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
생각하는 사이에 추이펑의 타이머가 먼저 울렸다. 윤도가 발침을 권했다. 썩소를 머금은 추이펑이 자기가 찌른 장침을 잡았다. 그 상태에서 기혈을 체크했다. 한국의 명의 채윤도.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했을까? 추이펑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얻어놓은 건가? 입가에 가득하던 냉소가 벼락처럼 멈췄다.
“......!”
추이펑의 뇌리에 아찔함이 스쳐갔다. 기혈 때문이었다. 미각세포를 살리기 위해 야심차게 세팅한 기혈이 변해 있었다. 그 자신이 밀어 넣은 펄펄 뛰는 기혈이 아니었다. 힘 뒤에 촘촘한 부드러움이 딸렸다. 그제야 알았다. 윤도의 침술은 헛발질이 아니었다.
추이펑이 5번 경추 혈자리에서 2번 경추의 기혈까지 조절해버리자 윤도는 차선책을 택했다. 그저 2번 경추 자리를 찔러 형식을 맞추는 게 아니라 기왕에 들어간 침의 빈 곳을 채워준 것이다. 폭주하는 추이펑의 난폭한 침감을 잡아 속도를 맞추는 사(瀉)였다.
‘이럴 수가.’
추이펑의 어깨가 파르르 경련했다.
“어떻습니까?”
골똘하는 사이에 윤도가 환자를 체크했다.
“맛이 느껴집니다.”
과일 맛을 본 환자가 환하게 웃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제 생각에는 경추 5번 다음에 2번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환자가 나가자 쑨시앙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설명은 추 선생님이 해주시지요.”
윤도가 공을 넘겼다.
“......”
“추 선생님.”
쑨시앙이 추이펑을 재촉했다. 그제야 추이펑의 입이 열렸다.
“혈자리라는 게 수학공식처럼 딱 정해진 게 아닙니다. 변증논치(辨證論治)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에 따라, 병명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요. 때로는 같은 혈자리에 서너 개의 침을 꽂을 수도 있으니 그걸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추이펑의 설명은 멀리 돌아갔다.
“그렇다면 추 선생의 침을 보완한 침이었군요?”
우레이, 저도 모르게 정곡을 찔러버렸다. 추이펑의 얼굴은 멋대로 구겨져버렸다.
“설명을 좀?”
쑨시앙은 여전히 궁금한 게 많았다.
“추 선생님의 침은 훌륭했습니다. 기백 있고 거침없는 양(陽)의 진격이었죠. 그 힘이 강력하다 보니 경추 5번에서 2번의 효과까지 함께 도모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개의 혈자리가 하나로 줄어들어버린 거죠. 아마도 제 수고를 덜어준 것 같아 고마운 마음에 음(陰)의 은은함으로 양이 놓치고 가는 기혈을 함께 몰아준 겁니다.”
“아!”
쑨시앙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그래도 추이펑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약간의 휴식 후에 새로운 환자를 맞았다. 저체중 환자였다. 나이는 30대 후반의 여자. 성인이 된 이후에 42kg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20대 때는 그나마 젖살이 얼굴에 남아 봐줄만 했지만 40대가 가까우니 피골상접 타입으로 변해버렸다. 직업 또한 카운슬러를 하고 있어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더러는 필러도 넣고 성형도 받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필러가 흘러내려 심한 부작용을 겪은 적도 있었다.
오동통한 몸매.
남들은 치를 떨지만 그녀에게는 이상향이었다. 살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의 살을 받을 수만 있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받고 싶은 그녀였다.
살찌는 보약을 대놓고 먹고, 흑염소에 치맥에, 하루 여섯 끼를 먹는 분투까지. 그녀의 노력은 눈물겨웠지만 똥배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 마디로 대꼬챙이 몸매였다.
미리 양해를 구했으므로 세 중의에게 먼저 진맥을 맡겼다. 추이펑이 선두타자였고 쑨시앙이 다음이었다. 윤도는 마지막으로 환자의 맥을 잡았다.
정나현이 시침 준비를 하는 사이에 다시 의견을 나누었다.
