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009화
6층 구석.
가게들이 유리창과 간판으로 화려함을 나타낸다면 검은 과부들의 사무실은 온통 검은색뿐이다.
꼭 무슨 귀신의 집 같다.
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별다른 응답 없이 문이 열렸다.
내가 강도면 어떻게 하려고?
아, 하긴……. 강도가 불쌍해지겠구나.
문을 연 상대는 최향자가 아닌 다른 여성. 다행히 무서운 얼굴이 아니다.
상대가 나보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존댓말을 썼다.
“안녕하세요.”
“들어오시죠.”
여성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 간만에 예의를 아는 사람을 만난 건가?
물론 여성의 복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칙칙하지만 그래도 최향자보단 낫다.
사무실 안은 어둡다.
안쪽도 바깥처럼 온통 검은색. 이건 완전 먹물로 만든 집이다.
일부러 약하게 켠 조명 아래 검은 소파, 검은 의자, 검은 책상, 검은 PC, 검은 정수기 등이 보인다.
“언니, 손님 오셨어요.”
“손님 아니야. 새로 온 짐꾼이야.”
이젠 아주 대놓고 짐꾼 취급이냐?
뭐, 그래도 대놓고 미끼 취급당하는 것보단 낫지.
일단 공손한 자세로 사무실 안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잘 부탁드립니다. 보조 헌터 김상팔입니다!”
땅바닥을 보고 있는 와중에 3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보조 헌터?”
“언니, 아까 정식 헌터라고 하지 않았어?”
“몰라. 한돈한테 따져.”
이봐.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대꾸를 해 줘야지?
오기가 발동돼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보조 헌터 김상…….”
“조용히 해! 누가 너보고 자기소개하래?”
그럼 좀 상대를 해 주든가! 내가 무슨 꿔다 놓은 보릿자루냐?
최향자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세 명의 여성이 보였다.
첫 번째, 팀장인 최향자.
최향자는 좁은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누워 있었다.
어깨 뽕 재킷은 벗어 위쪽은 탱크톱만 착의.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베 겨드랑이가 훤히 보인다. 성질머리와는 반대로 제모를 매끈히 했단 사실이 참 놀랍다.
분명 검은색 겨털이 복슬복슬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배꼽보다 겨드랑이에 더 눈이 간다.
두 번째, 최향자의 우측 벽에 기대어 선 여성.
문을 열어 준 사람이다.
최향자가 좀 근육이 붙은 체격이라면 이 사람은 마른 편.
검은 쫄바지를 입은 다리가 늘씬해 인상적이다.
검은 트레이닝복 상의 위, 뒤로 묶은 머리칼이 금방이라도 살랑거릴 것 같다.
치마를 입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다.
세 번째, 최향자의 좌측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
셋 중 가장 막내로 보인다.
귀여운 얼굴에 조그마한 몸.
스타일도 다른 두 사람과는 느낌이 다르다.
양 갈래머리에 검은 민소매 원피스, 검은 스타킹에 검은 구두.
전체적으로 왜소하고 앙증맞은 편이다. 하지만 일그러진 미간과 쫙 찢어진 눈매가 어떤 성질머리를 갖고 있을지 짐작하게 한다.
“저런 사람 데리고 일하다가 괜히 발목만 붙잡히는 거 아니야?”
세 번째 여성의 짜증에 최향자는 발목을 까딱였다.
“글쎄다. 두고 보면 알겠지. 그래도 완전 쓰레기는 아닌 것 같아.”
참 고맙습니다. 그래도 절 완전 쓰레기로 보시진 않는군요?
“다른 사람들한테서 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두 번째 여성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최향자는 발끝으로 날 가리켰다.
“괜찮아. 정식 팀원도 아니고, 그냥 보조로 쓸 건데 뭘……. 서로 통성명이나 해.”
뭐라고 하지?
‘헤헤헤. 안녕하세요. 불완전 쓰레기라고 합니다. 완전 쓰레기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쓰렉!’이라고 할까?
첫인상이 중요한데, 좀 고민되네.
두 번째 여성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장마리입니다.”
어라?
나도 장마리를 따라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김상팔입니다.”
정상적이다?
세상에, 정상적이야!
어머나 세상에, 내가 꿈을 꾸는 건가?
