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
소리와 함께 젊은 해경의 가슴이 거칠게 튕겨 올랐다가 내려갔다. 그래도 심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펑펑!
소리만 속절없다.
“하아!”
의료진들이 한숨을 쉬었다. 틀렸다는 사인이었다.
“잠깐만요.”
윤도가 나섰다. 거두절미하고 발목 안쪽의 태계혈을 체크했다. 목숨은 선천의 정을 간직한 신장이 좌우하는 것. 태계혈의 반응이 끊기면 끝장인 것이다.
“수한아, 수한아!”
의료진들 뒤에서 해경의 가족이 몸부림을 쳤다. 피로 얼룩진 군복을 보니 이경이었다. 어쩌면 첫 임무였는지도 모른다. 나이 또한 갓 스물을 넘은 해경. 가족의 원통함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일이었다.
‘제발...’
윤도는 갈구했다. 낮까지도 웃고 떠들었을 이 목숨. 신성한 조국의 바다를 사수하기 위해 출동한 임무. 그 숭고한 마음처럼 제발, 단 한 올의 맥이라도 뛰어주기를.
“수한아!”
가족들 중에서 할머니가 제일 먼저 무너졌다.
“아유, 어머니.”
그 위로 어머니가 포개졌다. 이런 날벼락이 있을까? 해역을 침범한 도적떼를 쫓다가 당한 불의의 참사. 30여 척 선단을 믿고 도발한 중국어선들. 벌금이 두려워 자행한 짓 치고는 그 대가가 너무 컸다.
해경의 태계혈은 끝내 반응하지 않았다.
침을 뽑아들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신주와 신수혈, 명문혈에 장침을 찔렀다. 신장을 자극해 맥을 살려보려는 의도였다. 그게 통했다.
‘웃!’
윤도의 머리카락이 삐쭉 일어섰다. 태계혈에 반응이 온 것이다.
‘오케이!’
서둘러 침통을 열었다. 사관을 시작으로 혈문을 활짝 열었다. 곡지, 족삼리, 합곡혈에 이어 응급조치의 마무리로 백회혈을 찔렀다.
꿈틀!
침감을 넣자 해경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움직입니다!”
수련의가 소리쳤다. 미친 듯이 침을 감았던 윤도, 해경 안에 들어온 죽음의 사기를 단숨에 밀어내려는 듯 전광석화처럼 침을 풀었다.
울컥!
해경 입에서 액체가 넘어왔다. 그와 동시에 꺼졌던 심장의 박동이 돌아왔다.
“살렸습니다. 채 선생님이 살렸어요.”
수련의의 외침은 희망으로 퍼져나갔다. 해경의 조모와 어머니는 저만치에서 윤도에게 허리를 조아려 고마움을 표했다. 그때 손석구가 들어섰다. 그의 가운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채 선생님.”
“손 선생님.”
두 사람이 참화의 가운데서 만났다. 한방 최고 명의 채윤도, 양방 중증외상의 최고 권위자 손석구. 포화의 야전병원을 방불케 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두 콤비가 손을 잡았다.
아비규환 속의 두 명의-2
아비규환 속의 두 명의-2
사망자 8명(해경 3명, 중국 어민 5명)
중상자 17명(해경 5명, 중국 어민 12명
경상자 5명(해경 2명, 중국 어민 3명)
방송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화면에서 확인되다시피 중국 어선들의 명백한 불법도발입니다. 이들은 높은 파도를 틈타 선단을 이룬 채 불법 조업에 나섰습니다. 이들을 처음 발견한 해경 함정이 출동합니다.”
참사의 바다에서 사건을 보도하는 기자의 표정은 비장했다.
“우리 해경은 중국 선단에 1차 퇴거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중국 선단은 대형 어선을 중심으로 오히려 위협을 가합니다. 배 위의 선원들은 흉기를 과시하고 개량 새총으로 쇠 탄환을 쏘며 무력시위를 하는 모습이 화면에 보입니다.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해경이 스펀지탄과 공포탄을 쏘며 선두의 어선에 접근하자 대형 어선이 해경선박을 양쪽에서 들이박는 만행을 서슴지 않습니다.”
