 안에는 아직도 연기가 가득했다. 열기도 사막처럼 후끈했다.
“원장님.”
종일이 현판을 가져왔다. 그가 구한 현판이었다.
“고마워.”
윤도가 인사를 했다. 다행히 무사하지만 타버렸을 수도 있었던 현판. 윤도는 종일을 당겨 등짝을 푸근하게 쓸어주었다.
“형!”
잠시 후에 윤철이 뛰어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함께였다.
“어휴, 뉴스 보고 가슴이 무너지는 줄 알았네.”
어머니가 안도의 숨을 쓸어내렸다.
“다 무사하니까 돌아가세요. 정리 좀 해야겠어요.”
“형, 정리는 내가 한다. 형은 좀 쉬어. 지진현장에서 진 다 빼고 왔을 거 아니야? 게다가 여기서는 또 얼마나 놀랐겠어.”
윤철이 나섰다.
“됐다. 이게 너 혼자 할 일이냐?”
“이거 왜 이래? 나도 이런 건 형 도울 수 있다고. 야, 다들 들어와.”윤철이 소리쳤다. 그러자 윤철의 친구와 후배 30여 명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윤철아!”
윤도가 놀라자 윤철이 잘라 말했다.
“가서 쉬라고. 나도 멋진 형한테 좋은 동생 한 번 되어보게.”
윤철과 친구들은 헌신적인 노력봉사를 했다. 외관을 정리하고 그을린 벽을 닦아냈다. 안에 들어찬 연기도 죄다 몰아냈다. 옆 건물의 붕괴로 인한 진동으로 엉망이 된 물건들도 제 자리에 모셔놓았다.
숫자는 위대했다. 30여 명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자 2-3시간 만에 원상복구가 되었다. 그나마 불길이 닿지 않은 덕분이었다.
“복구 끝, 원장님께 보고합니다.”
윤철이 거수경례를 하며 결과를 알려왔다. 친구들은 숯덩이가 되었지만 한의원은 말쑥해져 있었다.
“고생했다. 가서 친구들 밥 사 먹여. 제일 비싸고 좋은 걸로.”
윤도가 카드를 내주었다.
“땡큐.”
윤철이 카드를 받아들었다.
“어때요? 피해는 없나요?”
약제실에 들러 상황을 점검했다.
“다행히 괜찮습니다만 연기가 배인 일부 약재는 전부 버려야할 것 같습니다.”
“약침액들은요?”
“그것들은 괜찮습니다. 밀봉 칸이라 연기가 들어가지 못했고 워낙도 약병 안에 들어있으니까요.”
“문제가 될만 한 것들은 아끼지 마시고 버리세요. 환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진경태의 보고를 듣고 원장실로 돌아왔다. 매케한 연기 냄새가 나지만 안은 무사했다. 신비경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소중히 모셔두고 접수실로 나왔다. 정나현과 연재, 승주, 천영희 등은 집기에 배인 연기냄새를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그만들 들어가세요. 그렇잖아도 피곤할 텐데...”
“그러는 원장님은요?”
승주는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배 샘은 예은이가 기다리잖아요?”
예은이는 연재의 아기 이름이었다.
“이미 어머니께 SOS 쳐놨어요. 기꺼이 허락하신 걸요.”
“......”
윤도 말문이 닫혔다. 한의원에 대한 애정이 강하기에 혼자 편한 길 찾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리모콘을 닦은 승주가 접수실 텔레비전을 켰다.
“리모콘도 이상없어요.”
승주가 웃었다.
“뉴스 좀 틀어봐.”
공기청정기 필터를 확인하던 정나현이 말했다. 승주가 리모콘으로 채널을 바꾸었다. 화면에 남쪽의 지진 소식에 이어 윤도네 화재사고가 나왔다.
“오늘 저녁, 서울에서 발생한 화재는 불법주차된 차량이 발화점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현장의 기자가 사건개요를 중계하기 시작했다.
“이 사고로 건물 네 채가 타고 인근의 차량 여섯 대가 전소했습니다. 한편 화재는 최근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일침 한의원까지 덮칠 상황이었는데 한 소방대원의 목숨을 건 사투로 무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소방대원?”
정나현이 고개를 들었다. 윤도도 그랬고 승주와 연재도 그랬다.
“소방서 당국에 의하면 애당초 화재가 일어난 건물에서 어린이 두 명을 구하고 나온 진압대원이 진압도끼로 목조건물의 서까래를 무너뜨려 붕괴 중심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그 덕분에 불길도 잡고 한의원으로 불이 번지는 것도 막았다고 합니다. 이 대원은 현재 중증 화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된 것으로...”
“원장님.”
승주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윤도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어쩐지였다.
한의원 쪽으로 무너질 것 같던 목조건물. 이유 없이 방향이 바뀐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