혹시 최향자는 비정상인 거고, 다른 두 사람은 정상인 건가?
그런 막연한 기대의 새싹이 돋아난다. 그러나 기껏 돋아난 새싹은 웬 까마귀 한 마리에 의해 뿌리까지 싹 뽑혀 먹힌다.
세 번째 여성은 혀를 쭉 내민 채 말했다.
“박유화지롱!”
음, 이건 인사가 아니라 그냥 선언이군.
오냐!
이번에도 상대방과 똑같이 혀를 쭉 내밀며 대답했다.
“김상팔이지롱!”
최향자는 내 모습에 혀를 찼다.
어이가 없지?
난 어이가 소멸했어. 소름이 다 끼치네.
어쩌다 이런 팀하고 만나게 된 거지?
“이제 돌아가.”
“예?”
뭐라굽쇼?
최향자에게 귀를 기울여 일부러 과장되게 행동했다.
내가 여기까지 오느냐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그냥 가라고?
혹시 나 지금 불합격한 건가?
“내일 아침 10시. 늦지 마.”
사냥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인 건가?
너무 단답형이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몰라도 돼.”
“그래도 무슨 일인…….”
최향자는 배를 한 번 튕기더니 단번에 소파에서 튀어나왔다.
소파에 걸쳐 있던 구두가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오는 데 불과 1초.
누운 상태에서 소파 위로 점프, 공중회전 후 내 앞에 구두 굽을 내밀며 착지한 것이다.
이를 갈며 얼굴을 구기는 최향자의 두 눈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알 거 없어.”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맹수의 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기백. 눈동자 속에서 맹금류의 발톱이 튀어나와 금방이라도 목을 후벼 팔 것 같다.
한 마디만 더 해 봐. 죽여 버릴 거야.
딱 그 정도의 메시지가 머릿속으로 전해 온다.
젠장, 쌀 것 같아!
나이 29살 먹고 바지에 지릴 것 같다고! 뭘 먹고 컸기에 면상이 저 모양이야?
한돈 아저씨 친구란 게 확 이해가 되네.
이럴 땐 대답이 정해져 있다.
답은 정해져 있어, 나만 대답하면 돼!
“안녕히 계세요.”
“꺼져.”
조용한 명령.
난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로 사무실을 나왔다.
굴욕적인 첫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이나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장마리란 사람은 그래도 말이 통할 것 같고, 박유화는…… 모르겠다.
나 진짜로 팔린 걸까?
휴대전화로 한돈 아저씨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를 연달아 다섯 번을 해도 한돈 아저씨는 받지 않았다.
그냥 내일 나가지 말까?
이거 분위기가 딱 짐꾼으로 썼다가 미끼로 쓸 것 같단 말이야! 그렇지만 여기서 쌩 까면 내 천사백만 원이…….
그놈의 돈, 돈, 돈!
***
다음 날.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다시 검은 과부들의 사무실을 찾았다.
세 사람과는 무시란 이름의 아침 인사를 나눈 후 건물 앞에 세워진 검은 밴에 올라탔다.
이 사람들 분명 속옷도 검은색일 거야.
운전은 최향자. 나머지는 뒷좌석.
가는 동안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그냥 자기들끼리 바깥 풍경을 보며 잡담을 나누는 것 정도.
난 홀로 맨 뒤에 처박혀 오늘은 어떤 취급을 당할지에 대해 전전긍긍했다.
거주 구역의 경계선인 강철 장벽을 지나니, 낮은 레벨의 사냥 구역이 보였다. 하지만 어제 최향자가 보여 준 실력을 고려할 때 이런 신입 수준의 사냥 구역에서 사냥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1급, 2급, 3급의 사냥 구역을 차례로 지나갔다.
응?
슬슬 불안해진다.
3급을 넘어?
너네 달랑 셋이잖아?
난 어차피 사람 명수에 안 들어간다고!
4급, 5급…….
보조 헌터로서 경험을 쌓은 탓인지 몸이 떨려 온다.
3급 이상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고작 3명으로는 자살행위다.
일반인인 난 공기만 들이마셔도 사망 확정.
평소에 차멀미도 안 하던 내가 현기증을 느낄 때쯤 밴이 멈췄다.