“오른쪽 관맥에서 비장의 맥이 좋지 않았습니다. 살은 비장이 주관하는 것이니 비장을 치료하고 식단조절과 운동을 병행하면 좋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쑨시앙과 우레이의 견해는 같았다.
“관맥보다는 촌맥 쪽입니다. 그녀의 질환은 식역증입니다.”
추이펑의 견해는 달랐다. 식역증은 대장과 더불어 위장의 이상으로 나타나는 질환이다. 몸이 대쪽처럼 마른다. 그 말대로라면 한 가지 특징이 더 나와야했다.
“몸의 미열도 그 영향입니다. 이런 상황이기에 과식을 해도 양분을 흡수하지 못합니다.”
추이펑이 덧붙였다. 그 진단 또한 윤도와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중국...
과연 넓었다. 중의학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에 이렇게 좋은 재목들이 즐비한 것이다. 윤도가 정리에 들어갔다.
“세 분의 진단은 다 타당합니다. 살의 건강은 비장이 주관하니 무관하지 않고 이 환자에게 식역증의 증세가 있는 것도 맞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대장과 위장의 기혈을 고르게 해야겠지만 근본치료를 하자면 비장의 기혈도 북돋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혹시 약침 같은 건 사용하지 않습니까?”
우레이가 물었다.
“그게 궁금하세요?”
“예. 선생님 약침은 특별할 거 같아서...”
“제가 약침을 내드릴 테니 선생님이 한 번 시침해 보겠습니까?”
“정말입니까?”
“당연하죠.”
윤도가 약침을 내주었다. 우레이가 시침에 나섰다. 혈자리는 토론을 거친 치료혈을 고루 사용했다. 시작은 침의 부작용방지를 위한 곡지혈이었다. 다음으로 사관혈을 연 후에 위를 위해 중완혈, 대장을 위해 천추혈, 비장을 위해 장문혈 등을 찔렀다.
“......?”
시침이 끝난 후에 맥을 확인한 우레이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쑨시앙도 그랬다.
“약침으로 어떤 효과를 의도한 건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타이머가 돌아가는 동안 우레이가 물었다.
“우 선생님은 어떤 약침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야 비장과 위장, 대장의 기혈을 증강하여 기혈실조, 수화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과항진된 장기는 진정시키고, 저하된 장기는 회복시켜 오장육부의 균형을 회복하고 치유할 수 있게 하는 명약...”
“추 선생님 생각도 그렇습니까?”
“선생님 정도 되는 수준이면 당연히 그런 쪽이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만>
추이펑의 말꼬리는 깔끔하지 않았다.
“사실 이 약침은 곽향정기산의 응용 버전에 불과합니다.”
“......?”
윤도의 말에 세 중의가 뒤집어졌다. 곽향정기산이라면 기본 처방 탕약의 하나. 아무나 처방할 수 있는 탕약의 원료에 불과한 약침이라니?
“무슨 깊은 뜻이라도?”
우레이가 대표로 물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렇지요. 왜 그런지 맥을 다시 잡아보시겠습니까?”
윤도의 권유에 우레이가 나섰다. 몇 번의 진맥 끝에 그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관맥이 좋아진 거 같습니다.”
“뭐라고요?”
옆에 있던 추이펑이 나섰다. 그 역시 맥을 짚었다.
“......!”
추이펑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관맥 뿐만 아니라 촌맥의 상태도 현저하게 달라졌다. 두 맥이 고르게 뛰자 척맥도 덩달아 좋아졌다. 부조화를 이루던 맥이 봄날의 새싹처럼 싱그럽게 변한 것이다.
‘수승화강(水昇火降), 두한족열(頭寒足熱)...’
추이펑의 뇌리에 두 단어가 스쳐갔다. 물의 기운인 수기는 위로 올라가고 불의 기운인 화기는 아래로 내려온다는 의미의 수승화강. 한의학의 기본으로 불리는 이 상태는 몸의 순환이 좋은 상태를 의미한다.
인체의 위 쪽인 얼굴과 호흡기, 뇌는 과열되고 건조해지기 쉽다. 반대로 아래쪽의 손과 발의 말단부 등은 차가워지기 쉽다. 이 순환이 잘 되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바로 머리는 차고 발은 뜨겁게의 원리였다.
오직 결과...
