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 (224/265)

“실장님.”

비로소 윤도가 화상 클리닉 실장에게 돌아섰다.

“예.”

“과연 어렵군요. 장기손상과 더불어 급격한 부종... 오늘 밤 넘기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그렇죠?”

“그게...”

실장의 말꼬리가 무너졌다. 그의 판단 역시 포기 쪽이기 때문이었다.

“이 환자 제게 맡겨주십시오. 실장님 혼자 결정하기 어렵다면 이철중 진료부원장님께 연락해주세요. 보호자에게는 제가 동의를 받겠습니다.”

“채 선생님.”

“시간이 없습니다. 어차피 클리닉 선에서는 손을 놓은 거 아닙니까?”

돌직구가 날아왔다.

대한민국 최고 화상치료 전문가의 한 사람인 SS병원 화상 클리닉 실장. 그가 포기한 화상환자에게 도전하려는 채윤도. 윤도의 소문을 들은 닥터들이지만 한결 같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윤도가 구대홍에게 돌아섰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선전포고-2

선전포고-2

카오스.

무질서와 불규칙의 정수가 거기 있었다. 본시 중병으로 죽는 환자들은 오장의 기가 희미해진다. 더러 불규칙 맥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또한 순간적일 뿐이었다. 하지만 구대홍의 카오스는 달랐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건강하던 육체. 돌연 가해진 화마가 젊은 육체에 지옥을 안겨주고 있었다.

오장육부들은 처절하다 못해 참혹했다. 맥은 지옥의 고통에 놀라 중구난방으로 뛰며 엇갈렸다.

“아저씨!”

시침을 하기 전에 진경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장님.”

“혼자만 들으세요. 약제실에 제가 관리하는 약침액 있죠? 그거 되는 대로 다 쓸어오세요.”“예?”

“시간 없습니다. 다 쓸어서 SS병원 화상 클리닉으로요.”

윤도가 전화를 끊었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장침을 뽑았다. 화상의 혈자리라면 외관혈과 축빈혈, 혈해혈 등이 꼽힌다. 폐를 위해 풍문혈과 폐수혈에도 시침을 할 수 있었다.

첫 침은 사관혈에 들어갔다. 손발은 그나마 온전한 편이었다. 마음이 급하기에 기본부터 지켰다.

‘침착해, 침착해.’

자침을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는 윤도였다. 두 번째 출격점은 혈해혈이었다. 이 또한 엉망이 되어버린 기의 순환과 혈액순행을 위한 조치였다.

‘열...’

해열제와 진통제, 진정제 등이 들어가고 있음에도 구대홍의 몸은 불덩이였다. 열을 잡기 위해 활육문과 대거혈을 취했다. 사력을 다해 침을 감았다 풀었다. 열은 잘 내려가지 않았다. 한 번 더 시도해도 변하지 않았다.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수액을 따라 들어가는 해열제와 진통제가 보였다.

“미안하지만 저 것들 좀 잠궈주시겠습니까?”

윤도가 홀로 남은 레지던트 홍태용에게 요청했다.

“선생님 제 생각에는 로딩을 더 빨리해야...”

로딩...

수액을 더 빨리 넣자는 말이었다.

“혈청도 잠그세요.”

윤도가 한 수 더 나갔다.

“선생님...”“제가 잠글까요?”

윤도가 다그쳤다. 레지던트는 마른 침을 넘기고 요청에 따랐다. 그 사이에 윤도의 침은 삼초의 기를 다스렸다. 이어 중완혈과 양지혈을 뚫었다. 어떤 혈자리는 화상으로 다 녹아버렸지만 그 본연을 찾아 찌르는 윤도였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고 은백혈을 찾았다. 은백혈은 극도의 열 작용이 있을 때 해열에 명혈이 되는 혈자리다. 웬만하면 양지와 중완혈로 잡혔을 열이지만 여기까지 오는 윤도였다. 은백혈자리의 피부는 멋대로 뭉개져 있었다. 드레싱이 된 상처 위로 혈자리를 뚫었다. 위태롭게 점만 남은 혈자리에서 침감을 조절했다.

