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1화 (241/265)

‘득지어심 응지어수?’

“우리 한의 침술의 큰 줄기이신 허임 선생님의 말이다. 침술이란 마음으로 먼저 체득하고 손이 응해야 한다 뜻. 즉 침이 아니라 마음을 놓아야 진짜 침술이 되는 법.”

“......”

“족가지마. 네게 주는 교훈이다. 당장 내 한의원에서 나가거라. 내 이 문제를 한국 언론을 통해 기사화하고 너희 주석에게 상세히 통보할 것이다.”

족가지마(足家之馬)!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사람을 이르는 사자성어. 추이펑의 뇌리에 제어불가의 충격파가 번져나갔다.

<주석께서 심한 꾸지람이 계셨네. 이건 우리 중의학의 체면문제야. 추 선생이 가서 중의의 파워를 보여주기 바라네. 주석께서 가지고 있는 한의에 대한 판단이 신기루라는 걸 보여주란 말일세. 우리 중의학이 한의 따위를 본보기로 삼을 수준이 아니라는 걸 말일세.>

추이펑의 머리 속에 중의 회장 말이 바글거렸다. 이게 주석에게 직통으로 건너가면 중국을 망신 시킨 죄로 장래가 막힐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봐요, 우리 추 선생이 당신을 도우려한 일을 가지고 침소봉대하는 거 아니오?”

눈치를 보던 중국 기자가 항의하고 나섰다.

퍽!

소리와 함께 기자가 무너졌다. 이번에는 쪼인트였다.

“이 공범. 다 알고 있으니 조용히 닥치고 있어.”

“뭐요?”

기자가 눈을 부라리자 진경태가 카메라를 디밀었다. 기자의 취재 카메라였다. 화면을 본 기자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추이펑의 시침 장면이었다. 추이펑이 환자를 시침할 때 기자가 촬영을 했다. 사전공모의 증거였다.

“잘못했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추이펑이 무릎을 꿇었다. 우레이와 쑨시앙도 꿇었다. 머뭇거리던 기자도 함께 꿇었다. 우레이와 쑨시앙 역시 한 패였다. 그들은 겸손한 척 하면서 바람을 잡아주는 역할이었다. 연수단이 문제가 된다면 그들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진심인가?”

윤도가 추상처럼 물었다.

“예. 선생님.”

추이펑이 고개를 숙였다.

“진심일리 없잖아? 당신들이 잘못은 저기 환자분에게 저지른 것이니.”윤도가 환자를 가리켰다. 감을 잡은 중의들이 환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손해배상으로 오늘 환자의 치료비는 물론 향후의 오장 안정과 뼈의 강화로 행기활혈을 도울 시침비와 탕약비용까지 모두 당신들이 갹출해서 지불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허락 없이 치료에 끼어든 행위를 용서해줄까요?”

윤도가 환자에게 물었다.

“저야 어떻든 원장님 덕분에 몸이 좋아졌으니 원장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환자가 윤도에게 전권을 넘겼다.

“좋습니다. 시침 행위는 그렇게 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윤도가 선언하자 추이펑의 인상이 펴졌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는 오직 흉선암에 대한 시침행위만이요. 다른 행위들, 즉 당신들이 애당초 품고 온 불손하고 치졸한 연수목적에 대해서는 용서 못합니다. 주석님에게 있던 대로 전할 것이니 그리 알고 물러가세요.”

“......!”

“정 실장님, 이 분들 몰아내세요. 볼수록 불쾌합니다.”

윤도는 여전히 단호했다.

“아이고, 채 선생님.”

“죄송합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중의들이 기겁을 하고 매달렸다. 그들은 윤도와 주석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윤도가 제보한다면 그들의 미래는 암흑으로 바뀔 판이었다.

“제발...”

추이펑이 고개를 숙였다. 코가 바닥에 닿고 있었다.

“진심입니까?”

“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평생 선생님의 말씀을 뼈에 새기며 살겠습니다.”

“......”

“선생님.”