기자가 바다를 가리켰다. 해경과 해군이 야광탄으로 바다를 밝힌 채 남은 실종자 수색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화면 뒤로 영상이 나왔다. 개량 새총이 날아들며 해경이 쓰러진다. 참다못한 해경이 실탄 사격을 퍼붓는 그림이었다.
“선미를 받친 해경에서 불길이 치솟습니다. 순식간의 일이라 손을 쓰지 못하고 당하고 맙니다. 5분 후에 인근의 우리 해군함정과 해경이 출동합니다. 중국 선단은 그제야 그물을 버리고 도주합니다. 그러나 일부 어선이 그물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파도에 쓸리며 자국 어선끼리 충돌하는 아비규환이 벌어집니다. 이들 어선에도 불이 붙으며 희생자가 늘었습니다.”
다시 화면이 나왔다. 바다 위의 화재는 속절없어 보였다.
“한편 우리 정부의 강력한 항의에 대해 중국 국가해양국 측은 진상 파악 중이라며 정면대응을 피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사고 해역에서 TBS 황의만입니다.”
무려 3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 국민 여론은 들끓고 정부는 상기되어 있었다.
다음 화면은 청송병원의 중증외상센터였다. 윤도가 보였다. 손석기도 보였다.
“여기는 사고대책본부가 차려진 청송병원 중증외상센터입니다. 중증외상 분야의 최고 전문가 손석구 교수와 신의로 불리는 채윤도 한의사가 응급환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채윤도 한의사는 벌써 심장이 멎은 해경 한 명을 살려내고 손석구 교수와 콤비를 이루어 응급환자들의 회복에 총력을...”
화면 속에서 의료진들이 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실려 온 화상 환자였다.
30여 명의 사상자.
당장 파악된 사망자만 해도 해경 셋에 중국 어민 다섯 명. 거기에 중증 화상과 총상환자가 무려 11명. 사망자가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증 화상환자부터 손을 대야 할 것 같습니다.”
손석구가 방향을 제시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윤도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생각이 있습니까?”
“선생님은 우선 절박한 환자를 구하고 계십시오. 저는 사망자를 체크해 보겠습니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거기부터 구해내야죠.”
“사망자들을요?”
“죄송하지만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경우 하루가 지나지 않았으면 살릴 수도 있습니다. 어디든 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환자 역시 기사회생혈로 되돌릴 수도 있고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양방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손석구가 동의했다. 윤도는 사망자 쪽으로 뛰었다. 일부는 벌써 냉동실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도 모두 꺼내도록 지시했다. 중증외상센터의 의료진과 각과의 지원의사들, 간호사들은 토를 달지 않았다. 청와대와 대책본부에서 채윤도와 손석구의 요청에 절대 협력하라는 특명이 떨어진 까닭이었다. 사망자를 확인하던 중국 대사관 직원도 그랬다. 그 역시 윤도의 존재를 알고는 적극 협력으로 나왔다.
덜컹!
철컹!
냉동실이 열리며 갓 들어갔던 시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윤도 앞에 도열한 시신은 모두 여덟 구였다.
“원장님!”
심호흡을 하는 순간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정나현과 승주였다. 둘 다 간호복 차림이었다. 급보를 듣고 윤도의 소재를 알게 된 그들이 진경태의 인솔로 출동한 것이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태계혈과 태충혈을 잡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세요. 인중혈과 용천혈, 백회혈도 확보하세요. 어서요!”
윤도가 소리쳤다. 목이 메일 정도로 반가운 얼굴들이지만 감정표시할 여유도 없었다.
태계혈.
또 다시 태계혈과의 싸움이었다. 그 맥이 뛰는 사람은 살 것이오, 뛰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구제법도 있었다. 윤도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망자의 맥을 잡기 시작했다.
여덟 명.
