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선생.”
다시 노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 소리는 귀에 익었다. 눈을 뜨자 노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차평재였다. 그의 손에 장침이 들려있었다.
“정신이 들었소?”
차평재의 목소리가 귀를 차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손병수와 김진걸, 김광요 등의 특사단이었다.
“푹 자셨소?”
김광요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하루 반 정도 잤어요. 환자 치료 끝난 후에.”
“차 선생님, 환자는요?”
윤도의 시선이 차평재에게 건너갔다.
“잠깐만요. 그렇잖아도 채 선생이 잠에서 깨면 연락을 달라고 했습니다.”
차평재는 북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잠깐 통화를 한 그가 전화기를 놓았다. 그러자 복도 쪽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똑똑!
노크가 들리자 간호사가 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선 건 휠체어였다.
“직접 보시죠.”
차평재가 휠체어를 가리켰다. 거기 앉은 환자는 어린이였다. 그가 누군지는 한 눈에 알 것 같았다.
‘탁장철...’
아이를 미는 사람은 지도자와 설미리였다. 그들이 몸소 아이를 밀고 있었다.
“채 선생.”
지도자가 다가왔다. 윤도가 상체를 일으켰다.
“아아, 그냥 편하게 누워계시오. 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설미리가 아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아이가 윤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상태가 현저히 좋아졌습니다. 수삼 일 지나면 보행도 가능할 것 같아요.”
차평재가 부연을 했다. 윤도가 아이 볼을 쓰다듬었다. 여기서는 귀하디 귀한 지도자의 아들. 그러나 윤도에게는 치열한 과정을 거쳐 살려낸 환자일 뿐이었다.
“손 좀 볼까?”
윤도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얌전히 손을 내주었다. 손목의 맥을 보았다. 이 순간에도 윤도는 한의사였다. 환자를 걱정하는 한의사.
왼손 검지 마디의 핏줄도 확인했다. 오장의 기는 거의 정상이었다. 간의 기혈은 다르지 않았고 뇌의 사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가?”
지도자가 물었다.
“이제 가료만 하면 될 거 같습니다. 탕약 처방은 곧 내드리겠습니다.”
“그러시게.”
“탁장철?”
윤도가 아이를 바라보았다.
“네?”
“고맙다. 잘 버텨줘서.”
“저도 고맙습네다.”
아이가 윤도의 말을 받았다. 지도자와 설미리의 입가는 미소로 가득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네다. 선생님을 오래 잊지 않을 겁네다.”
설미리의 인사를 끝으로 휠체어가 방향을 돌렸다. 차평재 역시 가벼운 인사와 함께 지도자를 따라 나갔다.
“채 선생.”
특사단이 다가섰다.
“일은 잘 된 건가요? 분위기를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하죠. 채 선생 덕분에 마침내 남북화합의 길이 열렸습니다.”
김광요가 웃었다.
“회담이 잘 끝났군요?”
“그래요. 남북정상회담은 조건 없이 합의가 되었고 이쪽 지도자의 특단의 지시로 비핵화와 평화협정까지 전향적으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친서까지 전해 받았고요.”
“아!”
윤도의 머리가 확 맑아졌다. 남과 북의 화합. 그거라면 사생결단으로 환자를 구한 보람이 될만 했다. 윤도가 바라보자 김광요가 주먹을 쥐어보였다. 특사들도 뒤를 따라 주먹을 쥐었다.
우리가 해냈소.
그 뜻이었다.
<남북정상회담 합의>
<남북 평화협정체결 실무회담>
<남북직항 개설 합의>
<비핵화원칙 합의>
<문화예술교류 실시>
<개성공단 두 배로 증설 합의>
<남북 교환학생제도 합의>
특종.
특종.
특종.
방송과 신문에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남북화해 무드의 특종이 쏟아졌다. 남에서 회견을 하면 북한방송이 화답했다.
남으로 오라.
북으로 오라.
우리가 간다.
너희도 오라.
남북은 이제 완전한 해빙 모드에 접어들었다. 과거에 반복되던 정략적, 전략적 제스처가 아니었다. 풍계리 핵실험장 굴착작업 중단은 물론 갱도 굴착작업도 사라졌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의 지도자가 직접 확인해 주었다. 방송에 출연해 한국의 대통령이 천명한 제의에 대해 전격 확인을 해준 것이다.
전격적인 남북의 대화 무드.
세계적인 전문가들이 분석에 나섰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냄새를 맡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성수혁 기자였다. 그는 윤도가 며칠 한의원을 비운 것을 알았다. 안미란까지 동시였다. 처음에는 둘이 함께 중국 왕진을 간 것으로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번 남북화해 무드, 선생님 연출이죠?”
