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9화 (229/265)

‘상지수로 개어 바른다?’

상지수만 빼면 법제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소용이 될 수 있을까? 적영토를 바라볼 때 인터폰이 울렸다.

“원장님, 손님 오셨어요.”

승주 목소리였다. 류수완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정 총재님은 사정이 생겨서 조금 늦는다고 합니다.”

우산을 접은 류수완이 소식을 전해왔다.

“정치 일정이 바쁜 모양이군요?”

윤도가 차를 권하며 물었다.

“정치가 아니고 집안 일이라네요. 눈치를 보니 손녀에게 사고가 난 모양입니다.”

“사고요?”

“이 양반이 손녀라면 꿈뻑 죽거든요.”

“말 타는 손녀 말입니까?”

“어? 그걸 다 아세요?”

“검색을 하다 보니 나오더군요. 승마선수라고...”

“어이쿠, 제가 뭐 도움이 좀 되나했더니 저보다 빠르군요.”

“별 말씀을...”

“아무튼 양념은 대략 쳐두었습니다. 나머지는 채 선생님이...”

“반응은 어떻습니까?”

“나쁘지는 않은데 정치인들은 말 바꾸기의 명수입니다. 확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속단하시면 안 됩니다.”

“예...”

“채 선생님이 대비하실 건 공천 이야기입니다. 제게도 언질을 하더군요.”

“저는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그 말 전했더니 정 총재께서 그러더군요. 자기도 처음에는 정치에 관심 없었고 현재 정치하는 사람들치고 처음부터 정치하려고 태어난 사람 거의 없다고...”

“관철 시키겠다?”

“지금 여야가 전부 혈안 아닙니까? 어느 쪽이든 채 선생님이 합류하면 득표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그때 류수완의 전화기가 울렸다.

“총재십니다. 거의 다 왔다는군요.”

통화를 끝낸 류수완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비는 이제 거의 그쳐가고 있었다.

“이여, 여기가 바로 대한민국 최고 명의 채윤도 선생의 왕국이로군요?”

보좌관과 들어선 정광패가 너스레를 떨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윤도가 정광패를 맞았다.

“고생이랄 게 있습니까? 국민영웅을 만나는 일인데...”

“어깨가 불편하시다고요?”

“아, 예... 나도 이제 늙었는지...”

정광패가 어깨를 움직여 보였다.

“진료부터 할까요?”“좋지요. 우리 명의님 침 맛 좀 보여주세요.”

정광패는 호탕했다. 성큼 진료침대에 눕더니 셔츠 깃을 걷어주었다.

‘오십견...’

류수완의 정보는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기운이 빠졌다. 총재에게는 미안하지만 큰 병이 있으면 좋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오장육부 기운은 동년배에 비해 10년은 젊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M자 탈모가 좀 심하다는 것.

그 자리에서 견우혈에 장침을 넣었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끝났습니다.”

윤도가 발침을 하며 말했다.

“벌써요?”

“움직여보시죠.”

“아니, 나는 침이 들어오는 것도 몰랐는데... 응?”

어깨를 움직이던 정광패가 동작을 멈췄다. 신기하게도 통증이 사라진 것이다.

“맥을 보니 거의 철인이시군요. M자 탈모 외에는 다 정상이십니다.”

“아, 탈모... 얼마 전부터 이마 모서리가...”

정광패가 쓴 입맛을 다셨다. 탈모 좋아할 인간은 지구상에 없을 테니까.

“기름진 음식 좋아하시죠?”

“식성도 알아요? 내가 육고기를 좀 좋아하기는 하지요.”

“오신 김에 잡아드릴까요?”

“M자 탈모도 가능합니까?”

“잠깐 엎드려 보시겠습니까?”

윤도가 정광패의 몸을 돌렸다. 신수혈 좌우 자리로 장침 두 개가 들어갔다. 주치료 혈자리는 경문혈이었다. 경문혈은 옆 머리 탈모와 엷은 눈썹에 명혈로 꼽혔다. 뜨끄한 화침으로 넣었다. 좌우 경문혈을 자극하자 기혈이 상체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20분.

타이머가 울리자 발침을 했다.

“보시죠.”

윤도가 손거울을 내주었다. 그걸 본 정광패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이, 이럴 수가...”