첫 진맥에서 하나를 건지는 개가를 올렸다. 그의 인중혈과 용천혈, 백회혈에 기사회생 장침을 찔렀다. 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남은 일곱 명 모두에게도 기사회생의 장침이 시침되었다. 다시 한 명의 목숨이 돌아왔다. 그때마다 지원하던 간호사와 수련의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남은 건 여섯. 그때 대책본부의 부본부장이 윤도에게 다가섰다.
“......?”
귀엣말을 들은 윤도가 소스라쳤다. 사망자 명단으로 나간 중국 선장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중국 국가해양국 수장의 친인척인 모양이었다.
<살리기만 하면 서해 불법어업을 뿌리 뽑을 옵션이 될 수 있습니다.>
부본부장의 귀엣말이었다.
“나가계시죠.”
윤도가 출구를 가리켰다. 목숨은 다 같은 것, 더구나 선장은 불법어업을 주도하며 참극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었다. 목숨 앞에 차례가 있을 수 없지만 이미 꺼진 목숨들. 가능하자면 해경부터 챙기고 싶은 게 윤도의 마음이었다. 여섯 시신을 놓고 하나씩 침감을 더하기 시작했다. 인중혈부터 땀이 흘러내렸다. 용천혈을 지나 백회혈에 이르자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원장님.”
윤도를 아는 승주는 목이 메었다.
“진정해. 원장님 방해하면 안 돼.”
정나현이 승주를 달랬다.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 그건 윤도를 방해하지 않고 보조하는 것. 정나현은 그 본분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꿈틀!
신침은 달랐다. 죽은 해경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원장님!”
승주가 소리쳤다. 윤도는 여세를 몰고 갔다. 백회혈에서 임맥을 깨워 독맥과의 길을 이어놓았다. 그 기세가 신장에 닿고 심장에 닿았다. 해경은 세 번째로 기사회생을 했다. 하지만 하나 남은 해경은 도리가 없었다. 태계혈의 불이 꺼진 걸 알면서도, 기사회생혈에도 감이 오지 않는 걸 알면서도 처절한 사투를 멈추지 않았다.
“원장님.”
승주가 차마 고개를 돌렸다.
“포기는 아니야.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해보자고. 환자도 힘이 들 테니까.”
윤도가 중국 어선들에게로 옮겨갔다. 숨을 쉬지 않는 해경이지만 윤도에게는 아직 환자였다. 그저 잠시 미뤄둘 뿐이었다.
남은 사망자들은 익사자와 심장마비자였다. 익사자들을 한 쪽으로 모았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물에 빠져 죽은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면 되살릴 수 있었다. 하나하나 입을 벌렸다. 익사자들은 보통 입을 다물고 죽는다. 이 입은 여간해서 열리지 않는다. 입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열었다. 각각의 익사자 배꼽 가까운 혈자리에 화끈한 화침을 넣었다. 동의보감의 처방으로는 입에 젓가락을 물리고 배꼽에 200-300여 장의 뜸을 뜨는 것. 다행히 윤도의 신침은 한 방으로 그 뜸을 가늠할 만 했다. 동의보감 식으로 하자면 양 쪽 귀에 대롱을 대고 숨도 불어넣어야한다. 이 기척은 화침으로 대신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침감을 더할 때였다. 익사자의 입으로 울컥 구토가 나오더니 침 끝에도 느낌 하나가 전해왔다.
‘살았다.’
윤도 척추에 짜릿함이 스쳐갔다. 오감에 따라 환자가 응답을 했다. 입으로 가는 숨결이 새어나온 것이다.
“또 한 사람 살았어요.”
승주가 소리쳤다.
숨결이 터진 환자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침대에는 4명이 남았다. 여러 방법을 다 동원해도 돌아오지 않는 생명들이었다. 해경 하나에 중국 어민 셋.
“원장님.”
정나현이 물을 건네주었다. 한 모금을 마시고 나머지는 수건에 부었다. 그걸로 얼굴을 닦았다. 너무 팽팽해 끊어질 것 같던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손 교수님은요?”
“쉴 틈 없이 치료 중이세요. 화상 환자들은 응급처치만 하시고 총상환자를 돌보셨어요. 나머지 환자의 본격 치료는 선생님과 함께 하실 모양이에요.”“알았어요.”