중의들은 거기에 마음이 가 있었다. 하지만 윤도는 당장의 효과보다 과정을 택했다. 살을 빼는 게 아니라 찌우는 거였다. 마법의 침이라고 해도 시침과 함께 살이 찔 수는 없었다. 그건 건축과도 같아 차곡차곡 벽돌을 쌓아야하는 법. 과정이 더욱 요구되는 환자였다.
“우 선생님이 기를 잘 닦아주었으니 제가 마무리만 하겠습니다.”
윤도의 장침은 백회혈로 들어갔다. 거기서 수승화강을 조절하며 두한족열을 고정 시켰다. 침감을 조금 더 감으니 비장과 대장, 위장 경락에 닿았다. 우레이의 침은 세 경락의 사기를 많이도 밀어냈다. 하지만 비장 쪽에는 무리한 기색이 역력했다. ‘살’이라는 목표에 집착한 탓이었다. 그러나 상생도 지나치면 해가 된다. 비장의 기혈을 과잉되면 폐를 해칠 수 있었다. 활력 과잉이 된 비장을 위해 간장을 동원했다. 비장을 누르는 데는 간장만한 게 없었다.
오장육부와의 균형을 맞춘 후에야 침끝을 놓았다.
땡!
타이머가 울었다. 세 중의의 시선은 환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기분 어때요?”
윤도가 환자에게 물었다.
“몸이 굉장히 가벼워요. 기분도 상쾌하고...”
“우리 중의 선생님들이 진맥을 다시 봐도 될까요?”
“그럼요.”
환자의 수락이 떨어졌다.
‘윽!’
맥을 짚은 중의들은 표정이 참담하게 변했다. 베이징의 무적 독감 기세를 단숨에 잡아버린 채윤도. 그렇기에 매 처방마다 묘방이나 기방이 나올 줄 알았건만 기본 약침으로 병세를 잡은 것이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고 명의는 약재를 탓하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서서히 살이 붙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식습관처럼 마구 먹어대면 비만으로 갑니다. 우리 실장님이 체질에 맞는 식단을 추천해 줄 테니까 거기에 따르세요.”
윤도가 마무리를 했다. 환자는 여러 번의 인사를 남기고 침구실을 나갔다.
“오늘 연수는 여기까지입니다. 푹 쉬시고 내일 뵙기로 하죠.”
윤도가 파장을 선언했다. 우레이와 쑨시앙이 나갔지만 추이펑은 그러지 않았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뭐 질문이라도?”
윤도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내일 치료하실 환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병명 말인가요?”
“예.”
“오늘 환자와 반대되는 고도비만에 수전증, 턱관절탈구 환자 등이 예약되어 있습니다만...”
“죄송하지만 암 환자는 없습니까?”
“암 환자?”
“예정대로라면 내일이나 모레 쯤 연수가 끝나지 않습니까? 중의학중앙회 쪽에서 일을 엉성하게 추진하는 바람에 저희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만 연수내용은 선생님이 조절하실 수 있을 테니 조절을 해주시면...”
“암에 대한 침술을 보시고 싶다는 겁니까?”
“모든 의료인의 숙제 아닙니까? 더구나 국제적 명성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께 다녀가는 연수이니 주최 측에서도 기대가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보셨다시피 제 침술에 특별한 건 없습니다. 그저 환자 상태에 맞출 뿐이고, 어떤 면에서는 선생님이 더 우수하다고도 할 수 있지요.”
“선생님의 침술 비기가 드러날까 조심하는 건 아닙니까?”
추이펑이 돌직구를 날려 왔다. 그 말을 들은 윤도가 웃었다. 비기를 감춘 건 없었다. 그러니 직구는 스트라이크존을 크게 벗어난 셈이었다.
“연수내용이 부실하다는 겁니까?”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추이펑의 각은 여전히 무뎌지지 않았다.
“좋아요. 주최 측의 기대라는 건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추 선생님은 뭘 원하는 겁니까? 아예 거기다 맞춰드리죠.”윤도의 반격이었다. 빙빙 도느니 정면 승부를 택한 것이다.
“저 침.”
추이펑의 손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노 침을 가리켰다.
“인터넷 정보를 보니 선생님은 암 환부에 직접 침을 넣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
“이름하여 오장직자침?”
