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1화 (231/265)

“하실 말 있으면 하세요?”

윤도가 돗자리를 펴주었다.

“그게... 괜한 애를 쓰시는 거 같아서...”

관리사가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 보이죠?”

“솔직히 처음에는 정 총재님께 잘 보이려고 그러겠지 싶었는데 사무실에서 검색해보니 그건 아닌 거 같더군요. 하지만 말은 사람과 다릅니다.”

“소중한 목숨인 건 같지요.”

“제가 말 관리사만 20여 년인데 이건 못 고칩니다. 말전염성빈혈은 세계적으로도 불치예요. 게다가 이 녀석은 눈까지 장애마라서...”

“치료 가능성은 0%일까요?”

“글쎄요, 0%까지야 아니겠지만...”

“그럼 됐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 윈디안이 듣는 데서 해도 되나요?”

“예?”

“불치병이니 장애마라니 하는 말...”

“그게 뭐 어때서요? 팩트 아닙니까?”

“선생님은 베테랑 말 관리사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옛날에 황희 정승 같은 분은 밭일 하는 소를 평가하는 것도 안 듣는 데서 했다고 하던데...”

“허어, 한의학을 해서 그런가? 젊은 양반이 고리타분에 먹통일세.”

관리사는 혀를 차며 돌아나갔다.

‘윈디안.’

윤도가 말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다 나으면 관리사는 바꾸는 게 좋겠다.’

푸륵!

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생님!”

식사를 하고 온 승아가 왕김밥과 오뎅국물을 가져왔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승아의 독촉에 한 입 베어 물었다.

“국물도 드세요.”

승아가 오뎅국물을 권했다. 그것도 한 모금 넘겼다.

푸륵!

윈디안이 콧김을 뿜었다. 녀석도 입맛이 도는 걸까?

“할아버지는?”

“무슨 의원 모임이 있다고 가셨어요. 급한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너도 따라서 집에 가지 그랬어?”

“저는 윈디안 지켜요.”

“말이 그렇게 좋냐?”

“쟤도 그랬거든요.”

“윈디안이?”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호주에 전지훈련 갔을 때였어요. 초원이 너무 아름다워 윈디안과 달렸어요. 그러다 길을 잃고 말았어요. 말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다가 미끄러지는 통에 언덕 아래 구덩이에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었어요.”

“......”

“물방울 느낌에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어요. 그제야 알았죠. 윈디안이 꼬리에 물을 묻혀 와서 구덩이 밖에서 뿌려주었다는 걸.”

“명마구나.”

“윈디안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사람들을 불렀어요. 그 덕분에 저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쉽게 발견할 수 있었죠.”

“......”

“윈디안은 한 눈으로 보지만 다른 말의 두 눈보다 더 마음이 넓고 깊어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혼자 두고 집에 갈 수 있겠어요.”

“오케이, 이 밤에 너를 윈디안 치료 간호사로 임명한다. 잘 할 수 있지?”

“고맙습니다. 선생님.”

승아는 윈디안 곁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맥을 잡았다.

기본을 세운 기혈은 크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제는 본격 치료에 들어갈 타임이었다. 잠시 시계를 보았다. 진경태 때문이었다. 따로 처방을 내린 약침이 있었다. 기왕에 치료하는 말전염성빈혈이었다. 그렇기에 치료법까지 찾아내려는 윤도였다. 윈디안이 아니더라도 안타깝게 안락사 될 명마가 있다면 구하고 싶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윤도가 다가섰다.

치료의 시작은 신장과 비장이었다. 세부 타겟은 골수와 지라 쪽이다.

적혈구의 부족.

이유가 뭘까?

아직은 원인이 나오지 않았다. 몇 가지 추측은 가능했다. 첫 째는 골수에서의 생산량 부족이다. 절대 생산량이 부족하면 빈혈이 온다. 둘째는 병든 적혈구의 생산이었다. 절대 생산량이 부족하지 않더라도 병든 혈구가 나오면 문제가 되었다.

지라 쪽에서는 적혈구 여과와 수리, 제거장치의 이상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문제 있는 적혈구의 감별능력이 떨어지거나 수리능력이 사라지면 비정상 적혈구가 늘어난다. 이런 것들이 쌓이면 심각한 문제가 초래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은, 두 기관이 아니라 제 3의 장부나 병소에 의한 것.

세 가지를 머리에 그리며 시침에 들어갔다. 일단 신장과 비장의 기혈을 올려 상황을 보려는 윤도였다.

신주혈과 경문혈, 비수혈과 장문혈에 망침을 넣었다. 심혈은 신주혈에 쏟아부었다. 원천치료를 표방하는 한의학적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30-40...’

