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반론이 폭풍대두 되었다. 정부에서 의대나 한의대 정원을 강력하게 통제한 까닭이었다. 사실, 많은 대학들이 틈만 나면 의대를 신설하려고 했다. 정치권을 내세워 압박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사연은 교육부 차관, 복지부 담당 국장 등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의대는 의대보다는 조금 나았다. 그러나 같은 선상에서 보면 한의대 신설을 허락해주면 의대 증원이나 신설 압력까지 들어온다는 거였다. 한방과 양방, 양대 집단의 호의를 얻어냈지만 그건 한의대 신설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언론도 그랬다. 성수혁이 포진한 TBS 같은 곳은 윤도를 지지했다. 윤도가 보여준 침술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대승적으로 생각할 사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언론들의 입장은 또 달랐다. 그 중에서도 배달일보의 딴죽이 가장 심했다.
배달일보 편집국장 곽규태.
사연은 성수혁이 알려주었다. 그는 한방에 나쁜 선입견이 있었다. 그의 선친이 침술사고로 불구가 되면서 유명을 달리하고 만 것. 그는 사실 의대출신이었다. 의대졸업 후에 수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언론사 의학전문기자로 자리를 잡았다. 원래 판단력과 분석력까지 우수해 배달일보로 옮겨간 후에 편집국장 자리까지 꿰차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한방의 단점에 대해 가차가 없었다. 한방 의료사고를 대서특필하는 것도 그의 성향이었다. 따라서 윤도에 대한 평가도 인색했다. 아무리 명침이라고 해도 현대의학을 넘볼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 그렇기에 침술특화한의대는 명백한 특혜라는 주장이었다.
벌써 세 번이나 흠집기사가 나왔다. 유수한 언론사의 반론은 인허가부처에 부담이 되었다. 그걸 감지한 윤도가 성수혁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만든 기회였다.
곽규태의 장모 노덕순.
까막눈이었다. 광복 직전, 떠돌이 상인의 딸로 태어났지만 가난했다. 그녀는 오빠들의 치다꺼리를 위해 희생되었다. 평생을 시장상인으로 살았다. 다행히 상술이 좋아 돈을 많이 모았다. 덕분에 외동딸 하나는 원없이 공부를 시켰다. 그 딸이 곽규태와 결혼을 했다.
의사 출신 신문기자. 만만한 직업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류층인 것이다. 그러나 그도 남자였다. 아내가 갱년기가 되면서 잔소리에 무너졌다. 장모의 초등학교 입학도 그 중의 하나였다.
“우리 엄마 초등학교 입학하신대.”
아내가 첫 마디를 꺼냈을 때 곽규태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가까운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장모가 기어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강행한 것이다.
“헐, 그 나이에 무슨 초등학교? 글 읽는 게 소원이면 한글이나 배우시면 되지.”
그렇게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게 되었다.
“당신 언론을 선도한다는 사람이 왜 그래? 늙으면 학교도 못 가? 우리 엄마 큰 결심했는데 격려는 못 해줄망정.”
아내는 핏대 한 번으로 1승을 올렸다. 그길로 부부 사이는 냉전이 되고 말았다.
답답해진 곽규태가 성수혁을 만났다. 전에 있던 TBS에서 그 자신이 데리고 키웠던 기자. 이제는 다른 직장에 있기에 더욱 허물이 없는 사이였다.
“내 말이 틀려? 노인네가 망령이 났지. 이제 와서 무슨 초등학교? 치매 오 분 전이라서 가방도 놓고 가고 금방 들은 말도 잊어버리는 중증 건망증인데...”
곽규태의 불만 속에 윤도의 길이 있었다. 성수혁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한방에서 회자되는 총명탕을 떠올린 것이다.
“사모님과 화해하고 점수 따는 방법 알려드려요?”
“그런 게 있겠어?”
“채윤도 한의사, 그라면 답이 될 겁니다.”
“성 차장 미쳤어? 나 한의사 병맛으로 보는 거 몰라?”
