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침보다 만보계-2
명침보다 만보계-2
한은지가 반 바퀴를 걸었다. 또 벽에 기대 멈췄다.
“거기서부터 다시.”
그때마다 거리는 늘어났다. 한은지의 시선이 일침한의원 현판으로 옮겨갔다. 오기 전에 했던 검색들이 떠올랐다.
<신의>
<명의>
<기적의 장침>
그것들은 과장광고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다른 나라의 활약상도 있었다. 한은지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서는 완두콩만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는 곳마다 실패했던 비만탈출. 심지어 이 곳의 예약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절뚝!
걸음을 옮겼다. 한 바퀴를 돌았다. 무릎이 다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심장도 세트로 벌렁거렸다. 다섯 바퀴를 돌았다. 이제는 오히려 조금 나아졌다. 한은지는 결국 30 바퀴를 다 채웠다.
“다리 아파 죽겠어요.”
출발 자리로 돌아온 한은지. 그 자리에 쓰러져 토악질을 했다. 침구실로 돌아와서도 마른 구토를 멈추지 않았다.
“죄송해요. 애가 구토가 심해서 풍선삽입술도 실패했거든요.”
위 풍선삽입술.
위 절제술에 앞서 선택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위에 특수 풍선을 집어넣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식후의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한은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비위 기혈실조와 영기, 위기의 치환 때문이었다. 결국 풍선을 제거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은지는 침대에 큰 대자로 누웠다. 허리둘레가 장난이 아니다. 그녀의 체질량지수는 39kg/m2를 넘고 있었다. 보통 체질량 지수가 30 이상일 때 비만으로 분류하니 어떤 수준인지 알 수 있었다.
고도비만은 많은 합병증을 유발한다. 그 종류도 다양해 당뇨병, 지방간, 고혈압, 협심증, 심근경색, 관절염, 폐쇄성 수면무호흡증, 폐색전증, 불임, 역류성 식도염 등등으로 헤아리기도 어렵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건 수명의 단축이었다. 고도비만이라면 누구든, 천수를 누리기는 불가능했다.
한은지의 땀이 가라앉자 시침을 시작했다. 행기활혈의 약침을 척중혈에 찔렀다. 척중혈은 비장을 따뜻하게 보한다. 약침으로 더불어 기혈실조에 조화를 이루고 과항진된 비장을 진정 시키려는 처방이었다. 하지만 침감은 크게 조절하지 않았다. 그대로 침 위에 테이핑을 해버리는 윤도였다.
“......?”
보고 있던 안미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때 같으면 바로 치료혈로 승부를 보았을 윤도. 오늘은 소극적인 치료를 펼치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는 침이 빠지기도 했었다. 컨디션이 안 좋은 걸까? 윤도의 실력과는 아주 다른 시침이었다.
비만혈로 잡은 혈자리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신수혈과 질변혈, 기해혈과 위중혈, 중완혈과 삼음교혈이 그것이었다. 교과서 같은 정석 침이었으니 안미란도 처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신 침을 감았다 놓으며 살 속의 바람만 조금 빼주었다.
쉬이이...
그 조차 다는 아니었다. 일부만 빼고 막아버렸다. 그에 반해 무릎과 발목관절의 침은 제대로 들어갔다. 장침도 아니고 망침이었다. 족삼리에서 현종에 이르는 일침이혈, 양능천에서 곤륜혈에 이르는 일침이혈이었다. 살집으로 뒤틀린 다리를 바로 잡기 위한 시침이었다.
뒤를 이어 장침이 출격했다. 독비혈과 양릉천을 찔렀고 슬관혈과 슬양관혈을 잡았다. 족삼리 역시 빠지지 않았다. 이어진 침은 곤륜혈과 태계혈이었다. 이건 발목을 위한 혈자리였다. 얼핏 보면 무릎과 발목 관절치료를 하는 것만 같았다. 안미란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처방이었다.
“내려와서 체중 달아봐.”