“......!”

다행히 혈자리가 침감을 받았다. 은백혈을 중심으로 해열작용이 시작되었다. 곡지혈에 침을 더하고 중부혈에도 한 방을 넣었다. 중부혈은 폐의 열을 다스리는 명혈인 까닭이었다.

쉴 새도 없이 오장을 향해 출격했다. 한껏 사나워진 심장부터 달랬다.

심수혈과 거궐혈.

폐수혈(중부혈은 이미 꽂았으니 생략).

간수혈과 기문혈.

비수혈과 장문혈.

신수혈과 경문혈.

단숨에 수혈과 모혈을 꿴 윤도가 오장의 기혈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사나운 장부는 기세를 죽였고, 위태로운 장부에는 기혈을 더했다. 멋대로 칼각을 세우던 장부들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그건 구대홍에게 연결된 현대의학의 의료기기들이 잘 보여주고 있었다. 바이탈 사인 또한 여전히 위험수치 부근이었다.

“아르스미아(Arrhythmia)가 심해집니다. 디곡신과 라식스는 투여해야...”

레지던트가 울상을 지었다. 아르스미아는 부정맥이라는 용어다. 그렇기에 강심제와 이뇨제를 넣자는 의견이었다.

“의견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윤도도 부종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신적인 부종이었다. 나아가 심장성, 간성, 신장성이 동시에 일어나는 치명타였다. 그러나 나트륨을 제한하고 강심제와 이뇨제, 부신피질 호르몬 같은 것으로 잡기에는 한계치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레지던트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의사의 기본이었다. 죽음이 목전에 이른 환자지만 최후까지 보살피려하니 좋은 의사가 분명했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왔다.

“진경태라는 분이 왔습니다.”

“들여보내주세요.”

대답하는 순간에도 윤도는 침을 놓지 않았다. 저승에 가까워지는 초고속열차를 붙잡고 있는 윤도. 손을 놓기만 하면 단숨에 멀어질 생명이었다.

“원장님.”

진경태가 들어왔다. 멸균복 차림이었다. 치료실 안의 분위기를 본 진경태는 바로 얼어붙고 말았다.

“약은요?”

윤도가 물었다.

“여기...”

진경태가 영약과 약침액을 담은 트레이를 내놓았다. 윤도가 시선을 돌렸다. 순초가 보이고 웅황이 보이고 당호와 문요어, 백야와 굴거 등이 보였다. 뭘 쓸까 생각할 때 쓰러진 병 하나가 보였다. 무심코 세워보던 윤도의 눈에 약제 이름이 보였다.

‘육(鯥)?’

육.

병을 보내 산해경의 영약이다. 국산약침과는 색이 다른 병으로 관리하는 까닭이었다. 마음이 급하니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황급히 생각을 더듬었다. 그러다 남산경이라는 출처를 보고서야 정체가 떠올랐다.

‘저산...’

이 산도, 그 산도 아니고 저산에서 가져온 영약이었다. 겨울에는 죽었다가 여름이 오면 살아나는 신비한 생명체. 바로 이유 없는 말단 부종을 치료하기 위해 찾아 쓰고 남은 영약이었다.

“열어주세요.”

윤도가 말했다. 그 손은 이미 장침을 잡고 있었다. 진경태가 약침액을 따자 윤도가 침끝을 넣었다. 약침은 전중혈로 들어갔다. 전중혈은 오장의 기를 콘트롤한다. 특별히 심장 쪽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침감이 반항을 했다. 엉클어진 기가 길을 막는 것이다.

별 수 없이 중완혈을 잡았다. 거기서 상체로 기를 밀자 전중혈의 약침액이 퍼지기 시작했다. 두 방을 더 넣어 삼각대형을 이루었다. 약침은 상초와 중초, 하초로 퍼져갔다. 그러나 속도는 굼벵이가 기어가듯 느리고 또 느렸다.

‘제발...’