“알지만 대세입니다. 노벨의학상 후보인 거 모르세요?”
“그거야 어쩌다 운이 좋아 동양사상에 심취한 앤드류를 만나 그런 거고. 게다가 후보에 회자된다고 다 노벨상 타?”“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다리를 놓을 테니 장모님을 채 선생에게 보내십시오. 그리고 만약 장모님 머리가 좋아지면 채윤도 선생 좀 밀어주세요.”
“이봐. 지금 장난해? 우리 장모가 내일 모레면 80이야? 뇌의 노화에 대해 잘 모르나본데...”
“말 짤라서 죄송하지만 채윤도는 됩니다.”
“......?”
“제가 지면 술 한 잔 거하게 사죠. 참고로 저 채윤도에게 얻어먹는 거 없습니다. 콜?”
“채윤도가 그런 케이스도 있어? 노인네들 머리 좋게 만든?”
“있죠.”
성수혁이 한 마디로 답했다.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들까지 총명침을 놓아준 윤도였다.
“좋아. 콜!”
곽규태가 떡밥을 물었다. 마땅치는 않지만 밑질 것도 없었다. 만약 총명침 따위가 허구라면 윤도 비판 기사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콜!”
윤도도 성수혁의 콜을 받았다. 골칫거리로 등장한 반대파 곽규태. 그의 마음을 돌리면 침술특화한의대의 설립 장애물이 사라질 일이었다.
노덕순.
문제의 할머니 초등학생이 윤도 앞에 앉아있다. 보호자는 딸이자 곽규태의 아내였다.
“원장님.”
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우리 엄마, 정말 침 맞으면 기억력이 좋아질까요?”
“좋아지도록 해봐야죠.”
“실은 우리 그이랑 내기를 했거든요.”
“내기요?”
“우리 그이가 의사예요. 병원 일은 안 하지만 헛수고라며 그 돈으로 엄마 맛 있는 거나 사드리라고 하더군요.”
“어머니 생각은 어떠세요?”
윤도, 이들 관계에 대해 시치미를 뗀 채 ‘초등학생’을 바라보았다.
“용한 침쟁이면 가능하지.”
할머니가 웃었다.
“그렇죠?”
“그럼. 옛날에 우리 읍내에 살던 침쟁이는 바보도 고쳤거든. 요즘 침쟁이들이 솜씨가 없어서 그렇지.”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침쟁이들이 죄다 요만한 침이나 찔러대고.”“침 크다고 효과까지 좋은 건 아니거든요.”
“그래도 그렇지. 그때 그 침쟁이 침은 말이지...”
“이만했어요?”
윤도가 장침을 내밀었다.
“응? 젊은 선상님도 그 침 놓을 줄 알아?”
“원하시면 이 것도 놓을 수 있지요.”
이번에는 망침을 들어보였다.
“아서. 젊은 사람이 괜한 허세부리면 못 써. 침이라는 게 목화솜 이불 찌르듯 그냥 찌른다고 되는 게... 응?”
말을 하던 할머니의 시선이 손등에서 멈췄다. 거기 들어간 망침 때문이었다. 침은 후계혈에서 소부혈, 노궁혈을 지나 합곡혈을 찔렀다. 순식간의 일침사혈이었다.
“손 마디 움직임이 뻑뻑해 보여서요. 이제 곧 괜찮아질 겁니다.”
후계혈에서 기혈을 끌어내렸다. 어깨를 지나며 허덕이던 기를 손가락 끝까지 끌어왔다.
“손가락 움직여보세요.”
발침을 하며 말했다.
“움메, 손 마디에 참지름을 바른 것맨치로 부드럽네?”
“허세는 아니죠?”
“아이고, 이 양반이 진짜 명의구만. 옛날 우리 읍내 한의사 선상보다 낫네, 그랴.”
할머니의 기선은 이렇게 제압되었다. 늙으나 젊으나 직접 겪어야 공감하기는 다르지 않았다.
“할머니.”
