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 좋지. 어제는 오돌뼈에 한 잔 했다네. 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지.”
“맥을 좀 볼까요?”
“그래주시겠나?”
이 회장이 손목을 내주었다. 이 회장의 맥박은 그런대로 조화로웠다. 이빨은 골수에 뿌리를 넣고 있다. 그러나 진짜 뿌리는 ‘신장’에 닿아있다. 신장의 맥은 나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새로 난 이빨에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치아가 자리를 잘 잡았네요. 이제는 일상적인 관리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시죠.”
“실은 며칠 전에 대통령을 만났다네. 일자리 창출 문제로 말이야.”
“아, 네...”
“대통령 치아도 채 선생이 치료해드렸다고?”
“예, 제가 한방 자문의를 맡다보니...”
“덕분에 공감대가 생겨서 말하기가 좋았네. 사실 요즘 청와대가 우리 TS에 각을 세우고 있거든.”
“......”
이 회장의 목소리가 살짝 무거워졌다. 김 전무도 그랬다.
<백혈병>
감이 왔다. 현재의 대통령은 노동자 친화형이다. 그 참모진들도 그렇다. 그렇다면 이슈가 된 TS 생산직 백혈병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의견이 개진되었을 수 있었다. 대통령 쪽의 의견이라면 TS에 부담이 될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 전무가 커밍아웃을 했다.
“다 백혈병 때문일세.”
“예...”
“청와대에서는 직업병으로 인정하기를 바라는 눈치인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네. 만약 직업병을 인정하면 그 파급효과가 일파만파로 번지게 될 걸세. 해당 공장의 폐쇄까지도 고려해야 하고 말이야.”
“관련 직원들은 도착해 있나요?”
“한 20분 되었네.”
“그럼 가봐야겠군요. 환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윤도가 차를 비워냈다.
“그래서 말인데 채 실장.”
이 회장의 시선이 윤도에게 날아왔다.
“예.”
“백혈병도 될까?”
“의자는 병자를 두고 장담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죠.”
“병의 기원은 어떤가? 양방처럼 질병 발병의 원인규명도 할 수 있나?”
“일단 환자를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이 회장의 당부를 들으며 복도로 나왔다. 김 전무도 따라나왔다. 회사의 입장은 알 것 같았다. 논란이다. 그러나 환자가 치료된다면 논란은 종식될 수도 있었다. 이 회장의 눈에는 그런 기대가 담겨있었다.
“채 실장.”
의무실 앞에서 김 전무가 돌아보았다.
“......”
“부탁하네. 채 실장이 고쳐만 준다면 이슈도 함께 사라질 걸세.”
“예.”짧은 대답을 남기고 의무실에 들어섰다. 윤도 눈에 두 마스크가 들어왔다. 여직원 둘은 눈만 내놓은 멸균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팔 다리 여기저기에 남은 멍 자국에 더불어, 여리여리 창백한 피부에 어리는 멍의 기운과 바랜 자줏빛 피부... 백혈병의 느낌은 겉으로도 느껴졌다.
다가서기 전에 손부터 씻었다. TS의 입장도 함께 씻어보냈다. 한의사는 진료를 볼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검은 차도르의 여인 같은 여직원들이 고개를 숙여 응답했다. 한 사람은 20대 후반, 또 한 사람은 30대 초반. 같은 공정에서 일하다 같은 백혈병에 걸린 사람들. 그래서 그런지 이미지도 닮아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응급환자와 씨름하느라 많이 늦었습니다.”
여직원들에게 사과부터 날렸다. 몸이 불편한 이들. 이유가 어쨌든 엊그제 헛걸음을 했을 일이었다.
진맥을 잡았다.
오장육부의 오행질서가 엉망이었다. 특히 간과 비장이 그랬다. 사나운 기세도 없이 그저 애통하다. 기혈의무력감과 더불어 뼈와 눈 쪽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백혈병.’
연장자도 손목을 잡았다.
‘백혈병!’
진단은 명백했다.
간호사가 가져온 병원의 진료기록을 보았다.
병명은 너무나 또렷하게 보였다.
CML(Chronic myeloid leukemia).
CML, 만성골수성 백혈병의 약어다.
백혈병 중에서도 가장 흔한 것으로 백혈구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상태다. 수치는 정상인 백혈구의 5000-9000에 비해 10만~30만/mm3으로 증가하며, 대부분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백혈구들이다. 반대로 혈소판은 크게 감소되어 코피, 잇몸출혈, 피하출혈, 뇌출혈에 더불어 열이 올라간다.