숫자는 말의 심박수었다. 사람보다 느리다. 따라서 침감에도 심박수를 반영했다. 말의 골수 쪽에 기혈이 밀려들었다. 김밥을 먹기 전에 조치한 기혈 덕분이었다. 이제 손은 비수혈 쪽으로 옮겨갔다. 침끝을 감고 풀며 지라의 상태를 체크했다. 지라의 기혈도 조금씩 올라갔다.

1분.

혈액이 순환하기를 기다렸다.

‘쉣!’

윤도가 쓴 입맛을 다셨다. 되돌아온 혈액의 무게는 가벼웠다. 두 장부를 두고 나머지 장부를 체크했다. 큰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원인은 한 가지로 유추될 수 있었다.

<골수와 지라의 동시 이상>

그때 반가운 사람이 도착했다. 진경태가 달려온 것이다.

“만드셨습니까?”

윤도가 물었다.

“당연하죠. 누구 명령이라고요.”

진경태가 약침액을 내놓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이 놈이군요? 우리 원장님 간택을 받은 말...”

진경태가 윈디안을 바라보았다.

“아주 영리한 녀석입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한의원은요?”

“별 일 없습니다. 안 선생님이 워낙 사분사분하시니...”

“말씀드린 것도 다 챙겨오셨죠?”

“그럼요.”

“그럼 가보세요. 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약 필요하면 바로 연락하십시오.”

진경태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윤도의 시선은 약침액에 있었다. 산해경의 적영토로 만든 것과 윤도표 약침액, 두 가지였다. 윤도표는 골수와 비장에 좋은 비방이었다. 골수 약침의 주성분은 최상급 녹용에 역시 최상급 법제를 마친 지황, 소의 골수와 자석(磁石)가루를 적정비율로 섞었다. 혈자리의 반응을 고려해 내린 처방을 진경태가 수행해온 것이다.

자석만 해도 불에 구워 특급 감식초에 9번 담금질을 한 후에 가루를 내야하는 일. 그럼에도 착착 대령하는 진경태였으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승아!”

“네.”승아가 허리를 세우며 대답했다.

“이건 명령인데, 이제 대기실에서 잠깐 눈 붙이고 와라. 맑은 정신으로 해줘야 할 일이 있거든.”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그럼 윈디안이 아픈 눈을 뜨지 못할 지도 몰라.”

“네?”

“기왕 치료하는 건데 빈혈만 치료할 수는 없잖아?”

“선생님...”

“어서, 잠깐 자고 해 뜨기 전에 다시 와.”

“알았어요. 윈디안, 선생님 말 잘 들어, 알았지?”

승아는 말을 쓰다듬고는 마사를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시침을 시작했다. 이제는 오장직자침이었다. 약침은 두 가지를 동시에 처방했다. 소와 말의 질병을 낫게 하는 영약 적영토와 윤도가 만든 약침이었다. 윤도표 약침이 먼저 출격했다. 신장의 중심이었다. 선천 기가 모여 정(精)을 이루는 부분이었다. 미세한 부위라 침 끝에 잘 걸리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침은 헛발질만 거듭했다. 초보 채혈 간호사가 이럴까? 혈관은 있지만 바늘은 허무하게 빗나간다. 그것처럼 윤도의 침끝도 정의 코앞에서 헤매고 또 헤맸다.

다시 붕대를 동원했다. 말의 혈자리는 미세했다. 더구나 형체가 없는 정을 노리고 있으니 결코 쉬울리 없었다. 다시 감각과 육감을 끌어올리는 윤도였다. 손끝으로 혈자리 부근의 먼지 하나까지도 짚어냈다.

덜컥!

그제야 침 끝에 뭔가가 걸렸다. 신장의 정수 정이었다. 첫 반응은 미치도록 아련했다. 하지만 정은 곧 약침을 받아들였다.

화아아.

손끝에 따뜻한 느낌이 왔다. 뜨겁지도 따갑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그러자 골수 전체에 전등이라도 켜진 듯 환한 반응이 번져갔다. 마침내 치료의 길을 내는 윤도였다.

‘고맙습니다.’

윤도가 중얼거렸다. 하느님에게, 헤이싼시호의 기연에게,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감사였다. 여세를 몰아 지라에도 윤도표 약침을 넣었다. 같은 과정을 거치니 지라에도 활력이 돌았다. 윤도의 짐작대로 골수와 지라 양쪽의 문제였다. 차분하게 약침액의 반응을 분석했다. 그런 다음 산해경의 영약침을 하나씩 더 보태놓았다. 한순간 골수와 비장이 폭발할 듯 강력하게 반응했다.

“......?”

잠시 주목했다.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골수는 활력에 넘치고 지라의 여과와 수리기능도 물결처럼 힘차게 이어졌다.

히히이잉!

윈디안이 몸서리를 쳤다. 온몸에 도는 활력 때문이었다.