추이펑이 고개를 들었다. 작심한 질문인 듯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잠시 윤도의 반응을 본 추이펑, 거침없이 다음 말을 꺼내놓았다.
“가능하다면 그 시범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오장직자침.
그걸 보여줘.
도발적인 억양이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오랜 수련이 없이 행할 수 없는 침법입니다. 한두 번 본 것으로 시도하는 무리를 할까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거절!
윤도의 포지션이었다.
그러자 추이펑의 핵직구가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오장직자침을 배우려는 게 아니라 제 침법과 비교해보려는 것입니다만!”
‘비교?’
윤도가 파뜩 고개를 세웠다.
족가지마足家之馬-1
족가지마足家之馬-1
“추 선생님도 오장직자침을 구사할 줄 압니까?”
윤도가 물었다.
“제 침법의 이름은 환부직투법입니다만.”
추이펑이 선을 그었다. 그의 시선은 강철과 같았다. 오만과 과신이 버무려진 표정은 가히 자부심의 궁극에 선 것처럼 보였다.
“굉장하군요.”
“보여주시겠습니까?”
추이펑은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눈빛이었다.
“중의들 중에서 추이펑 말입니다.”
약제실 안에서 진경태가 입을 열었다. 종일이 퇴근한 약제실, 윤도가 바르는 탕약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왜요?”
“정 실장 말이 시건방져 보인다고...”
“중국 중의의 샛별들 아닙니까? 그만한 실력도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연수를 온 사람들입니다. 인성 문제입니다. 의술은 인술 아닙니까?”
“바르는 탕약은 어떻습니까?”
윤도가 화제를 돌렸다.
추이펑...
진경태의 말처럼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오만이나 자신감 때문이 아니었다. 윤도의 뇌리에서 끈적거리는 건 헤이싼시호였다. 그가 보았다는 검은 호수 안의 흰 빛. 윤도 안으로 들어온 그 흰빛일까?
‘내일 두고 보면...’
후끈해지는 마음을 달래놓았다.
환부직투법.
만약 그 침술이 오장직자침과 같다면 그 역시 신성의 기연을 맺었다고 볼 수 있었다. 신성의 빛이 오장직자침법을 주는 건 아니지만 그 신성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침이었다.
“연령대별로 체크해주신 남녀의 피부, 한약재의 분자 크기, 삼투의 농도 등을 100여 군으로 나눠 진행 중입니다. 대조로 연고가 겔, 젤 등을 참조 중인데 약효의 유지와 전달이 과제입니다.”
진경태가 끈끈한 탕약을 들어보였다.
“일거리 보태드려서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 이거 완성 되었을 때의 기쁨을 생각하니 하나도 힘 안 듭니다. 이 또한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진경태가 웃었다. 그의 마인드는 오늘도 지침이 없었다.
바로 그때 한의원을 나가는 추이펑이 보였다. 화단 쪽에서 두 마리의 고양이가 나온 것도 그때였다. 서로 엉겨 실랑이를 벌이던 고양이. 그 중 한 마디가 경련을 하며 늘어졌다. 그걸 바라보던 추이펑. 그대로 다가가 고양이를 집어들었다. 화단의 받침목 위에 고양이를 올려놓은 추이펑. 지니고 있던 장침을 꺼냈다. 등에 가려 침 놓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침을 마친 그가 약제실 창을 바라보았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윤도와 시선이 마주쳤다.
피식!
의미심장한 미소다. 그가 차량 쪽으로 돌아서자, 늘어졌던 고양이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가뜬하게 일어났다.
야옹!
도로로 나가는 차를 향해 고양이가 울었다. 감사의 인사처럼 들렸다.
윤도가 나왔다. 고양이를 불렀다. 턱을 쓰다듬으며 맥을 찾았다.
‘심장...’
그 쪽 맥이 힘차게 반응을 했다. 추이펑의 장침이 그쪽 혈맥을 뚫어줬다는 의미였다. 고양이를 내려주고 도로를 바라보았다. 윤도가 웃었다. 세상에는 고수가 많다. 그래서 좋았다. 그건 곧 윤도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원장님.”
퇴근 무렵 정나현이 출력물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