윤도가 체중계를 가리켰다. 승주의 부축을 받은 한은지가 체중계에 올라갔다.
“악!”
수치를 본 한은지가 자기 입을 막았다.
<98.5kg>
수치는 분명 100kg 안쪽이었다.
“말도 안 돼.”
한은지가 부르르 떨었다.
“어머니 들여보내세요.”
윤도가 승주에게 지시했다. 보호자가 보는 앞에서 한 번 더 체중계를 달았다. 몸무게는 똑 같이 나왔다. 한 번의 시침으로 10kg 이상이 줄어든 것이다.
“어머, 어머...”
보호자도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수많은 비만교실과 약을 먹었지만 단 몇 시간만에 10kg 이상이 빠지기는 처음이었다.
“오늘은 끝.”
윤도가 손을 털었다.
“우와아.”
한은지의 몸서리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한은지, 나 믿는다고 그랬지?”
“네.”
“사실은 마음만 그랬지?”
“......”
“그래서 일단 맛보기는 보여줬다.”
“선생님.”
“이제 반은 믿을 수 있지?”
“아뇨. 무조건 믿어요. 닥치고 믿어요. 완전, 레알, 진심!”
한은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집이 무슨 동이지?”
“우리 집은...”
한은지가 답했다. 한의원에서 4km가 넘는 곳이었다.
“좋아. 내 처방을 잘 따르면 2주일 후 쯤에 원래의 몸무게로 돌아가게 해줄 거야. 따를 수 있겠어?”
“밥 굶으라고 하시만 않으면요.”
한은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굶을 필요 없어. 간식만 아니면 일반적인 칼로리로써 하루 세 끼는 먹어도 돼. 대신 침은 날마다 맞으러 와야 돼.”
“그건 문제없어요.”
“너 혼자 걸어서.”
“......?”
“그게 다야. 걸었는지 아닌지는 침 찔러보면 알지만 핸드폰에 있는 만보계 작동시키고 다녀. 할 수 있겠어?”
“저 다리 안 좋은데...”
“잘 걸을 수 있게 침 놓았어. 한 번 걸어봐.”
“......?”
몇 발을 걷던 한은지가 뻘쭘해졌다. 무릎이 녹아내릴 듯 한 고통이 사라지고 없었다. 걸음도 아까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어머니께서 도와주셔야합니다. 은지가 힘들어한다고 자가용 태워주시면 안 됩니다.”
보호자에게도 엄포를 놓았다. 실은 한은지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체중계의 마법을 본 어머니, 무조건 승복이었다.
“약은 없어요?”
한은지가 물었다.
“한방은 일침이구삼약이야. 침으로 안 되면 나중에 약!”
“네.”
“그럼 가봐.”
“안녕히 계세요.”
한은지가 침구실을 나갔다.
“원장님.”
안미란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궁금한 거 있죠?”
“네.”
“첫째는 침이 빠진 거?”
“예.”
“일부러 그랬어요. 기혈이 엉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 침이 빠지기야 할까요?”
“.....”
“두번 째는 영기와 위기죠? 그것부터 제 자리로 돌려야하지 않았냐고요?”
“네.”
“돌리는 건 문제가 아닌데 소용없을 거 같아서요.”
“비장이나 위장에 저 모르는 문제가 있나요?”
“아니. 안 선생이 다 맞췄어요.”
“그런데 왜?”
“치료 늦추면서 환자 오래 오게 해서 치료비 뽕 뽑으려고 그러죠.”
“원장님.”
“숙제로 줄게요. 너무 전문적으로 덤비지말고 상식적으로 접근하세요.”
윤도는 의미심장한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상식적.
그게 키포인트였다.
한은지는 2주일 내내 침을 맞으러 왔다. 그때마다 땀에 젖어있었다. 윤도의 침은 변하지 않았다. 척중혈을 찌른 테이핑을 떼 주고 새 침을 넣은 후에 또 테이핑을 감았다. 그저 비장을 보하는 척중혈이었다. 감질나는 침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몸무게는 날마다 3kg 정도씩 빠졌다. 열흘 쯤 되는 날 도착한 한은지가 만보계를 꺼내보았다.