침대에 눕히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왜?”
“아픈데 많죠?”“말도 마. 삭신이 다 아파. 안 아픈 데가 없어.”
할머니가 장단을 맞추고 나왔다.
“하나씩 말해보세요.”
“등때기. 아주 화끈거려서 미치겠어. 누가 뜨거운 물을 붓는 거 같다니까.”
등의 작열감. 등 따뜻한 거야 나쁠 게 없지만 늙어서 느끼는 화끈함은 독맥의 부조화 때문이다. 기혈이 순탄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체증을 이루다 뚫리곤 하므로 작열감이 나오는 것.
“이제 괜찮죠?”
독맥의 혈자리를 찔러 체증을 뚫어주었다.
“워메, 아주 시원해졌네?”
“또 어디 아프세요?”
“밥통. 이 것이 심심하면 쓰려.”
위수혈에도 장침을 넣었다.
“또 어디요?”
“무릎팍. 여기 무슨 바늘이 들었는지...”
무릎 관절염 혈자리도 돌봐주었다.
“아이고, 용하네. 내가 늘그막에 복 터졌지. 이런 침쟁이를 만나다니...”
할머니는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그럼 이제 총명침으로 갈까요?”
“그거 맞으면 머리도 좋아지나?”
“젊을 때처럼 팽팽 돌지는 않고요 기억력은 좀 좋아질 거예요.”
“아이고,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래? 내가 준비물을 자꾸 잊거든. 그리고 친구들 이름... 그 놈의 이름이 왜 이렇게 안 외어지는 지 몰라. 준식이를 영식이라고 하고 정미를 영미라고도 하고... 아, 영미는 우리 선상님 이름인데? 서영미.”
“이거 한 번 읽어보세요.”
윤도가 나무 이름 단어장을 들어보였다. 사과나무, 탱자나무, 배나무, 오동나무 등 10개의 나무이름이 적힌 종이였다. 할머니는 띄엄띄엄 단어를 읽었다.
“이제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세요.”
단어장을 감추고 물었다.
“사과나무, 배나무, 그리고, 그리고 뭐지? 꿀암나무? 감나무?”
할머니가 맞춘 건 꼴랑 두 개였다. 알고 맞춘 건지 워낙 많이 들은 거라 맞춘 건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자, 그럼 총명침 시작해볼까요? 잘 되면 100점도 맞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좋지. 선상님 나 100점 맞으면 선물 준다고 했는디. 그런데 우리 꼬맹이들이 머리가 너무 좋아. 나는 받아쓰기 보면 반도 못 맞추는데 갸들은 기본이 80점이라니까.”
할머니가 울상을 지었다.
초등 1학년의 기억력.
한 번 들으면 기억한다. 그들의 머리는 새하얀 도화지다. 뭐든지 새겨놓는다. 반면 할머니의 머리에는 여백이 별로 없다. 뭔가를 새겨놓아도 수많은 기억들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 기억 디스크와 파일들을 정리를 해야 했다. 74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디스크 정리. 흰 여백을 최대한 확보하여 새로 들어간 기억을 잘 보이게 하는 디스크 정리. 그게 바로 윤도의 총명탕이었다.
‘머리 속 안개를 밀어내고 청명하게.’
장침이 혈자리를 노리기 시작했다. 총명침도 여러 가지가 조합이 있다. 많이 쓰는 백회혈과 총명혈은 기억력의 감퇴를 막고 머리가 맑아지게 한다. 막힌 것을 뚫고 머리를 맑게 하는 조합도 여럿이다.
백회혈+은백혈
백회혈+수구혈
수구혈+풍부혈
수구혈+합곡혈
수구혈+회음혈
인당혈+상완혈
내관혈+재정혈
용천혈+족삼리혈
이밖에 오관을 열어 총명을 일깨우는 혈도 존재한다. 예풍혈에 청회혈, 천보혈에 사독혈, 영향혈에 합곡혈... 혈자리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선택하면 될 일이었다.
