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1화 (251/265)

맥이 뛰기 시작했다.

혈관이 흐르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가는 숨소리도 살아났다.

생명, 이보다 오묘한 존재가 있을까?

<손석구-심정지-사망>

<중국 측의 확인-심정지-사망>

<윤도의 회생 시도 실패-사망>

무려 세 번의 사망 확인을 거친 선장의 부활. 이 개가로 중증외상센터에는 희망이 불이 붙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판에 목숨이 붙은 환자들이야.

의료진들은 이제 사기충천이었다.

아비규환 속의 두 명의-3

아비규환 속의 두 명의-3

“채 선생님.”

얼마나 지났을까?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북에서 내려온 노윤병이었다.

“방송 보고 바로 기차 타고 왔습니다.”

노윤병이 나노침을 꺼내놓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돕고는 싶은데 아직 남한 면허가 없으니 침만 좀 가져왔습니다. 미국 지인에게 특별히 부탁한 개량침인데 쓰실만 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면허가 없어도 보조는 가능하겠죠?”

“당연하죠. 혈자리 잡는 것 좀 도와주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선생님 옆이라면 뒷간 청소를 시켜주셔도 좋습니다.”

“가시죠. 응급환자가 밀렸습니다.”

윤도가 앞섰다.

“늦었습니다.”

윤도가 손석구 옆으로 다가섰다. 손석구의 가운은 아예 핏빛이었다. 침대에는 중국 어선의 충격으로 복부가 터지고 대퇴부가 날아간 해경이 있었다. 슈처세트를 오가는 손석구의 손은 보이지도 않았다. 슈처세트는 봉합도구. 그의 메스 스킬과 봉합 솜씨는 윤도의 장침에 못지않았다.

“Chest fracture로 Aortic dissection도 발생했어. 로딩 올리고 Hemoperitoneum 제거해. Atropine 투여량 2배로 올리고.”

지시는 쉴 새가 없다. 손석구 역시 생의 종착역으로 폭주하는 환자의 기차를 세우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환자의 복강은 엉망이었다. 흉곽이 멋대로 부러져 대동맥이 터졌다. 그걸 지혈해 가며 수술을 하자니 복강에 고인 피를 제거하는 수련의도 쉴 틈이 없었다. 저 손은 이미 총상 환자를 살렸다. 과연 중증외상의 달인. 손석구 하나가 버티는 것으로 중증외상센터는 중심이 잡히고 있었다.

윤도는 화상 환자 쪽으로 돌아섰다. 손석구의 수술에 넋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뒤따라온 승주와 정나현도 지원태세를 마쳤다.

맥을 잡았다. 오래 몰입할 시간은 없었다. 노윤병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그 역시 명침급이기에 진맥 자리의 확보에 승주보다 나았다.

“외관, 축빈, 혈해, 풍문, 폐수!”

윤도가 외쳤다. 노윤병은 능숙하게 혈자리를 확보했다.

“침 주세요.”

윤도가 손을 내밀었다. 침은 정나현이 챙겨주었다.

구대홍!

윤도의 한의원을 구한 소방관. 그때 윤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구대홍을 지켰다. 지금 눈앞에 누운 건 해경 병사. 어쩌면 구대홍보다 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이들이 지킨 건 대한민국의 바다였다. 그렇다면 이 나라의 의료인들이 이들을 구할 차례였다. 침이 들어갔다. 다행히 구대홍의 경우가 좋은 경험이 되었다. 멋대로 흉하게 눌어붙은 상처에 대처능력이 생긴 것이다.

윤도의 장침이 환자들의 상처 위에 등대처럼 서기 시작했다. 바다를 지키는 등대처럼 고고했다. 등대가 뱃길을 인도하듯 장침은 환자들의 목숨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중증 화상자는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 여섯 환자의 응급혈을 잡는데 걸린 시간은 30여분에 불과했다.

겨우 숨을 돌린 윤도, 이제는 화상으로 인한 부종 치료에 들어갔다. 몇은 간성 부종이었고, 또 몇은 신장성이었다. 두 가지가 한꺼번에 온 환자도 있었다.

서둘렀지만 침은 헐렁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침도 근육마디에 닿지 않았다. 윤도가 관통한 건 오직 기혈이었다. 당연히 체침도 나왔다. 환자의 기혈을 장악한 사기의 반항이었다. 정기와 사기가 충돌하면 살짝 돌아갔다. 그게 바른 침의 순리였다.

의자(醫者)는 의임기응변(宜臨機應變).

허임의 말이다. 질병의 양상에 맞춰 대응하는 역동성이 필요했다.

“선생님.”

마침내 손석구가 합류했다.

“화상 환자들 급한 불은 껐습니다. 외과적인 처치가 필요한 건 선생님이 맡아주십시오.”