그 현상은 이미 그녀들 몸의 곳곳에 있었다. 검은 마스크에 배인 혈흔의 자국과 드러난 피부마다 맺힌 검푸른 혈흔들...
그러나 그녀들의 절망은 백혈병에만 있지 않았다. 그녀들 생각으로는 명백한 직업병. 그러나 회사는 그녀들을 버렸다. 오늘에 이르러 윤도에게 진료를 주선하고 있지만 초창기 약간의 위로금 외에는 관심이 없던 회사였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회사에서 진료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병원 밖 외출도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이 제의를 받아들인 건 윤도의 명성 때문이었다. 회사와의 투쟁도 중요하지만 병부터 나아야했다. 그렇지 못해 사망하게 되면 진실이고 뭐고 다 날아갈 판이었다.
그 비장미는 그녀들의 눈에서 읽을 수 있었다. 보조하는 간호사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다. 그녀들은 윤도의 질문에도 최소한의 대답만 하고 있었다.
“이 샘은 나가 계세요.”
분위기를 읽은 윤도가 의무실 간호사에게 말했다. 간호사가 돌아섰다. 그녀는 의무실 행정팀장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회장의 직속라인으로 구분되는 윤도였다. 팀장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아.”
순간 연장자가 몸을 움츠렸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열이 좀 오르는 것 같아요.”
연장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백혈병 환자에게 열은 치명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윤도의 장침 한 방이 열을 말쑥해 내려주었다.
“이 안에는 우리 밖에 없습니다.”
발침을 한 윤도가 뒷말을 이었다.
“질문이 있으면 기탄없이 하세요.”
“채윤도 선생님.”
연장자가 입을 열었다.
“네.”
“저희는 사실 두 가지를 믿고 이 진료에 응했습니다. 선생님의 의술과 선생님의 신뢰...”
“......”
“그동안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셨죠. 도쿄에서 베이징, 이제는 미국과 운명 직전의 소방대원의 화상치료까지. 방금 직접 경험해보니 대단하네요. 장침이 들어가기 무섭게 열이 잡히니...”
“......”
“죄송하지만 바로 묻겠습니다. 선생님의 침술로 저희 병도 고칠 수 있나요?”
연장자의 말과 함께 두 여자의 시선이 윤도를 겨누었다. 절실하면서도 팽팽한 날이 선 시선이었다.
“후자까지 먼저 말씀해주시지요.”
윤도가 웃었다. 윤도의 신뢰. 그녀들에게는 어떤 가치인지 궁금했다.
“신뢰란... 선생님이 정의의 편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동안의 행적이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확인하려는 건 선생님이 TS의 회장과 친하고 이 회사의 직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분히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
“두 분의 병은 고칠 수 있습니다.”
“......!”
윤도의 전격 선언. 두 여자의 시선이 검은 마스크 안에서 출렁 흔들렸다.
“그러나 두 분이 원하는 건 치료에 더해 명예회복이겠죠. 두 분이 회사에 생떼를 쓴 게 아니라 억울한 피해자라는 것. 그리하여 보상금이나 우려먹으려는 작태가 아니라 정당한 요구였다는 것.”
“맞아요.”
“그러자면 두 분의 질문은 방향이 틀렸습니다.”
“선생님.”
“제일 먼저 그걸 물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두 분의 백혈병이 개인적인 것이냐 근무환경에 기인한 것이냐?”
“선생님이 그것도 아실 수 있나요?”
“역학조사를 해봐야겠죠.”
“어떻게 말이죠?”
“밖에 시위하는 사람들, 동료들인가요?”
“네.”
“두 분과 같은 라인에서 근무한 사람들도 있나요?”
“세 명 정도...”
“불러주세요, 바로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윤도 입에서 칼빨 서린 말이 나왔다.
지상 최고의 처방-2
지상 최고의 처방-2
“채 실장.”
당장 김 전무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윤도의 응수는 명쾌했다.
“치료를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김 전무는 이의를 달지 못했다. 결국 여자 세 명이 의무실로 들어왔다. 손을 씻게 하고 마스크부터 채웠다.
윤도가 역학조사임을 설명했다. 세 여자는 의아해했지만 동료였던 환자 둘의 부탁에 따라 윤도의 요청에 응했다. 그들 역시 윤도가 누군지 아는 까닭이었다.