“사실 처음 당신을 봤을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헤이싼시호의 이야기를 할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거기서 당신이 침술의 눈을 뜬 것 같아서 말이죠. 하지만 침술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입니다. 인류는 사실 생명의 진실이 산소라고 생각하고 살았다죠. 하지만 이제는 산소가 아니라 탄소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산소가 생명의 끈인 건 명백하지만 눈으로 보는 관점일 뿐이죠. 한의나 중의 모두 음양과 기혈의 조화를 중시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과시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봐야합니다.”

“선생님...”

“보이지 않는 것. 환자들의 간절함. 가느다란 장침 하나가 생성하고 소멸시킬 기의 세계. 그걸 생각하며 숭고해져야지요. 무작정 병소를 쳐서 과시하려는 마음이 웬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당신들, 진심으로 공감한다면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당신들에게는 어쩌면 내 한의원보다 합당한 연수처가 있는 거 같습니다.”

“......”

“원래 내일까지 연수일정이었죠?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세요. 밤을 새워서 봉사를 하고 그게 진심이라는 게 그 곳 사람들에게 전해지면 여기서의 실수는 다 지워버리도록 하겠습니다.”

“거기가?”

“요양병원입니다. 제가 연락해둘 테니 네 분 다 가도록 하세요.”

윤도의 엄명이 떨어졌다.

“아이고, 꼬셔라. 속이 다 시원하네.”

요양병원에서 온 차가 중의들을 싣고 자가 진경태가 활개를 쳤다.

“수고하셨어요.”

윤도가 치사를 했다.

“수고라뇨? 그런 놈들에게는 원장님 주먹도 아깝죠. 혹시라도 폭행이니 뭐니 하면서 불손하게 찍자 붙으면 괜한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고.”

“그래도 나도 한 대 날렸어야 속이 시원한 건데.”

윤도가 입맛을 다셨다.

“종일 씨도 고마워.”

옆에 있던 종일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제가 뭐 한 게 있다고요?”

“왜 없어? 몰카.”

윤도가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추이펑과 기자의 추악한 속셈을 알아낸 건 핸드폰 동영상 때문이었다. 언젠가 일본 환자들에게 멋지게 써먹었던 종일의 몰래 카메라. 그걸 또 한 번 응용한 윤도였다. 침구실 안 쪽에 핸드폰 동영상을 켜놓은 채 나왔던 것. 추이펑의 표정에서 뭔가 낌새를 차린 윤도의 기지였다.

하지만 진짜 그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만약 오해라면 나중에 사과하려던 일. 그러나 현실이 되며 멋진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그날 밤, 세 명의 중의는 요양병원에서 밤샘 침술봉사에 임했다. 기자는 세 중의의 시중을 들었다. 꾀를 부리거나 농땡이를 칠 수도 없었다. 한국 기자 때문이었다. 윤도는 그들의 침술봉사를 성시혁 기자에게 제보했다.

<베이징 독감퇴치에 대한 중의들의 보은 침술봉사>

제보 주제부터 어마무시했으니 중의들은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고 이 방 저 방 뛰었다.

족가지마足家之馬-3

족가지마足家之馬-3

다음 날, 일찌감치 한의협회 회장이 달려왔다.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십니까?”

윤도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무슨 일이라니? 연수 온 중의들 어디 갔나?”

“봉사활동 중으로 압니다만.”

“어이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실은 어제 늦은 밤에 중의 회장이 전화를 걸어왔지 뭔가? 워낙 늦은 밤이라 받기만 하고 채 선생에게 확인은 못했네만.”

“문제가 있습니까?”

“다짜고짜 애걸복걸 사정을 하더라고. 불미스러운 일을 사과하니 문제 삼지 말아달라고.”

“그랬군요.”

윤도가 웃었다. 중의들이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중의 회장도 똥줄이 타고 남을 일이었다.

“뭔가? 그 친구들이 사고를 쳤나?”

“그렇습니다.”

윤도 눈에 힘이 들어갔다.

“......!”