정광패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썹 때문이었다. 희끄무레하던 눈썹이 숯덩이처럼 변해있었다. 아울러 M자 탈모... 나날이 허전해지던 자리에도 털이 수북하게 올라오고 있지 않은가?

“이거...”

정광패가 보좌관을 바라보았다.

“총재님...”

보좌관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심란한 내 정신줄이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건가?”

정광패는 침대에 가부좌를 튼 채 거울을 놓지 못했다.

“큰 사고라도 난 겁니까?”

한 쪽에 있던 류수완이 분위기를 타고 들어왔다.

“크지. 아주 큰 놈이 사망 직전이거든요.”

“큰 놈이라면... 손녀가 하나가 아니시군요?”

“하나요. 하지만 하나가 아니라 둘이지. 우리 손녀 놈이 제 목숨만큼 아끼는 놈이 있거든.”

“예?”

“애마 말입니다. 총재님 손녀와 동거동락하던 승마용 말이 좀 이상했는데 불치병 판정이 나왔습니다. 홍콩 국제승마대회장 현장을 돌아보고 돌아온 손녀가 그 검사결과를 알고는 충격을 받아서...”

“......”

“아, 우리 채 선생님, 혹시 말 탕약은 없습니까?”

류수완과 대화하던 정광패가 윤도를 돌아보았다. 반은 농담, 반은 진담이었다.

“어떤 병에 걸린 겁니까?”

“그게... 사연이 좀 긴데... 우리 손녀 놈 애마가 원래 한 쪽 눈이 좀 안 좋아요.”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윤도가 답했다. 검색으로 알게 된 사연이 있었다.

“그래요? 그렇지만 혈통은 기가 막힌데... 그런데 이 놈이 하필이면 그 말에 꽂혀서 승마를 시작했는데 이번에 몹쓸 병에 걸렸지 뭡니다.”

“병명을 기억하십니까?”

“EIA라고 말전염성빈혈이라더군요. 이게 사람 빈혈과 달라서 한 번 걸리면 불치병이라 안락사를 시켜야한다고...”

설명은 보좌관의 입에서 나왔다.

‘안락사?’

“말도 마세요. 아무튼 우리 손녀가 이 말 안 고쳐주면 자기도 따라 죽겠다고 어제부터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치료가 안 된다는데 무슨 수로 고치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아들 놈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라 거기 다녀오느라 부득 약속에 늦었습니다.”

정광패가 고개를 저었다.

유난히 손녀를 사랑하는 정광패. 그 낙담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오늘 제 표정이 좀 굳었습니다. 이 사람이 원래 채 선생님 만나서 공천문제도 이야기하고 류 사장님이 말씀한 한약 처방권 문제도 얘기할까했는데... 아무튼 우리 당은 채 선생님을 위해 비례대표 1번을 비워두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비례대표 1번.

완전 보증수표를 내미는 정광패였다. 하지만 윤도의 생각은 ‘말’에 있었다. 한 쪽 눈의 장애와 말전염성빈혈... 그리하여 안락사를 맞이하게 될 명마... 그로 인한 충격으로 단식투쟁에 들어간 손녀...

“의원님.”

윤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

“한약 처방권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류 사장에게 들으니 일리가 있더군요. 다만 법안이라는 게 누워 떡 먹듯 되는 일이 아니라서 소관 상임위 의원들 설득도 해야 하고... 이해관계의 의사단체도 그렇고...”

“......”

“큼큼, 그러다 보니 채 선생이 우리 당 영입제의만 받아주시면 내가 어떻게 한 번 해보겠는데...”

“옵션이군요?”

윤도가 담담하게 물었다.

“그 뭣이냐... 옵션이라기보다 채 선생님처럼 참신하고 젊은 피들이 국회에 들어와 정치개혁을 한 번 이뤄야...”

“하지만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우선이지요.”

“예?”

“문자를 써서 죄송합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우리 손녀 놈 일이라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새 혈통마를 임대하거나 사주는 수 밖에.”

말.

말 많은 동물이 되었다.

지금 국내 상황이 그랬다. 윤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마장마술용 말은 굉장히 비싸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게다가 전임 대통령의 사건과 얽혀 있는 통에 거액의 명마를 사들인다면 국민들 시선도 곱지 않을 테고...”