전화를 걸어온 그는 단 한 마디만을 물었다.
“연출까지는 아니지만 조연 정도는 한 거 같습니다.”
윤도가 자수했다. 성수혁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윤도와의 사이에 형성된 케미 때문이었다.
소의치병(小醫治病), 중의치인(中醫治人), 대의치국(大醫治國)이다. 의사는 병을 고치고 명의는 사람을 고치며, 신의는 나라를 고친다는 뜻. 윤도라면, 그걸 해낼 능력이 있었다. 성수혁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신 성수혁은 다른 건수를 잡았다. 바르는 탕약의 미국 FDA 승인과 특허인증이었다. 윤도와 류수완이 제일 먼저 소스를 준 것이다.
강외제약의 주가는 다시 한 번 천정을 뚫었다. 이제는 산성전자 못지않은 가격을 형성하는 강외제약이었다. 제약회사 쪽에서 대장주가 되었다. 류수완은 그 열매를 독식하지 않았다.
‘일침 침술특화 한의대학생 전원 학비면제 장학금 지원.’
그의 선언이었다. 그렇잖아도 ‘윤도 한의학상’을 제정해 싹수 있는 한의사를 지원하던 그. 이제는 윤도가 설립하는 한의대학에까지 적극 동참과 지원을 선언하고 나섰다. 덕분에 윤도의 한의대학은 설립하기도 전부터 폭풍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강외제약의 약진은 윤도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윤도의 재산 역시 천문학적으로 늘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주식. 윤도는 이제 12%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였고 특허료까지 더하면 중국의 신흥 갑부들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이 주에 놀라운 일들이 파노라마로 이어졌다. 다음 이슈는 안미란이었다. 중국 명의순례를 다녀온 그녀가 확 변해버린 것이다. 그 증거는 침술에서 나왔다.
“한 번 해보실래요?”
밀린 환자를 치료하던 윤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중국에 가기 전과 달리 의욕과 자신감이 넘쳐 보인 까닭이었다. 혈자리는 풍부혈이었다. 자신감 부족으로 늘 호침을 잡던 안미란. 주저없이 장침을 집어들었다. 그녀의 침은 제법 안정된 각도로 들어갔다.
고황혈도 그랬다. 일반적인 침술이라면 폐를 손상할 위험이 도사리는 고황혈자리. 이 혈자리는 흉추 극돌기 사이의 외측으로 간겹골의 내연에 위치한다. 상층에 승모근, 하층에 대릉형근이 있고 경횡동맥과 늑간동맥이 가깝다. 잘못 찌르면 기흉이 될 수 있다. 견갑배신경과 흉신경도 주의해야 한다. 기흉이 되면 호흡곤란으로 사망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침은 닥치고 장침이었다.
“안 선생님.”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안미란은 볼을 붉히며 물러섰다.
“어떻게 된 거예요? 침술이 확 좋아졌잖아요?”
복도로 나온 윤도가 물었다.
“정말요?”
“당연하죠. 장침도 무서워하지 않잖아요? 중국에서 혹시?”
혹시...
헤시싼시호의 기연을 만났을까?“실은 원장님 말대로 노인과 어린 아이 커플 병자를 만났어요.”
“......”
“생긴 건 노숙자 스타일인데 아이를 업고 와서 다짜고짜 진료를 해달라고 생짜를 부리더라고요.”
“그래서요?”
“다들 냄새난다고 진저리를 치는 걸 제가 돌봐주었어요. 아이는 폐가 안 좋고 할아버지는 간질이 있더라고요.”
“헤시싼시호는요?”
“거긴 조느라고 잘 모르고 지났어요.”
“그럼...”
“침술 말이에요?”
“예.”
“이번에 참가한 한의사들이 모두 6개국 사람들이었어요. 첫날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 제가 좀 뒤집어놓았죠. 대한민국 채윤도 한의사 수제자라고 하니까 다들 난리가 나더라고요.”
“안 선생님...”
“사실은 굉장히 후회했어요. 그 다음부터 중국 명의로 나온 강사들까지 저보고 침술 좀 보자고 하는 통에 말이에요.”
“......”
“그러니 어쩌겠어요? 제 입으로 떠벌린 데다가 원장님 제자인 건 사실이니까 이를 물고 총대를 맸죠. 원장님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되잖아요.”
“......”
“대가들 앞에서 침을 놓다보니 자신감이 확 붙었어요. 명장 밑에 약졸 없다더니 그 말이 맞긴 한가 봐요. 저 아까 많이 안 떨었죠? 게다가 장침이었잖아요.”
“안 선생님...”