“그 친구들 순수한 마음의 연수가 아니라 불손한 목적을 가지고 왔더군요. 혹시 회장님도 아셨습니까?”

“불손하다니?”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모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연수를 빌미로 중의의 위세를 떨치고 싶었던 거죠. 그 공명심으로 제가 치료하던 희귀암 환자에 멋대로 끼어들었다가 큰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저, 저런.”

“황급히 수습을 했지만 자칫하면 대형 의료사고가 날 뻔 했지요. 그래서 인성교육차 침술봉사를 보냈습니다. 그 성과를 보고서야 대처를 결정할까합니다.”

“허어, 그런 기막힌 일이.”

“회장님께 다른 말은 없던가요?”

“없었네. 그저 송구하게 되었다고. 중의들이 아직 어려서 치기로 그런 모양이니 용서를 구한다고만...”

“그 회장이 시발점입니다. 믿지 마시고 강력하게 항의해 주십시오. 이건 한의나 중의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는 일침과 함께.”

“알겠네. 내 이것들을 그냥.”

빠라빠라방.

그때 윤도 핸드폰이 울렸다. 요양병원 원장이었다.

“채 선생님.”

“안녕하세요? 중의들은 어땠나요? 성심껏 하던가요?”

“아이고, 아주 죽기살기로 하더군요. 세 중의가 잠도 안 자고 시침을 했습니다. 덕분에 고질병 어르신들 20여 분이 몸이 좋아졌고, 초기 암 환자 두 분도 병세가 완연히 좋아졌습니다. 지금 확인 MRI 촬영하고 판독 중인데 어르신들 말로는 암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라고 그러더군요.”

“그 침은 누가 놓았나요?”

“추이펑이라고...”

‘추이펑.’

윤도가 호흡을 골랐다. 공명심에 가렸지만 그의 침술은 인정할만했다. 문제는 결과만을 고려하는 난폭한 기혈의 주입. 그것만 다스리면 그도 침술에 일가를 이룰 사람이었다.

“아, 지금 판독결과가 올라왔네요. 어이쿠, 이런.”

원장의 목소리가 흥분에 휩싸였다.

“좋아졌나요?”

윤도가 물었다.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월초에 촬영한 것에 비하면 암 크기가 절반 이상 줄어들었습니다.”

“중국 침술 명의 중의 한 사람입니다. 성심껏 시침한 모양이네요.”

“아이고, 원장님. 이렇게 좋은 분들을 보내줘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 사람들 병원 식당 밥이나 따뜻하게 먹이셔서 돌려보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곱빼기로 퍼드리겠습니다.”

원장의 전화가 끊겼다.

“무슨 전화인가? 나쁜 내용 같지는 않은데?”

회장이 물었다.

“봉사활동은 진정성 있게 했다는군요. 반성하는 것 같으니 회장님이 중의 회장에게 강력한 항의표명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알겠네. 내가 따끔하게 일침을 놓겠네. 넘볼 걸 넘봐야지 감히 우리 채 선생을 말이야.”

회장은 기염을 토하고 돌아갔다.

오후가 되자 중의 일행이 돌아왔다. 다들 파김치가 된 표정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처분은 여전히 윤도 손에 달린 일. 추이펑과 중의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윤도 목소리가 추이펑을 겨누었다.

“드릴 말이 없습니다.”

추이펑의 고개가 떨어졌다.

“사실 여기보다 거기가 더 보람 있었죠?”

“......”

“하지만 다른 곳을 한 번 더 가셔야겠습니다.”

“......!”

“싫습니까?”

“아, 아닙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추이펑, 의외로 순순하게 응했다.

“두 분은요?”

윤도의 시선이 우레이와 쑨시앙에게 건너갔다.

“저희도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 장소는 중국입니다. 여러분들의 가까운 요양원이나 불우이웃들에게 하십시오. 제 옵션은 그것으로 클리어입니다.”

“예?”

“여러분의 마음가짐을 본 겁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했으니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선생님.”