윤도가 다시 전의를 가다듬었다. 남은 네 명. 한 번 더 체크할 생각이었다.
“선생님.”
의료진 너머에서 중국 대사관 간부가 말을 붙여왔다. 표정은 여전히 간절하다. 그 역시 국가해양국 수장의 친척 때문이었다.
“한 번 더 살펴볼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간부를 지나쳤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고 처음부터,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조금 전 최선을 다해 체크했다는 생각은 버렸다. 이 환자들은 처음 보는 것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모든 의술을 다해야했다.
사관을 열고 기사회생혈을 찔렀다. 신장과 심장의 요혈도 다시 시침했다. 해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딱 한 사람 남은 해경. 저 먼 어둠에서 돌아와 주면 좋으려만 윤도의 침은 검은 바다에 꽂힌 침 하나처럼 속절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별 수 없이 마음 속으로 거수경례를 올렸다. 처음으로 내리는 사망진단이었다. 그 다음의 중국 어민도 그랬다. 그 옆까지 보내고 나니 국가해양국 수장의 친척만이 남았다.
사망원인은 익사.
“후우!”
먼 발치의 대책위 부본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국 국가해양국은 이때 이미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해왔었다. 중국 쪽 희생이 크지만 빼도 박도 못할 도발 영상 때문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당부가 붙어왔다. 이 친척을 어떻게든 살려달라는 주문이었다.
윤도는 개의치 않았다. 선장 앞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건 그가 마지막이기 때문이지 신분이나 지위 때문이 아니었다. 마지막 남은 한 명, 이 한 명의 운명만은 바꿔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도 없었다. 또 다른 중증 환자들이 줄을 서있지 않은가?
‘만약 단 하나의 침만 꽂아야한다면...’
윤도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선장의 인중에 시선이 꽂혔다. 평평하고 얇아 보였다.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급속한 기혈의 실기(失氣)가 오면서 변했다. 누구든 기혈이 손상되면 얕고 평평해지는 게 인중이었다.
인중.
구급혈이다. 그렇기에 이미 찔렀던 윤도였다.
<인중+용천+백회혈의 3종 세트>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황천역 앞에 내렸던 사망자들을 일부 소환해 올 수 있었다. 인중이 기사회생혈로 꼽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인중(人中).
사람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중혈은 사람의 몸 한가운데 있지 않다. 그런데 왜 여기를 사람의 중심, 곧 인중이라고 했을까?
황제내경 소문편에 답이 나온다.
천식인이오기 천기통우비 지식인이오미 지기통우구(天食人以五氣 天氣通于鼻 地食人以五味 地氣通于口)가 그것이다.
하늘은 다섯 가지 기운, 곧 오기(五氣)로 사람을 먹여 주니 하늘의 기운은 코와 통한다. 땅은 다섯 가지 맛 곧 오미(五味)로 먹여 주니 땅의 기는 입과 통한다라는 뜻이다. 사람이 하늘의 기운과 통하는 방법은 숨을 쉬는 것이다. 그래서 코는 천기(天氣)와 통한다고 한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모든 음식물은 모두 입으로 들어온다. 그리하여 땅의 기운은 입과 통한다고 했던 것이다.
코는 천기의 출입구이고 입은 지기가 드나드는 한 가운데 있다. 그래서 그 사이를 인중이라고 부른다.
천기와 지기가 드나드는 길목답게 혈자리도 비범치 않다. 인중은 독맥과 임맥이 만나는 도랑이다. 이 인중의 출발이 회음혈이다. 독맥과 임맥은 회음혈에서 시작된다. 충맥도 관계한다. 이들 세 경맥은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경맥들이다.
나아가 천지인을 상징한다. 인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경맥인 것이다. 인중은 입인(立人)으로도 불린다. 사람이 존재, 생존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기사회생혈로써 땅과 하늘의 기를 통하게 하여 목숨을 돌려놓는 것이다.
인중이 윤도 손을 당겼다.
그 기원이 되는 회음혈 때문이었다.
회음혈.