기해혈에도 한 방이 들어갔다. 원기로써 화기를 밀어내려는 생각이었다. 곡지와 척택혈에도 장침을 보탰다. 이는 극심한 대상포진에 쓰던 시침법이었다.

“하아.”

지켜보는 진경태는 숨이 막혔다. 그로서도 난생 처음 보는 사투였다. 오직 침 하나로 맞서는 최악의 응급상황. 예전 자신의 움막에서 허리를 고쳐주던 윤도가 떠올랐다. 그때처럼 윤도는 주저함도 포기도 없었다.

1시간.

2시간...

시간이 흘러갔다. 의료기기들의 수치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고개를 젓던 레지던트, 문득 시선이 골똘해졌다.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 단어가 그의 뇌리에 천둥을 쳤다. 이건 비관이 아니었다. 그들의 판단대로라면 지금쯤 사망하거나 죽음의 직전까지 가야했을 환자. 그런데 몇 시간 전과 비슷한 상황에서 멈춰 있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 환자는 수액을 제외한 모든 투약과 처치가 중지된 상태였다.

‘우.’

레지던트는 아찔했다. 이건 절망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윤도 뇌리에는 아직 불이 켜지지 않았다. 몇 시간의 사투에도 현격한 차도는 없는 구대홍. 이제 산해경 영약까지 넣었지만 의미 있는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채윤도...’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극렬한 화상으로 인해 참담한 상처들. 그러나 죽은 사람도 살렸던 윤도였다.

‘그렇다면 나는?’

이 상처에 현혹된 걸까? 처참한 상처 때문에 허둥지둥 방향을 잃고 있는 걸까? 만약 외상이 없다면 어떻게 했을까? 서두르던 손을 잠시 쉬었다. 그 눈에 의사의 명찰이 들어왔다.

홍태용.

레지던트의 이름이었다. 홍태용을 보니 홍대용이 생각났다. 의산문답을 쓴 조선시대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지구가 생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이아 이론과 같은 궤였다.

<지구는 활물(活物)이다.>

그의 주장이었다. 활물은 곧 살아있는 생물을 뜻한다. 흙은 지구의 살이오, 물은 피, 비와 이슬은 눈물이자 땀이고 풀과 나무는 지구의 모발이라고 했다. 다만 짐승과 사람은 이와 벼룩에 비했다. 지구가 생명체라면 분별없이 건설된 도시는 피부질환에 비할 수 있었다. 그 피부병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지진을 일으키고 화산을 폭발시키며 태풍과 쓰나미를 일으킨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렇다면 구대홍. 저 지구에 발생한 돌연한 화상. 지구라면 바닷물을 뒤집거나 폭우를 내려 상처를 씻으려할까? 정말 지구가 생명체라면,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

‘이독제독?’

긴 생각 끝에 윤도가 그 결론을 잡았다.

장침으로도 수그러들지 않는 구대홍의 화기. 그렇다면 이 화기는 화기로써 다스리는 게 답일 것 같았다.

‘후우.’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해열을 위해 넣어둔 침을 거꾸로 감기 시작했다. 열을 내리는 게 아니라 올리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폐수혈과 중부혈이었다.

‘구대홍 씨...“

마지막 사투를 벌이긴 전에 환자를 바라보았다.

‘나 믿죠?’

“......”

‘그렇다고 말해줘요.’

“......”

‘말 안 해도 소용없어요. 우린 이 길을 가야 해요.’

“......”

‘시작할 게요. 어쩌면 좀 힘들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극한을 넘어봤죠? 우리 한의원을 구하기 위해 불덩이를 뒤집어쓰는 동안 말이에요.’

“......”

‘어쩌면 그 고통이 한 번 더 올지도 몰라요. 부탁하는데 그것만 넘겨줘요.’

순간 거짓말처럼 신호가 왔다. 중부혈에 꽂힌 장침이었다. 느닷없이 티잉, 짧은 울림이 온 것이다.

“......!”

숨이 멈출 것 같았다. 아까도 그랬다. 그렇다면 구대홍은 윤도를 믿고 기대고 있었다. 신뢰라고 생각한 윤도가 벼락처럼 침을 돌렸다.