백혈병에 걸린 두 여자를 더해 다섯 여자를 침대에 눕혔다. 백혈병 환자들은 대조 맥으로 삼았다. 시약으로 치면 콘트롤의 역할이었다.
신장!
윤도의 조사처는 신장이었다. 신장에서 중완혈과 양팔의 곡지혈, 양다리의 족삼리, 머리의 백회혈 반응을 체크했다. 음양오행의 법칙에 따라 배치된 혈자리에서 역학조사를 하는 것이다.
맥이 왔다.
오방을 이룬 맥이 윤도 손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그 오방의 자리에 장침을 꽂았다. 침감이 전해오는 신장의 기를 읽었다. 다섯 여자의 맥과 기는 닮은 곳이 있었다. 신장의 원기를 위협하는 날선 까칠함. 혈맥의 불안과 초조감. 혼돈과 미몽의 느낌. 일반인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세 여자에게도 백혈병의 인자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신장의 기혈을 위협할 정도가 아니라 발병이 되지 않았을 뿐.
직업병.
확실해졌다.
어쩐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TS전자에게는 불리한 진단이었다. 그 진단을 윤도가 내린다면? 이 회장이나 김 전무에게 치명적인 뒤통수가 될 수도 있었다.
우리가 남이가?
그들이라고 그런 생각이 없을까?
하지만!
윤도는 한의사였다. 의술은 오직 환자를 위할 뿐.
“세 분, 협조해주셔서 고맙습니다.”인사로 세 여자를 내보냈다. 그런 다음 환자들에게 다가섰다.
“결과는요?”
두 환자가 물었다.
“제 판단으로는 직업병입니다.”
주저 없는 답이 나왔다.
“......!”
“직업병 맞습니다.”
한 번 더 강조함으로써 쐐기를 박았다.
환자들은 윤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백혈병의 치료만큼이나 기대하던 말이 나온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백혈병 치료용 장침을 가져오겠습니다.”
대충 둘러대고 의무실을 나왔다.
“채 실장.”복도의 김 전무가 다가왔다.
“회장님을 좀 뵈어야할 것 같습니다.”
“문제가 있나?”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나한테 말씀하시게. 회장님은 신제품 발표문제로 개발실장과 미팅 중이시라네.”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문제가 있군?”
TS의 온갖 현안을 다루는 김 전무. 켜켜이 쌓인 경륜의 소유자답게 감을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윤도의 말은 변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뵙고...”
똑똑!
김 전무가 회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가 들어가자 개발실장이 나왔다. 윤도와 인연이 있는 스떼빤과 함께였다.
“채 선생님.”
스떼빤이 반색을 했다. 윤도는 부드러운 미소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들어오시게.”
잠시 후에 김 전무가 윤도를 불렀다.
‘후우!’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
윤도 말을 들은 이 회장이 놀란 시선을 들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
“나수연 씨와 공선희 씨는 직업병입니다.”
윤도가 잘라 말했다.
“채 실장.”
김 전무의 눈빛이 맹렬하게 흔들렸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결과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그걸 여과없이 회장에게 보고해버리는 윤도 때문이었다.
“직업병이라고?”
이 회장의 눈이 김 전무를 향했다.
“어떻게 나온 진단인가?”
김 전무가 물었다. 다른 한의사나 의사라면 공박이라도 했을 일. 그러나 윤도는 김 전무가 다그칠 수준의 의술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그였다.
“아까 참고한 직원들이 증거입니다. 그들에게서도 두 환자의 백혈병에서 잡히는 혼돈과 미몽의 기와 맥이 나왔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그 라인에서 근무한 전체 직원에 대해 역학조사를 벌였네. 우연의 일치를 이룬 두 근로자 외에는 전부 문제가 없었네. 작업환경평가서의 측정치들도 기준 이내였고.”
“전무님.”
“......?”
“제가 말씀드리는 건 양방에서 다루는 정상, 비정상, Negative, Positive, Reaction, Non Reaction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무님의 눈이 작살이 나도 오장의 검사는 문제가 없었지 않았습니까? 회장님의 치아도 그렇고 심지어는 조금 전에 본 스떼빤의 경우도...”
“......”
“저는 지금 한방의 기혈과 진맥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양방의 장비와 검사법으로는 기혈과 진맥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윤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 담담함 속에는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해일의 묵직함이 있었다. 내 진단에 범접치 마라. 담담함 속에서 배어나오는 신념은 김 전무의 경륜으로도 대적할 수준이 아니었다.
“확실한가?”
주목하던 회장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