할머니의 반응혈은 백회혈과 총명혈이었다. 장침이 들어갔다. 더불어 음맥과 양맥의 기혈을 시원하게 순환 시켜주었다. 기억력도 결국은 기혈의 순환이다. 기혈순환이 좋다면 오장육부부터 머리까지 좋아지지 않을 일이 없었다.
“머리 어때요?”
30분이 지나 발침하며 물었다.
“샘물이 들어온 거 맨치로 시원해.”
“그럼 이거 한 번 더 해볼까요? 일단 소리 내서 읽어보세요.”
윤도가 나무이름표를 내밀었다.
“사과나무, 탱자나무, 오동나무, 배롱나무, 화살나무...”
“물 한 잔 드시고요.”
물을 먹인 후에 나무 이름을 물었다. 할머니는 열 개 중에 무려, 여덟 개를 맞췄다. 이 정도라면 기억력이 새록거리는 동기(?)들과 겨룰만해 보였다.
“이제 1등하실 수 있을 거 같아요?”
“해야지. 손주 같은 것들에게 질 줄 알아? 우리 곽서방 코도 뭉개줘야 하고.”
할머니가 투지를 불 태웠다.
“곽 서방이면 사위분요?”
“그럼. 우리 딸이 그러는데 내가 학교 간다고 하니까 은근히 무시했다고 하더라고. 머리가 나빠서 안 될 거라나. 사람 뭘로 알고.”
“어, 저랑 반대로 알고 계시네?”
“응? 반대?”
“실은 할머니 치료 몰래 부탁한 사람이 곽규태 씨에요. 할머니 사위 분.”
“우리 곽 서방이?”
“예약이 꽉 밀려서 곤란한데 통사정을 하더라고요. 할머니가 때늦게 공부를 시작했는데 힘든 거 같으니까 머리 좀 좋게 만들어달라고요. 원래는 총명하신 분이었다고.”
“참말이야?”
“당연하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특별히 침 많이 놔드린 겁니다.”
“그래?”
할머니가 갑자기 심각해졌다. 잔뜩 벼르던 차였는데 상황이 바뀐 것이다.
“하긴 우리 곽서방이 좀 촌스레긴 하지.”
“촌스레요?”
“아니야? 그 뭣이냐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말이라던데? 촌스레, 촌스레.”
“츤데레요?”
“아, 맞다. 츤데레. 무뚝뚝한 거 같지만 정 깊은 사람. 우리 곽 서방이 그래.”
할머니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가는 길에 가미소요산을 적량 처방해주었다. 유명한 약이다. 저 유명한 정조대왕도 최후의 순간까지 드셨다. 먹으면 대붕이 되어 하늘을 난다. 천지에 날개를 치는 듯 마음이 상쾌해지는 처방이었다.
그날 저녁, 윤도는 곽규태의 전화를 받았다.
“채윤도 원장님?”
“그렇습니다만?”
“저 배달일보 곽규태라고 합니다.”
“아, 예...”
“고맙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나온 한 마디였다. 짧지만 윤도를 인정하는 뉘앙스가 담겼다. 그 증명은 이틀 후에 지면으로 나왔다. 사회면에 시원한 박스기사로 침술특화대학에 대한 장단점을 심층보도해 준 것이다. 전과 달리 호의적이었다.
<침술특화한의대 필요>
행간에 숨겨진 의미였다.
“고맙습니다.”
윤도는 성수혁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전화 끊기 무섭게 방문객이 찾아왔다. 노덕순 할머니였다.
“어, 오늘 안 오셔도 되는데?”
윤도가 고개를 들자 할머니가 시험지를 내밀었다.
늦깎이 ‘초등학생’에게 전화가 왔다.
“나 오늘 받아쓰기 100점 맞았어라!”
100점.
받아쓰기가 100점이니 윤도의 총명침도 100점이었다.
“그거 자랑하러 오셨어요?”
“아니!”
할머니가 고개를 빡세게 내저었다.
응?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