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0화 (260/265)

대의치국大醫治國-2

대의치국大醫治國-2

늦은 밤, 윤도는 산해경을 펼쳤다. 신비경은 들이대지 않았다. 허무맹랑한 중국의 판타지 쯤으로 생각하던 산해경이었다. 그러나 이 안에서 나온 영약으로 고친 질병이 얼마던가.

영약은 그저 영약으로써의 효과만 보인 게 아니었다. 윤도의 신약개발에도 단초가 되어주었다. 영약만의 약효와 특별한 약리작용을 파헤쳐 유사한 약재성분을 찾아냄으로써 신약의 해법을 세웠던 것이다.

장침도 그랬다. 영약의 반응을 따라 가감되는 혈자리의 기혈작용. 그것들을 참조해 응용함으로써 윤도의 침술은 발전을 거듭해 왔다.

통장을 펼쳤다. 돈은 셀 수도 없이 쌓였고 이 순간에도 쌓이고 있었다. 한의대를 졸업할 때 동기생들 대다수의 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방대학병원에 취업해 교수로 나가는 것. 또 하나는 잘 나가는 한의원 개업해서 명의소리와 함께 돈 좀 거머쥐는 것.

공중보건의로 갈 때 윤도의 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때 꾸던 꿈은 다 이루고도 남았다. 한방대학병원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도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로 꼽히는 광희한방대학병원의 예를 들면 윤도가 간다고 하면 진료부원장 자리도 내줄 판이었다. 한방대학 교수 자리도 그랬다. 어디든 오케이다. 석사학위도 박사학위도 필요 없었다. 윤도에게는 그런 종잇장 학위보다 빛나는 침술이 있었고, 그 침술은 수 많은 불치병을 고친 역사를 낳은 까닭이었다.

장침을 들었다.

처음에는 내관혈 찌르기도 겁나던 장침이었다. 말초신경 때문이었다. 침감을 자칫 잘못 조절하면 혈관이나 정중신경을 손상할 수 있었다. 풍부혈 같은 경우는 부담의 핵심이었다. 침을 잘못 넣으면 연수를 손상한다. 자칫하면 사지마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없는 혈자리도 대체혈을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이제는 풍부혈이라도 해도 눈 감고 넣을 수 있는 지경이 된 것이다.

‘부용.’

장침을 생각하면 이름 하나가 따라온다.

‘헤이싼시호.’

검은 물빛 호수도 따라온다. 헤이싼시호가 기원이라면 부용은 시작이었다.

윤도의 꿈은 그녀가 깔아준 발판으로 차곡차곡 높아졌다. 신약을 개발했고 한의사로서의 명성을 쌓았고 인정도 받았다. 꿈꾸던 침술특화한방대학 역시 인가가 코앞.

하지만.

하지만 꼭 한 가지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부용과의 관계였다. 그 사이 정도 많이 쌓였다. 부용이 윤도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무래도 일 때문이었다.

결혼을 돌아보는 건 진경태와 윤철 때문이었다. 진경태, 알고 보니 정나현 실장과 마음이 통하고 있었다. 간간히 눈치를 채기는 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윤철 역시 여자가 생겼다. 제 방에서 통화하는 걸 들으니 진도가 상당히 나간 눈치였다. 그때 윤철의 한 마디가 윤도 가슴에 울림을 주었다.

“눈치 없이 이제야 청혼해서 미안해. 그렇게 오래 기다린 거야?”

윤철이 여친에게 하는 통화소리였다. 둘은 캠퍼스 커플이었다. 호감을 가지고 종종 만났다. 그러다 윤철이 직장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청혼을 한 모양이었다. 그 상황을 부용에게 대입 시켜보았다. 반듯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의 여자 이부용.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매력쟁이지만 다른 남자들과의 이성관계는 소원했다. 그건 소속 스타들의 반응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이가인을 비롯하여 해피 프레지던트 멤버들, 미우에 이르기까지 윤도를 연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이었다.

달력을 보았다.

부용의 생일이 다시 돌아온다. 바르는 탕약 신약의 개발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바르는 탕약까지 성공하면 그녀에게...’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 여간해서는 초롱거리지 않던 별 하나가 윤도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부용의 시선 같아 마음이 편했다.

“이쪽입니다.”

다음 날, 공항에 도착하자 박 과장이 윤도를 맞았다. 공항 귀빈실로 가니 먼저 온 특사들이 보였다. 특사는 둘 다 새 얼굴이었다.

손병수 국가안보실장.

김진걸 대통령 전 비서실장.