멈춘 곳은 무려 6급의 사냥 구역.
이 정도면 대규모 사냥팀이거나, 협회 최고의 헌터들한테나 가능한 수준이다. 만약 둘 중 하나가 아니라면 난 걸어서라도 혼자 돌아갈 것이다.
밴 트렁크를 열어 갖가지 크기의 검은 가방 넷을 내렸다.
길쭉한 것 하나. 뭉툭한 것 하나. 일반 배낭 하나. 여행용 캐리어 하나. 만만치 않은 무게와 가방 수로 볼 때 뭔가 엄청난 게 들은 것 같다.
“가자.”
팀장의 말에 우리는 사냥 구역 주차장에서 정문을 향했다. 최향자는 대검, 장마리는 옆으로 메는 작은 가방, 박유화는 맨손, 그리고 난 가방을 몽땅 들었다.
거대한 철문.
정면에는 붉은 페인트로 커다랗게 ‘6’이라 쓰여 있다.
괴물은 물론이고 현대병기로도 파괴가 힘든 안전의 상징.
거주지역과 사냥 구역을 나눠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평화의 막.
그것이 바로 사냥 구역의 정문이다.
굳게 닫힌 정문에는 20여 명의 사람이 있었다.
만세!
역시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어. 이 정도 인원이면 해볼 만하다.
팀장인 최향자는 보란 듯이 대검을 흙바닥에 꽂으며 인사를 대신했다.
“다들 모인 건가?”
무리 중에서 3명의 남성이 최향자에게 다가왔다. 최향자를 포함한 넷은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우선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아저씨가 말했다.
“정보는 확실한 거겠지?”
“못 믿겠으면 빠져.”
아저씨는 눈을 부라리면서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정도 숫자면 오늘 사냥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으니 다들 열심히 하죠!”
이번엔 까무잡잡한 얼굴의 청년.
어느 팀에나 한 명씩 있을 법한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는 말처럼 활짝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
전형적인 분위기 메이커. 그러나 상대는 천하의 검은 곰이다.
“이따가 도망치지나 마! 입으로만 나불대면서 몫 떼어 달라고 하면 가만 안 둬. 이 겁쟁이 자식!”
단호한 최향자의 말에 청년의 미소는 똥 씹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오늘 사냥감이 뭐기에 저런 소릴 들으면서도 한 마디 반박을 못 하는 거지?
마지막.
아무 말 없이 최향자를 바라보던 근육질 남성은 최향자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을 돌렸다.
“좋아. 다들 개소리 그만하고, 준비해. 이제 들어간다.”
20여 명은 못마땅한 얼굴로 고분고분 최향자의 말에 따랐다.
각자 가져온 방어구를 착용, 무기와 도구를 챙겼다.
검은 과부들은 별다른 환복 없이 왔을 때 그 칙칙한 복장 그대로였다.
최향자는 신속하게 각 팀별로 임무를 나눴다.
근육질 남성 노구를 포함한 12명의 팀 ‘하이퍼맨’이 일행의 전방.
칼과 도끼, 그리고 총까지 든 이들의 임무는 가장 앞서서 사냥감을 상대하며 다른 이들을 보호하는 것.
털보 아저씨 오시오를 포함한 9명의 팀 ‘빙신연맹’은 일행의 중앙.
하이퍼맨처럼 우람한 무기는 없지만, 이들의 임무는 하이퍼맨의 지원. 그리고 사냥감을 구속하는 것.
검은 곰 최향자를 포함한 4명의 팀 ‘검은 과부들’도 일행의 중앙.
우리 역할은 사령탑인 최향자의 명령 전달 및 상황에 맞게 대처하는 것.
웃는 얼굴 청년 모배구를 포함한 5명의 팀 ‘최고의 최고’는 일행의 후방.
이들의 임무는 일행의 치료 및 부상자를 이송하는 것.
다들 각자 역할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간단명료.
좋은 지휘다.
최향자는 사냥 구역 출입을 위해 사냥 구역 정문 앞에 놓인 관리기에 이것저것 정보를 입력했다. 그러자 잠시 후 딱 5분 동안만 정문이 열린다는 걸 뜻하는 경고음과 함께 거대한 철문이 기계의 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