임맥이 빵빵해지기 시작했다. 독맥도 생기탱천으로 변했다. 음의 바다와 양의 바다가 조화를 이루자 윈디안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피부를 따라 불거진 혈관으로 번지는 생기가 윤도 눈에 보였다.

푸르륵!

윈디안이 두 발을 들어 허공을 긁었다. 힘이 넘치는 까닭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의 주인 승아가 돌아온 것이다.

“윈디안!”

승아가 뛰었다. 멀리서도 윈디안의 소리만으로 상태를 아는 승아였다.

“너, 다 나았구나? 그렇지?”

푸륵!

“고마워, 고마워, 다시 돌아와 줘서.”

승아가 말을 잡고 울었다.

“선생님.”

감격을 나눈 승아가 윤도에게 돌아섰다.

“미안하지만 아직 치료 끝난 거 아니거든.”

윤도가 멸균장갑과 플라스크를 내밀었다.

“뭔데요?”

“벌써 잊었어? 기왕 치료하는 김에 빈혈만 잡지는 않을 거라는 말.”

“선생님!”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눈도 고칠 수 있어. 할 수 있지?”

윤도가 플라스크를 건네주었다.

“그럼요. 뭐든 시켜만 주세요.”

“저쪽 끝에 연못이 있더라. 거기 연잎 위에 이슬이 모였을 거야. 해 뜨기 전에 모아와. 아, 물이 손에 닿거나 하면 절대 안 돼.”

“알았어요. 손대지 않고 여기 담아오면 되는 거죠?”

“오케이.”

“윈디안, 기다려. 네 아픈 눈도 고쳐주신대.”

승아가 어둠을 뚫고 달렸다.

푸륵푸르륵!

윈디안은 콧김으로 제 주인을 응원했다.

망침芒鍼으로 승부한다-2

망침芒鍼으로 승부한다-2

승아가 연못에 도착했다. 먼 산 너머에서 어스름이 터지고 있었다. 연잎 위에 이슬이 보였다.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은 물, 바로 상지수였다. 말의 눈병을 고칠 수 있는 산해경의 적영토. 그 눈에 이겨서 바를 약은 아직 만들지 않았다. 승아에게 맡기기 위한 배려였다.

주인이 구해온 상지수.

그렇게 눈을 뜨는 명마 윈디안.

그렇게 연결되는 관계라면 지구 최강의 케미로 거듭 날 것으로 믿는 윤도였다.

한 방울, 한 방울.

승아는 숨도 쉬지 않고 상지수를 모았다. 한 방울이 모일 때마다 윈디안의 목숨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플라스크 안에 모이는 이슬이 보석처럼 느껴졌다.

“네가 개렴.”

승아가 돌아오자 윤도가 적토를 내주었다. 특별한 법제가 아니었다. 그저 알맞은 비율에 정성을 더하면 될 일. 그렇다면 승아보다 더 적격자는 없었다.

승아가 적영토를 개었다. 꾀를 부리거나 쉬는 일도 없었다. 산해경의 재료에 상지수, 거기에 더해지는 승아의 정성으로 영약이 준비되었다.

푸륵!

제 약을 아는 지 윈디안이 반응을 했다.

“얌전히, 선생님이 네 눈도 보이게 해주신대.”

승아의 미소는 아침 첫 햇살보다도 싱그러웠다.

푸륵!

“다 나으면 선생님 먼저 태워드려. 알았지.”

승아가 윈디안의 볼에 얼굴을 비비는 사이에 윤도는 처방을 수행했다. 윈디언의 아픈 눈에 적영토 갠 것을 바른 것이다.

푸륵!

윈디안이 눈을 감았다. 목덜미를 감아쥔 승아는 윈디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얼굴을 잡고 잠이 들었다. 말도 주인을 따라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 다정한 자매처럼 보였다. 둘은 같은 꿈을 꾸고 있을까? 올림픽 시상대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는?

푸륵!

윈디안이 콧김을 뿜었다. 이제 그를 주목하는 눈은 한둘이 아니었다. 정광패가 오고, 그 아들부부가 도착했다. 해는 서산으로 살짝 기울어있었다. 만 하루를 꼬박 보낸 윤도였다.

“할아버지.”

정광패에게 붙어선 승아가 할아버지를 올려보았다. 정광패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머리에서 바글거리는 검사결과 때문이었다.

‘한천겔 면역확산법 Coggins test...’

조금 전, 도착하기 무섭게 받아본 결과서였다. 관리사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이 윈디안의 치료에 일조라도 한 듯...

한천겔 면역확산법은 말전염성빈혈의 검사법이었다. 이 검사에서 이상이 나오면 대부분 ‘안락사’로 간다. 윈디안의 운명도 그랬다. 승아의 성화 때문에 세 번이나 검사를 받았다. 세 번 다 양성판정이었다. 안락사 시간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 결과가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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