새로 특사가 된 사람들의 면모였다. 중량감만 봐도 전보다 무게감이 있었다. 대통령의 승부수임을 알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채 선생님.”

두 특사가 인사를 해왔다. 윤도도 인사로 두 거물을 맞았다. 이 특사들에 박광요 국정원 차장보와 박 과장, 김수희 과장이 수행멤버가 되었다.

“대통령께 장도 보고를 하러 갔더니 채 선생님 이야기를 하더군요.”

손병수가 입을 열었다.

“지난번 특사 때도 측면 지원을 하셨다고요? 이번에도 분위기 형성을 잘 부탁드립니다.”

“제 역할이 있을지 모르겠군요.”“있을 겁니다. 이번에는 선생님을 콕 찍은 초청이 아닙니까? 어쩌면 우리가 들러리일 지도 모릅니다.”

손병수가 웃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물론 반은 조크입니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번에 방수용이 그랬듯이 북에 선생님의 신침이 필요한 환자가 있다면 우리 추측이 사실일 수도 있으니까요.”

“......”

“선생님은 중국 주석과도 막역하시다죠?”

“막역이라뇨? 그저 한두 번 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합니다. 저는 한 번도 독대하지 못했거든요. 솔직히 우리 대통령도 중국 주석과의 독대는 한두 차례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

“북의 지도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이 정말 중요합니다.”“제가 할 일이 생기면 최선을 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도가 마무리를 했다. 북의 속사정은 윤도도 모른다. 그러나 특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윤도는 부록에 불과했다. 윤도가 밀담에 나가 남북을 조율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가 이륙을 했다.

중국 심양에서도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고려항공이었다. 좌석은 1등석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채윤도 선생님?”

탑승하기 무섭게 기장이 나왔다. 그는 윤도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평양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네다.”

50대 초반의 기장은 깍듯했다. 특사단에게도 인사를 잊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윤도에게처럼 깍듯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선생님 비중이 클 것 같군요.”

나란히 앉은 김광요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나 아직은 베일에 싸인 초청. 혼자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것도 번거로워 잠을 청했다.

비행기.

하루를 25시간으로 나눠 사는 윤도에게는 잠을 잘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선생님.”

얼마나 잠들었을까? 김광요가 윤도 귓전에 속삭였다. 눈을 뜨니 착륙 안내방송이 나왔다. 곧 이어 바퀴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곧 착륙이었다. 창밖으로 평양이 내려다 보였다. 서울에서 멀지 않지만 중국으로 돌아 들어와야 하는 곳. 그조차 왕래가 쉽지 않은 곳. 지구촌 시대에 유럽이나 아프리카보다 먼 곳이 바로 북한이었다.

덜컥!

바퀴 닿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 속력이 줄었다. 기수를 돌린 비행기가 관제탑이 가까운 공항 청사 앞에서 멈췄다.

북한의 영접 대표는 방수용이었다. 그는 공식적이었고 특사부터 챙겼다. 외교적인 의전에 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윤도는 마지막으로 악수를 했다. 차례는 꼴찌였지만 방수용 입가에 배인 미소는 더없이 친근해 보였다.

똑똑!

호텔 객실에 여장을 풀기 무섭게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윤도가 화들짝 놀랐다.

“채윤도 선생.”

문 앞에 선 건 연륜과 경륜으로 빛나는 한의사 차평재였다. 윤도의 침술로 목숨을 구한 그는 제법 건강해 보였다. 윤도를 확인한 그가 복무원에게 눈짓을 했다. 여자 복무원은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선생님.”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차평재가 손을 내밀었다. 윤도가 그 손을 잡았다. 손은 따뜻했다. 윤도의 초청이 차평재의 질병과는 상관없는 것 같았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윤도가 물었다.

“덕분에 새 삶을 살고 있다오. 인민들에게 작으나 도움도 주면서...”

“다행이군요.”

“채 선생 활약이 엄청나다죠? 중국의 독감을 퇴치하고 중국 주석도 만나시고. 방 비서에게 귀동냥으로 들었소이다.”

“별 말씀을...”

“이렇게 뵈었으니 지난 얘기도 하고 고마움도 전해야하는데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을 해야겠소이다.”

‘거두절미?’

윤도가 눈빛을 세웠다. 여기서 초청 이유가 나오려는 것일까?

“실은 중요한 환자가 있는데 우리 북조선 의료진들 수준으로는 도리가 없는 일이 생겼다오. 해서 부득 채 선생을 모신 것인데 수고스럽겠지만 나를 고쳐준 신침을 좀 써주실 수 있겠소?”

“......”

“미안하지만 시간도 없다오.”