“명의순례, 정말 잘 간 것 같아요. 다 원장님 덕분이에요.”
안미란의 볼에 홍조가 번졌다.
자신감.
안미란이 만난 기연이었다. 그녀는 윤도와 갈래가 조금 다른 기연을 만났다.
그날 오후 또 하나의 낭보가 꼬리를 물었다. 침술특화한의대의 정식인가였다.
“와우!”
윤도가 쾌재를 불렀다. 인가가 예정되기는 했지만 그 또한 전격적이었다. 이 쯤 되니 축하 회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하게 회식을 진행했다.
그 자리에서 진경태를 제외한 직원들에게 각 1억원의 보너스를 쏴주었다. 진경태는 제약회사에서 따로 챙긴 까닭에 빼두었다. 회식 중에 진경태가 어메이징한 선언을 내놓았다.
“우리 곧 결혼합니다.”
진경태의 ‘우리’는 정나현이었다. 두 사람, 윤도의 짐작대로 마음을 주고 받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원장님, 저 결혼한다고 짜르는 거 아니죠?”
정나현이 조크를 날렸다.
“그 핑계로 그만 둘 거면 두 사람 영영 찢어지게 저주 침술도 수련할 겁니다.”
윤도가 장단을 맞추자 파티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축하의 의미로 두 분 신혼여행 경비는 제가 챙겨드릴 게요.”
윤도가 통 큰 인심을 썼다.
“와우, 간단하게 오키나와 정도 다녀올까 했는데 유럽이나 북유럽으로 가야겠네요.”
정나현이 반색을 했다.
“당연히 그러세요.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까.”
윤도는 기꺼이 추임새를 넣었다.
“그럼 출발합니다.”
이날 귀갓길의 대리기사는 윤철이었다. 파티가 끝날 무렵에 와주었다. 자청해서 형님을 모셔간다니 사양할 필요도 없었다.
“형.”
도로를 달리며 윤철이 입을 열었다.
“왜?”
“정실장님, 진실장님 결혼한다고?”
“그런단다. 너도 결혼 말 나오냐?”
“나왔으면 바로 했지.”
“울라? 이 형을 제치고?”
“쳇, 요즘 누가 그런 거 따지냐? 게다가 국대 명의 채윤도가 쪼짠하게 그런 일로 핏대 올릴 것도 아니고.”“국대 명의 잘도 팔아먹는구나.”
“형.”
“왜?”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이 대표님이랑 진도 많이 못 나갔어?”
“부용 씨?”
“응.”
“왜? 우리 안 좋아보이냐?”
“아니. 알쏭달쏭해서. 어떨 때보면 하늘이 내린 천생연분 같고, 또 어떨 때 보면 여자사람 친구, 또 어떨 때는 사업 파트너... 연애의 달인인 나도 헷갈린단 말이지.”
“결론만 말해라.”
“결혼상대야 비즈니스 파트너야?”
“전자다.”
“레알?”
윤철이 돌아보았다.
“내 동생인데 숨길 게 뭐냐? 그동안 자리 좀 잡느라고 고백 묵혀 놨다. 나 이 정도면 자리 잡은 거 아니냐?”
“격하게 캐인정!”
윤철이 소리쳤다.
“고맙다.”
“형이 왜?”
“누가 그러더라? 영웅도 집에서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가족에게 인정 받는 거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거야. 가족은 늘 함께 지내면서 온갖 잡스러운 일을 다 보게 되니까. 코딱지 파는 것도 방귀 뀌는 것도... 밖에서 그런 거 하면 사람들이 깨지 않냐?”
“형은 달라. 딱 공중보건의 다녀온 후부터.”
“하핫, 아무튼 프러포즈 날짜도 잡아놨으니까 걱정마라.”
“으아, 역시 우리 형.”
“운전이나 똑바로 해라. 차 흔들린다.”
“옛썰!”
큰 소리로 답한 윤철이 전방주시 모드로 들어갔다.
부용.
윤도의 결심은 서있었다. 이제는 무엇도 꿀릴 게 없었다. 침으로 치면 왼손으로 혈자리의 긴장은 풀어놓은 셈. 침이 들어갈 준비까지 끝났으니 찌르면 될 일이었다.
문자를 보았다.
그걸 위해 주문해둔 게 있었다. 그녀와 윤도에게 의미 있는 것. 물건은 이틀 후에 도착하게 되어있다. 그날, 윤도는 모교에 강연을 나간다. 그러니까 디데이는 강연에 가기 직전이었다.
모교...
학교를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졸업반 시절, 진로를 앞두고 고뇌하던 캠퍼스. 그곳에서 여전히, 윤도처럼 미래를 고뇌할 후배들을 위한 수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