“그게 문제긴 합니다.”

“인터넷에서 보니 이미 여론화 되었더군요. 고위층 자제들 중에서 승마하는 사람들... 다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죠. 그런데 손녀 분의 애마는 눈이 아픈 관계로 오히려 칭송이 되고 있더군요. 불쌍한 장애마를 자기 몸처럼 돌봐주고 한 마음이 되어 좋은 결과를 올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잖아도 그런 보도들 때문에도 우리 손녀 놈이 더 애마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그 말 제가 고쳐드리죠.”

“채 선생님이 말을요?”

“저랑 손녀에게 가시죠. 처방권이니 공천이니 하는 것보다 목숨이 우선입니다. 그게 말이라고 할지라도.”

윤도가 잘라말했다.

윤도.

말을 고쳐주고 정광패의 마음을 사려는 걸까? 하지만 윤도의 의도는 그런 수동적인 것에 있지 않았다. 재주를 내주고 처분이나 바랄 의술이 아니었다.

상황의 리드.

윤도의 생각은 명쾌했으니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상황을 리드하라-2

상황을 리드하라-2

“승아야, 문 좀 열어봐.”

과천 정광패 아들의 2층 주택. 아들의 아내가 2층 아들 방문을 두드렸다. 거실에는 정광패와 윤도가 도착해 있었다.

“문 좀 열어보라니까. 할아버지가 굉장한 분을 모셔오셨어.”

“됐어요. 다 필요 없으니까 가라고요!”

방안에서 날 선 목소리가 나왔다.

“제발 이러지 말고...”

“제가 말해보죠.”

윤도가 나섰다. 승아의 어머니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정승아, 나 채윤도라는 사람이야.”

“......”

이제는 침묵이다. 방안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나 한의사거든. 나랑 얘기 좀 할까?”

“......”

“나 잘 모르면 네이버에 채윤도라고 검색해봐. 너 도와줄 수 있어. 네 말도...”

“......”

“정승아...”

쾅!

노크하는 사이에 뭔가가 날아와서 문에 떨어졌다. 뒤를 이어 폭풍의 고함이 밀려나왔다.

“한의사잖아요? 나는 윈디안 고쳐 줄 수의사가 필요하다고요. 가세요!”

소리가 어찌나 큰지 2층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정광패와 승아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힘들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윤도 입에서는 쾌재가 나왔다. 방 안에서 대꾸가 나온 것이다. 그건 무반응보다 천 배는 나았다.

“검색해 보렴. 내가 장침을 기가 막히게 놓는다고 나오지 않니?”

“......”

“말 고치는 수의사를 마의라고 하는데 마의와 한의는 통하거든. 옛날 신의 손으로 불리던 명의 허임이라는 분도 마의 출신이야. 내 말이 틀린가 검색해봐.”

“......”

“나오지? 이거 너한테 온 마지막 기회야.”

“......”

“으음, 장애 말을 사랑하는 네 마음이 아름다워서 바쁜 시간내서 왔는데 정 그렇다면 가는 수 밖에.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나 무지하게 바쁜 사람이거든.”

“......”

“안 되겠군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윤도가 일부러, 정광패 쪽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미끼를 손녀가 물었다. 단숨에 문이 열리며 뛰어나온 것이다.

“선생님!”

단발의 여중생이 윤도 앞에 섰다.

“진짜 채윤도네요?”

손녀의 시선이 검색화면과 윤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난 분신술이나 카피 스킬 같은 건 없거든.”

“정말 말 병도 고칠 수 있어요?”

묻는 시선을 절박했다. 손녀가 말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한 99%쯤? 그 정도면 시도해볼만하지 않을까?”

“그럼 제 윈디안을 살려주세요.”

손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고개까지 떨구었다.

“안으로 가서 차근차근 얘기해볼까?”윤도가 승아를 부축했다.

“......!”

방 안에 들어선 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안 풍경 때문이었다. 우선 창문의 블라인드였다. 대형 브라인 드는 승아와 애마 사진으로 프린팅 되었다. 사방의 벽면 풍경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각종 상패와 트로피, 나아가 기념사진 등으로 도배가 된 방이었다.

‘이 아이에게 말이란...’

형제자매 이상로군.

윤도 마음이 숭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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