“선생님.”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달려왔겠소? 사실은 공항에서 모셔가야 할 판이었는데 그건 손님에 대한 예가 아닌 것 같아서...”

“환자가 누구입니까?”

윤도가 물었다.

“도와주시겠소?”

차평재는 대답대신 재촉을 해왔다. 척 봐도 기밀에 속하는 모양. 그렇다면 더 물어도 소용없을 일이었다.

“그럼 우리 대표단에 허락을 받아주시지요.”

“지금쯤 방 비서가 허락을 받고 있을 거라오.”

“......?”

순간 윤도 방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김광요의 목소리가 나왔다. 차평재의 말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로비에 내려가 계시면 곧 가겠습니다.”

윤도가 차평재에게 답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인 까닭이었다. 잠시 후에 김광요과 박 과장이 윤도 객실로 건너왔다.

“차평재가 직접 왔다고요?”

김광요의 눈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평양에 내린지 한 시간도 안 된 상황. 이렇게 서두르는 걸 보니 굉장한 응급상황이 분명했다.

<대화는 평상적으로 하고 나머지는 필담으로 하지요. 아직 여기 도청 같은 걸 체크 못 해서...>

김광요가 필담을 요청했다.

<어떡할까요?>

윤도가 그 아래에 생각을 적었다.

“환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진료 좀 다녀오겠습니다.”“그러세요. 가셔서 시원하게 고쳐주십시오.”

<환자가 누구라고는 하지 않습니까?>

<물었는데 대답을 피했습니다.>

“북한도 침술이 괜찮은데...”

“그래도 선생님 장침만이야 하겠습니까?”

<일단 가보십시오. 만약 환자가 지도자라면 어떻게든 저희와 연락을 하신 후에 치료를 부탁드립니다. 침과 약침액을 일부만 가져가는 것도 방법이 되겠습니다.>

<지도자가 아니면요?>

<그럼 치료를 하셔야겠지요. 저희도 저녁 스케줄이 나왔는데 저쪽 인물이 국장급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예측한 대로 특사는 요식행위로 간단한 사안의 의견이나 나누고 선생님의 침술이 필요한 건지도...>

<그럴 리가요>

<아무튼 선생님 역할이 막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파이팅입니다.”

큰 소리와 함께 종이를 박 과장에게 건넸다. 박 과장은 그걸 잘게 찢어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윤도가 로비로 나왔다. 차는 이미 두 대나 대기 중이었다.

“타시죠.”

차평재가 차를 가리켰다. 차에 타기 전,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8층 창가에 김광요의 실루엣이 보였다. 평양왕진. 첫 방북 때도 그랬다. 그때도 긴장된 상태로 방수용을 따라갔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북한의 명의 차평재. 그의 침은 북한의 전설. 그런 그가 윤도를 찍어 초청을 했다.

그렇다면 이 환자는 누구인가?

환자가 앓고 있는 병은?

애애애앵!

차가 도로에 나오자 사이드카 두 대가 앞서 나갔다. 그들은 바로 차량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차량도 속도를 올렸다. 거의 150km의 질주였다. 차평재는 앞만 보고 있었다. 노장의 얼굴에 주름보다 깊게 맺힌 비장비를 윤도는 놓치지 않았다.

‘환자는 거물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분명했다. 이 환자 최소한, 지도자가 아니면 ‘지도자급’이 분명했다.

99.9%의 송장-1

99.9%의 송장-1

끼익!차량이 병원 앞에 멈췄다. 여러 의료진과 당 고위 간부들이 나와 있었다. 간부들과 원장 등의 의료진들은 차평재를 정중히 예우했다. 윤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에서 오신 채윤도 선생이오.”

차에서 내린 차평재가 윤도를 가리켰다. 의료진들은 한 번 더 허리를 접었다.

“가시죠.”

차평재가 말했다. 통성명을 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의료인력과 직원들이 파도처럼 물러섰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집중치료실이었다.

한 침대의 커튼 막 앞에서 차평재의 발길이 멈췄다. 거기 있던 의료진들도 역시 파도처럼 물러섰다. 차평재가 눈짓을 보내자 간호사 하나가 커튼의 막을 걷었다.

“......!”

윤도의 눈에 지진이 일었다. 환자는 작았다. 5살 쯤 된 남자아이였다. 그 작은 몸의 요혈마다 침이 빼곡이 꽂혀있었다.

만혈(萬穴)비상.

백혈(百穴)가동.

침만 봐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차평재. 그의 신술이었다. 신침을 총동원해 저승으로 가는 환자의 목숨을 잡아둔 것이다. 달리 말해 저 침을 빼면 아이는 바로 사망이었다.