답하는 사이에도 윤도의 손은 쉬지 않았다. 윤도의 침이 끝나면 손선구의 수술이 이어졌다. 둘의 협업은 극본 없는 드라마였다. 합숙훈련을 한 것도 아니건만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갔다.

반나절이 더 지났다.

윤도의 마무리는 중완혈과 축빈혈, 그리고 견우혈이었다. 화상치료 뿐만 아니라 회복까지 고려한 약침이었다. 피부 상처로 몸 안에 생기는 독소배출과 세균을 방지하는 한편 화상의 부산물을 말끔히 배출토록 한 것이다. 견우혈은 피부치료에 탁월한 혈자리. 이미 구대홍의 경우에 효과를 본 까닭에 이번 시침은 더욱 능률적이었다.

우웅!

마지막 환자의 견우혈까지 시침을 마치자 환부에 서광이 보였다. 서광의 힘일까? 머리 짧은 해경이 눈을 떴다.

“악몽에서 깨었군요.”

윤도가 물었다.

“후우...”

“이제 괜찮을 겁니다. 당신은 살았어요.”

“채윤도?”

해경은 윤도를 알아보았다.

“예. 내가 채윤도입니다.”

“그렇군요. 그게 꿈이 아니었군요.”

“네?”

“선생님을 보았거든요. 제 화상 상처를 돌보고 계셨어요. 이 분이면 나를 살리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이 그냥 갈까봐 가운을 잡았었는데...”

“꿈 아닌 거 맞아요. 아까 내 가운을 잡았었습니다.”

“아.”

“잘 참았어요.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요. 당신은 이제 죽지 않을 거라는 거.”

“선생님...”

“아까 장 수경님 찾던데.”

“우리 분대장님입니다. 기관실 벽에 낀 저를 구하려다가 2차 충격에 넘어갔어요.”

“저 옆에 있습니다.”

윤도가 옆 침대를 가리켰다. 해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검문검색조 분대장이 들어왔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죽지는 않았다.

“장 수경님.”

해경이 소리치자 분대장의 눈이 반응을 했다.

“저 오일재 일경입니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 괜찮냐?”

분대장 입에서 낮은 소리가 나왔다.

“괜찮습니다.”

해경이 답했다. 둘의 대화에 실린 전우애가 콧날을 알큰하게 만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언제 다가왔을까? 손석구가 윤도 옆에 있었다.

“선생님.”

“채 선생님 덕분이네요. 저 혼자라면 몇 명 살리지 못했을 겁니다.”

“그럴 리가요.”

“사체실에서 살린 목숨만 해도 몇 인데요? 그거 생각하면 오싹합니다. 앞으로 중증외상환자들 사망진단낼 때는 채 선생님 감수를 받아야할 거 같습니다.”

“눈은요?”

“제 눈요? 멀쩡합니다. 국대 명의가 고쳐준 건데 내구성이 그렇게 엉망이겠습니까?”

“그 눈은 제가 고친 게 아니라 하늘이 고친 겁니다. 중증외상환자들 구하라고 말입니다.”

“배 고프죠? 일단 뭐 좀 먹으러갈까요? 할 일 없는 공무원 아저씨들이 또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네요. 채 선생님도 들었죠?”

“예. 환자 돌볼 시간도 없지만 국민들이 궁금해 한다니...”

“그러니 나가서 한 수저 들자고요. 이제 막 시장기가 달려드는 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윤도가 웃었다.

“많이 드세요. 오늘 밥은 공짜예요.”

올갱이 해장국집 아줌마가 뚝배기를 내려놓았다. 내용물이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원래는 올갱이 한 수저 정도가 들어가는 집. 오늘은 한 바가지를 부어놓은 듯 풍성했다. 수고한 노윤병은 정나현 편에 붙여 보냈다. 그 역시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했다.

“뉴스 봤어요. 아유, 이런 선생님들이 있어서 우리가 살맛난다니까.”

아줌마는 마구 퍼주고 싶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짝짝!

옆 테이블들에서 박수도 나왔다.

“좀 뻘쭘한데요?”

윤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네요. 하지만 아줌마 성의니 그냥 드시죠 뭐. 올갱이가 간에 좋다고 해서 피로도 풀 겸 온 거니까요.”

“간에 좋은 건 확실합니다. 푸른색 아닙니까?”

“채 선생님은 볼수록 신기합니다.”

“뭐가요?”

“저 솔직히 음양오행 같은 거 잘 안 믿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미신으로 알았거든요. 그런데 채 선생님 보면 도사 같기도 하고 신선 같기도 합니다. 이젠 안 믿는 게 아니라 아예 감염이 된 것 같다는 거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 보면 의대 편입이라도 하고 싶다니까요.”

“하핫, 농담도 그런 농담 마십시오. 노벨의학상 설이 나오는 대 한의사를 누가 가르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거야 그냥 루머죠. 제가 깜냥이 됩니까?”