후끈!

구대홍의 몸이 반응을 했다. 이마와 겨드랑이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원장님...”

땀을 본 진경태가 입을 열었지만 뒷말은 하지 않았다. 환자와 함께 불 타는 윤도를 본 까닭이었다.

‘가라, 가!’

윤도는 미친 듯이 화침을 쏟아부었다. 혈자리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열작용이었다.

“선생님.”

보다 못한 레지던트가 입을 열었지만 진경태가 막았다. 어차피 이 안의 운명은 윤도가 쥐고 있었다.

후웅!

구대홍의 얼굴에 붉은 빛이 돌았다. 체온상승의 극한이었다. 동시에 바이탈 사인들도 미친 듯이 빽빽거리며 이상을 가리켰다.

10.

활화산 같은 체온상승을 이룬 윤도가 카운트다운을 세었다.

9.

이제는 윤도도 땀범벅이었다.

8.

손에서 나는 땀이 침 끝에 떨어졌다.

7.

삑삐이... 이제는 의료장비들도 비명을 질렀다.

6.

5.

4...

마침내 수액까지 환자의 열기가 전도되었을 때, 침감을 조절하던 장침을 뽑아버렸다.

삐이...

동시에 바이탈 사인과 의료장비들의 디지털 사인이 꺼졌다.

“운명... 한 거 같습니다.”

지켜보던 레지던트가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체념한 건 닥터 혼자였다. 진경태는 윤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채윤도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환자를 보낼 리가 없었다.

윤도의 시선은 구대홍에게 있었다. 사우나에서 갓 나온 듯 피부 전체에서 김이 모락거리는 환자... 냉혹하게 발바닥 용천혈에 장침을 넣고 머리의 백회혈을 잡았다. 발바닥은 방열화 때문에 무사했다. 머리의 백회혈도 방열모 때문에 쉽게 혈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뜨끈한 머리 안으로 침을 넣었다.

‘깨어라!’

윤도의 명령이었다. 인간 구대홍이 아니라 장침을 받드는 혈자리에 대한 지상명령. 윤도의 명령이 혈자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대로 발바닥 용천혈의 명령은 위를 향해 올라왔다.

두 명령은 서로 다른 궤를 그리며 혈맥을 타고 돌았다. 백회혈은 음맥의 바다 임맥을 호령했고, 용천혈은 양맥의 바다 독맥을 호령했다. 세 번 일주한 두 혈이 중초 부근에서 만났다. 단전이었다.

삐익!

다시 의료장비가 불협화음을 내질렀다.

“......?”

그걸 바라본 레지던트의 눈에 기적이 일어났다. 환자의 상태가 가파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원장님.”

진경태가 소리쳤다. 그러나 윤도는 무아지경으로 구대홍 앞에 있었다. 부종이 빠지고 있었다. 이제야 윤도의 장침들이 약빨을 받고 있었다. 내부의 카오스는 잡았다. 지옥행 초고속열차를 세운 것이다.

끼익!

급제동소리가 아름다웠다.

극적 회생-1

극적 회생-1

화상.

그것도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화상...

구대홍의 환부는 넓었다. 목조건물이 무너지며 무수한 파편의 불똥을 맞았다. 방열복이 한계에 달하면서 열기가 밀려들었다. 목과 볼 쪽도 무사하지 못했다.

당장은 목숨이었다. 그러나 회복이 된다면 그 다음은 흉터였다. 인간의 품격을 유지해야했다.

“홍 선생님.”

윤도가 레지던트를 불렀다.

“예.”

넋을 놓고 있던 레지던트가 휘적휘적 다가왔다.

“이 환자, 위기를 넘기면 어떤 치료과정을 밟죠?”

“피부이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환부가 너무 넓어서...”

“환부만 문제입니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걸로 봅니다. 특히나 관절부위의 화상은 수술을 해도 다시 벌어질 우려가 있고요.”

“다른 방법은 없나요?”

“다른 방법이라면?”

“피부이식 외의 치료법 말입니다.”

“피부줄기세포법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피부줄기세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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