꿀꺽!

마른 침을 넘기고 다가섰다. 아이 가슴에 수술자국이 선명했다. 동시에 처참했다. 한 번의 수술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아가 작은 수술도 아니었다. 몇 번인가의 대수술을 받은 아이. 북한의 최고급 의료진이 총동원된 이 아이는 누구일까? 그 히스토리가 차평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선천적으로 간이 좋지 않아 두 번의 간이식을 받았습니다. 기본적인 간기능검사는 물론 심장초음파, CT와 MRI, 내과적 기적질환에 더불어 PET 검사를 수행했고 기증자의 간 역시 일치하는 혈액형에 체격이 비슷한 점까지 고려했습니다. 간담도 MRI도 찍었고 위장관 내시경에 조직적합성 교차검사까지 문제가 없었는데 급격한 생체거부반응이 나와 제거하고 두 번째 이식을 받았습니다만 이번에는 의학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거부반응이...”

“저를 초청한 이유입니까?”

윤도가 물었다. 나직하지만 무게가 실린 목소리였다.

“도와주시오. 이 거부반응은 인체기혈의 부조화인 듯 해서 양방으로는 원인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이 늙은이가 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이제 채 선생이 마지막 희망입니다.”

“어디까지 맡기시는 겁니까?”

“당연히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를 먼저 보장해 주셔야합니다. 첫째는 이 순간부터 이 환자에게 대한 치료는 무조건 제 게 전권을 주셔야하며 불의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탓하지 않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윤도가 선언했다. 낯선 땅 북한. 윤도의 상식이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독박을 쓸 가능성도 있었다.

“전권은 이미 지도자 동지께서 수락하셨습니다.”

차평재가 답했다. 윤도의 시선이 그 뒤에 도열한 당 간부들과 병원책임자들에게 건너갔다. 그들 역시 일동 고갯짓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저벅!

윤도가 걸음을 떼었다. 모든 시선이 그 걸음을 따라왔다. 걸음은 세면대 앞에서 멈췄다. 먼저 비누로 씻고 소독제제로 한 번 더 씻었다. 눈치 빠른 간호사가 가운을 준비해주었다. 그녀가 입혀주려는 걸 마다하고 직접 가운을 입었다. 윤도가 돌아오자 의료진들이 물러섰다. 지독히도 절제된 행동들이었다.

윤도의 손이 환자의 손목을 잡았다. 순간, 차평재의 망막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환자는 고작 다섯 살. 그런데 손목이었다.

사실 어린이의 맥을 잡는 법은 따로 있었다. 갓난아기는 주로 이마의 맥을 본다. 5-6세까지는 3관의 맥을 기준으로 한다. 이때의 3관은 남녀에 따라 나뉜다. 남자는 왼손 검지, 여자는 오른손 검지 안의 실핏줄을 보는 것이다. 손바닥을 기준으로 첫마디가 풍관이고 둘째마디는 기관, 셋째는 명관이라고 한다.

하지만 윤도에게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신맥을 잡는 손가락이기에 갓난아기라 해도 손목 진맥이 어렵지 않았다.

예상대로 맥은 거의 없었다. 이마에는 이슬처럼 맺힌 땀. 그러나 흘러내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땀이라기 보다 사기의 응결이라고 봐도 무당했다. 그건 곧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신호였다.

심기-Down.

폐기-Down.

비기-Down.

신기-Down.

온몸의 흔적에서도 초비상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숫구멍이 움푹 패였으니 심기가 끊어지기 직전, 코가 검은 빛으로 말랐으니 폐기도 끓어지기 직전, 크게 부푼 배에 푸른 줄까지 섰으니 비기까지도 가물가물이었다. 그나마 나은 건 간기 하나. 그러나 그 조차 파국의 신호에 불과했다. 다른 오장육부가 다 작살날 지경인데 혼자 버틴다는 건 극명한 부조화의 증거인 까닭이었다.

맥은 아이에게 달린 생명줄의 디지털 사인과 궤를 함께 하고 있었다. 꺼지지 직전의 빛, 사그라지기 직전의 덧없는 불씨가 거기 있었다.

그것 외에도 다른 징후도 감지되었다. 머리 쪽에서 가물거리는 사기였다.

머리.

그러나 치명적인 오장의 기혈붕괴로 인해 가물거리는 신호들. 지금은 설령 뇌암이 있다고 해도 지엽적인 것에 불과할 일이었다. 무혼맥까지 나오는 상황이 아닌가? 무혼맥이 나오면 시체라도 봐도 무방하다. 이런 사람의 진단은 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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