“아싸, 오늘도 만보 채웠다.”
“만보?”
“여기까지 걸어오면 8000보 쯤 되요. 그런데 날마다 자꾸 줄어들어요. 7500보, 7000보. 그래서 조금 돌아서 만보를 채우고 있어요.”
한은지는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맹목적으로 윤도 말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재미를 붙인 것이다. 그제야 안미란 머리에 빛이 들어왔다.
한은지의 집과 한의원의 거리.
그게 열쇠였다. 그래서 윤도가 한은지의 집을 물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표준보폭은 대략 76cm이다. 그러나 고도비만 한은지의 보폭은 좀 좁았다. 여기에 굉장한 변수가 있었다. 한은지의 몸무게가 날마다 줄어들었다. 그 말은 곧 보폭이 늘고 있다는 얘기였다. 만보를 채우려면 더 걷는 수 밖에 없었다.
‘맙소사!’
감탄이 절로 나왔다. 윤도의 의도는 그것이었다. 고도비만이 되면서 꼼짝달싹하는 것도 싫어했던 한은지였다. 윤도의 신침과 약침이라면 살을 빼는 건 가능했다. 그건 단지 시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다시 칼로리 소모 없이 먹어대면 머잖아 비만으로 돌아갈 한은지였다. 그러니까 윤도는, 한은지에게 스스로 균형을 잡을 기회를 준 것이다. 그 미끼를 내세워 날마다 미량의 몸무게를 감량해주었다. 한은지가 포기하지 않도록 동기부여를 해준 것이다.
명의 위의 신의(神醫).
그 단어가 왜 윤도에게 어울리는지 한 번 더 절감하는 안미란이었다.
약속된 2주차에 그 말이 증명되었다. 이날 시침 전에 체중계에 올라간 한은지의 몸무게는 66kg였다.
“좋아.”
만보계에 찍힌 숫자는 10022. 윤도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10000보를 채우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채운 한은지. 그건 굉장히 의미 있는 결과였다.
“오늘이 약속한 2주인가?”
윤도가 침대의 한은지를 바라보았다.
“네.”
“비만이 되기 전의 몸무게가 얼마였다고?”
“45kg 정도요.”
“그동안 키가 좀 컸으니 52kg 어때?”
“저는 59만 되어도 좋아요.”
한은지의 미소는 처음 온 날과 달랐다.
진맥을 했다. 비장의 맥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더불어 위장의 맥도 허덕이지 않았다. 장침을 뽑았다. 첫 자리는 기해혈이었다. 기의 바다 기해혈에서 기혈의 수위를 한껏 낮춰놓았다.
<기혈 수술>
윤도가 집도를 시작했다. 양방에 비해 편리했다. 양방은 수술에 있어 출혈에 대비한 혈액을 준비해야 한다. 만약 양방도, 피를 멈추게 한 후에 수술을 하고 다시 혈액순환을 시키면 어떨까? 수술도 편하고 환자의 데미지, 감염, 부작용의 우려도 줄어들 일이었다.
한방은 가능했다. 윤도이기에 그랬다. 기해혈에서 기의 수위를 낮추자 오장이 얌전해졌다. 그 틈을 타서 비장의 영기에 섞인 밤낮 기능을 분리했다. 그걸 위장의 위기로 밀어넣었다. 치환된 기혈이 자리를 잡도록 기다렸다.
‘오케이.’