“솔직히 우리 병원 의사들도 일부 그런 말을 하더군요. 그 못난 인간들, 제가 고소 당할 각오하고 따귀 한 대씩 갈겨주었습니다.”

“예?”

“한국 사람들, 남 잘 되는 거 배 아파하면 안 됩니다. 아, 까놓고 말해서 선생님 능력이 국민을 억압합니까? 의사들 월급을 내려가게 합니까? 어느 한 쪽이 잘 되면 거기 따라서 노력할 생각은 안 하고 그저 까뭉개서 끌어내리려고 하니...”

“이거 밥 먹다 체하겠는데요?”

“어, 뉴스에 우리가 나오는데요?”

손석구가 고개를 들었다. 화면에 윤도와 손석구의 치료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뒤를 이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화면에 나왔다.

“우리 중국은 금번 한국 서해에서 일어난 선단조업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하며 향후 적극적 계도와 단속으로 한국 해역에서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방지에 최선을 경주할 생각입니다. 아울러 금번 사고에 있어 한국 정부의 신속한 구조와 부상자 치료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대변인의 중국어는 자막으로 나왔다. 그걸 본 손석구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번에는 우리 정부 당국도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군요.”

“그런가 본데요.”

대화 중에 기자의 보도가 이어졌다.

“방금 들으셨듯이 중국 외교부는 전과는 달리 전향적인 사과와 재발방지의 뜻을 분명히 천명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정부가 불법조업 선단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 구조와 치료로 인도적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은 점과 함께 중국 대사관 쪽에서조차 사망자로 진단된 선원들의 극적인 기사회생이 중국 정부당국의 태도변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역시 채 선생님 공이로군요.”

손석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또 그 말씀...”

“아닙니다. 초대형참사임에도 사망자는 3명으로 끝이 났지요. 애당초 발표로는 8명이었고 중상자 중에서도 절반 가까이가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혁혁한 성과가 나왔습니다. 중국 정부가 아니라 염라대왕의 마음이라도 녹일만 한 일이었죠.”

“염라대왕님은 싫어하겠죠. 자기 일에 참견했다고...”

“하핫, 그렇군요.”

웃는 사이에도 심층보도는 계속 이어졌다. 애당초 언론에서 예상하는 사망자는 15명 선이었다. 그 중상자들이 위기를 넘겼다. 양측의 첨예한 주장 대립을 피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왔다. 이틀이나 제대로 씻지 못해 냄새까지 나는 몸. 그래도 햇살을 받으니 좋았다.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데 우리도 커피 한 잔 때릴까요?”

손석구가 물었다. 윤도가 바로 답했다.

“무조건 콜입니다.”

기자회견장은 입구부터 장사진이었다. 중국 보도진과 더불어 외국 보도진이 많았다. 이례적으로 미국 의학계와 일본 의학계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한방+양방 협진 시스템에 대한 동경이었다.

“채 선생님.”

성시혁 기자가 다가왔다.

“아직 안 올라가셨어요?”

윤도가 물었다.

“가긴 어딜 갑니까? 선생님 갈 때 같이 붙어서 올라갈 겁니다.”

“저야 가면서 잠만 잘 텐데...”

“식사하고 오는 겁니까? 이틀 동안 물만 먹었다고 하던데.”

“실은 죽도 조금 먹기는 했습니다. 우리 정나현 실장의 떼거지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죠.”

“들어가야죠?”

“외국 보도진이 굉장히 많이 왔습니다. 중국 쪽은 아예 인해전술이고요.”

“인해전술은 무서운데...”

“그러게요. 하지만 외교부 공식 사과까지 나온 마당이니 트라우마는 안 생길 거 같습니다.”

성시혁이 기자회견장을 가리켰다. 몇 걸음 옮길 때 중국 영사가 다가왔다.

“채 선생님, 전화 좀...”

“전화요?”

“받아보시죠. 저희 주석이십니다.”

‘주석?’

영사의 한 마디에 주변이 숨을 죽였다.

큼큼!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채 선생, 나 왕마오핑이오.”

“주석님...”

“우리 선원들 돌보느라 이틀이나 밤을 새웠다고요?”

“저희 해경들도 함께 돌보았습니다. 혼자 한 일도 아니고요.”

“뒷일이야 양국 해당부서가 협의할 일이지만 면목 없게 되었습니다.”

“......”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수고스럽지만 우리 부상자들 마무리도 잘 부탁합니다.”

“지금 기자회견장입니다. 방금 그 말씀 공개해도 될까요?”

“공개하시오. 허언은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주석의 각오를 상기시키며 전화를 끊었다.

펑펑펑!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통화자가 중국 주석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대화를 나눴습니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공개해 주십시오.”

기자들의 질문이 인해전술로 이어졌다.

“중국 주석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윤도가 좌중을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부상 당한 중국 어민을 총력을 다 해 돌봐준 한국 의료진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나아가 양국이 협정한 해역을 무단이나 불법으로 침범해 어업을 하는 행위는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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