“저도 그런 유혹 받은 적 있습니다. 최고로 보이는 것, 과시하고 싶은 것. 하지만 침술은 기술이 아니라 의술 아닙니까? 게다가 여러분은 제 적이 아니라 동료들입니다. 한의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 그렇습니까?”

“채 선생님.”

추이펑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변했다. 윤도의 진심 앞에 자만과 오만으로 가득하던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그럼 이제 마무리를 할까요?”

“마무리라면?”

“손 씻고 가운 입으시고 2번 침구실로 오세요. 추 선생님은 알지도 모르지만 4대 기혈 잡는 법과 오장직자침법을 선보이겠습니다. 마침 환자분 한 분이 기묘한 혈자리를 가진 데다 참관과 시침도 허락해주셨습니다.”

“우와!”

추이펑이 환호했다. 공명의 각이 풀리니 그 얼굴에도 순수함이 엿보였다. 타고 난 악인은 없다. 그걸 실감하는 윤도였다.

은혈(隱穴), 부혈(浮穴), 가혈(假穴).

3대 묘혈을 가진 환자는 설암을 앓고 있었다. 초기에는 혀가 부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 숨 쉬기조차 버거웠으니 목설(木舌)로 보였다. 이는 심장과 비장에 열이 축절될 때 생긴다. 하지만 비장의 생기로 보아 심장의 이상이었다. 초기에 제대로 된 진단을 못 받는 통에 골든 타임을 놓쳐버렸다.

붓기가 염증으로 변하면서 암이 되었다. 50대 초반의 환자는 가난했다. 근면하고 참을성도 많았다. 작은 병원에서 구내염치료를 받거나 약국 진통제로 버텼다. 몸이 예전만 못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설암 4기.

다행히 전이는 되지 않았다는 병원 쪽 소견이었다. 그러나 암 발생부위가 산발적이라 수술은 불가. 전체를 절제하면 암은 잡을 수도 있겠지만 혀를 베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환자는 S병원의 소개로 윤도를 찾아왔다. 양방 차원에서 손을 쓸 수 없게 되자 지정의가 직접 부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비전이는 ‘그때까지’의 상태일 뿐이었다. 윤도의 진단에는 전이가 있었다. 식도 쪽으로 뻗어가는 림프선과 위 유문관 근처의 유문괄약근 쪽이었다. 최근 들어 더 악화된 것이다.

“윽!”

“.....?”

혈자리를 짚어본 중의들이 세 번 자지러졌다. 은혈이 나왔다. 자객처럼 숨바꼭질을 하는 혈자리다. 부혈도 있었다. 원래의 자리에서 살짝 들떠 있다. 웬만한 침술이라면 헛발질이나 하다 말 혈자리. 더불어 가혈까지 있었다. 세 중의 중에 세 묘혈을 다 잡아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추이펑만이 은혈 몇 개를 감지했을 뿐이었다.

“이게 부혈입니다.”

윤도가 하나하나 확인에 나섰다.

“아!”

부혈을 체험한 우레이가 감탄을 토했다.

“이게 가혈. 처음 살갑게 느껴지는 기운을 무시하고 집중하시면 그 다음에 오는 반응을 주목하세요.”

“오오.”

쑨시앙도 혀를 내둘렀다. 추이펑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감을 잡을 때까지 다섯 번이고 열 번이고 반복했다.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설암의 말기에 이르면서 온갖 부작용과 통증이 따르는 환자. 기본 사관혈과 아시혈 몇 자리의 시침을 중의들에게 맡겼다. 우레이는 사관혈을 잡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이 되었다. 그 중 두 개가 부혈이었던 것이다.

쑨시앙 역시 아시혈 세 개로 파김치가 되었다. 하나는 가혈이었고 또 하나는 은혈이었다. 은혈은 결국 잡아내지 못해 윤도가 지도해주었다.

혀를 주관하는 심장을 위한 시침은 추이펑에게 맡겼다. 신장을 북돋아 간의 파워를 늘리고, 그 파워로 심장의 기혈을 강화하는 코스였다. 추이펑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장침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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