맥으로 안정을 확인한 후에 기해혈의 통로를 열었다. 수위 조절이 관건이었다. 오장이 놀라지 않도록, 치환된 영기와 위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절해야했다. 한 시간 가까운 사투 끝에야 기혈의 조화가 끝났다. 영기와 위기가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마무리는 합곡과 삼음교였다. 두 개의 장침으로 몸 안의 찌꺼기와 잉여물을 밀어냈다. 한은지 겨드랑이에서 땀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타구니도 그랬다. 계와 곡에서 배어나오는 땀은 차라리 홍수였다. 계는 살이 조금 만나는 곳이고 곡은 많이 만나는 곳이다. 침대 매트를 다 적시고 바닥까지 흐를 정도였다. 냄새도 좋지 않았다. 사기(邪氣)가 섞인 땀이기에 그랬다.
한 시간.
더는 나올 땀이 없자 윤도가 발침을 했다.
“몸 어때?”
윤도가 물었다.
“찜질방 고온방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에요.”
한은지가 소리쳤다. 목소리처럼 몸도 가벼워보였다.
“살 아프고 힘 없던 건?”
“괜찮아요.”
몸을 움직여본 한은지가 대답했다. 영기(營氣)는 이상 무였다.
“그럼 몸무게 재봐야지.”
윤도가 한은지의 등을 밀었다. 그녀가 날렵하게 저울에 올라갔다.
“어머!”
한 번 더 자지러지는 한은지였다. 저울은 정확하게 52kg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생님!”
한은지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앞으로 세 달은 날마다 만보계에 만보를 찍도록. 그 후로는 절반으로 줄여도 될 거야.”
“선생님...”
“자신감 생긴 김에 그때 그 남학생에게 고백하러 가도 좋고.”
“갈 거예요. 하지만 고백은 안 하고요, 제 몸만 보여줄 거예요. 다시는 비웃지 못하게요.”
한은지는 전신거울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안에서 온갖 포즈를 취하는 건 자신만만한 공주였다. 고도비만이라는 악몽을 뚫고 나온 공주. 그 안에서 날씬한 몸매의 여학생이 한은지를 보고 웃고 있었다.
살...
많아도 탈이고 적어도 탈이다. 살은 비장이 담당자다. 잣, 보리, 우유, 닭, 양고기, 부추 등을 많이 바치면 살이 찐다. 차, 붉은 팥, 다시마 등을 몸에 상납하면 빠진다. 가장 중요한 건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이다. 비장이 좋아한다. 쉽지만 어려운 일이다.
총명침과 유구조충-1
총명침과 유구조충-1
[선생님, 학교가 다시 즐거워졌어요.]
[저 열심히 공부해서 한의대 가려고요. 내신 많이 까먹었지만 수능으로 승부보려고 해요. 많이 응원해 주세요.]
비 오는 날, 한은지의 문자를 받았다. 첨부된 사진의 표정이 밝았다. 옆에 있는 남학생은 마트에서 만났다던 그 학생이었다. 살 빠진 몸매만 보여준다더니 마음까지 보여준 모양이었다.
[오케이, 나중에 한의대 선배와 후배로 만나자.]
문자로 격려를 했다.
‘다음에 오면 총명침 좀 놔줘야겠군.’
혼자 웃었다. 이런 친구들이라면 뭐든 도움이 되고 싶은 윤도였다.
“원장님, 환자 분 오셨습니다.”
승주에게 인터폰이 들어왔다. 오늘의 마지막 환자는 초등학생. 하지만 매우 특별한 학생이었다. 대기실로 가니 두 여자가 보였다. 74세의 할머니와 40 후반의 딸이었다.
“이리 오시죠.”
윤도가 직접 할머니를 맞이했다. 오늘의 초등학생은 74세의 노덕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성수혁 기자의 소개로 왔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성수혁이 모시던 선배 언론인 곽규태의 장모였다. 곽규태는 지금 배달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어떻게 보면 뇌물성 진료였다. 사연이 있었다.
이제 침술특화한의대학에 본격 공론이 붙었다. 많은 사람들이 윤도를 지지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회집단도 그랬다. 대한민국의 대표병원 SS병원과 S병원, JJ병원까지도 공감을 해주었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달랐다.
‘특혜다.’
‘한의사 포화 심각.’
‘기존의 한의대에 침술교육을 강화하면 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