어쩌면 윤도에게는 등용문 혈이기도 했다. 부용이 그랬다. 갈매도의 그 별장. 난생 처음 찔러 본 회음혈이었다. 그러나 멋지게 성공했다. 부용의 난치, 불치병을 고침으로써 명의 반열에의 승선이 허락되었다.
‘설레고 떨리던 그 날처럼.’
차분하게 장침을 꽂았다. 시작은 다시 인중혈이었다. 그러나 다음 침이 유별났다. 장침이 아니라 세침을 집어든 것이다. 세침은 회음혈로 들어갔다. 인중에는 장침, 넓적다리 쪽의 우람한 사타구니에는 가늘디 가는 세침. 어쩌면 침이 바뀌어 들어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그건 윤도의 승부수였다. 회음혈. 어쩌면 똑바로 바라보기 민망한 부위. 그러나 그곳 또한 생사의 문이었다. 인체의 불씨를 살리는 아궁이로 불리는 혈자리였다. 환자 생명의 아궁이는 이미 싸늘하게 식었다. 불씨의 흔적도 없다. 거기에 다시 불을 지펴야했다. 불이 급하다고 아궁이가 터질 정도로 장작을 밀어넣으면 불은 붙지 않는다. 연기만 요란할 뿐이다. 아궁이의 불은 부드럽게 시작해야했다. 작은 검불이나 불쏘시개처럼 작게, 작게...
그래서 세침이었다.
세침이 두 개 더 들어갔다. 윤도의 손은 마치 부싯돌을 치듯 정성껏 침감을 넣었다. 식은 아궁이를 살려 인중으로, 그 화력으로 천지인의 혈맥을. 그리하여 임맥, 독맥, 충맥, 대맥이 깨어나는 완전한 기의 순환으로.
이 순간, 윤도는 침이었다. 세침과 하나가 되어 오직 환자를 겨누었다.
불아.
생명의 불아.
붙어다오.
누구든 그 목숨은 귀한 것이니.
내 침의 염원을 네가 들어
한 번만.
단 한 번만.
세침의 끝은 불덩이가 되었다. 익사로 차갑게 식어버린 기혈을 깨우는 것이다.
치익!
윤도 손에 화기가 올라왔다. 화침의 극한이었다. 하지만 선장의 회음혈은 반응하지 않았다. 혈자리가 녹아나도록 뜨거워도 묵묵무답인 것이다.
‘그는 신의 영역에 들어갔다.’
윤도 등골에 경건함이 맺혔다. 별 수 없이 침끝을 놓았다. 더 이상의 시도는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실장님, 발침 좀 부탁해요.”
맥 풀린 윤도가 흔들 물러섰다. 이제는 마음을 가다듬고 중증환자들을 돌볼 차례였다. 신이라고 해도 지상의 모든 환자를 살릴 수는 없는 까닭이었다. 윤도 자리로 정나현이 다가섰다.
“......!”
회음혈에 꽂힌 세침에 손을 대기 무섭게 움찔 물러섰다. 침이 뜨거워서가 아니었다. 침이, 세침이 떨고 있었다.
“원장님.”
정나현이 돌아보았다. 그 침을 바라보던 윤도 눈에 폭풍경련이 일었다. 반응이었다. 회음혈의 맹렬한 반응이었다.
“와아아!”
주변 사람들에게서 환호가 터졌다. 마침내 반응하는 선장이었다. 다시 세침을 잡은 윤도, 경맥의 입질을 확인하고 장침을 넣었다. 불씨를 살렸으니 장작을 얹는 것이다. 불길을 키우는 것이다. 생명의 문으로 불리는 명문혈에도 장침을 넣었다. 신수는 차갑지만 명문은 뜨겁다. 아궁이의 불길에 힘이 될 수 있었다.
꺼진 경맥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중의 변화가 증거였다. 푹 꺼져내리고 평평하게 늘어졌던 그곳에 탄력이 돌아왔다. 그리고, 인체 각 부의 경맥으로 기혈을 퍼나르기 시작했다.
임맥-ON.
독맥-ON
충맥-ON.
대맥-ON.
생기의 도미노가 윤도 눈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