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드헌터 김상팔-29화 (29/250)

29화

29화

감시카메라의 영상.

젠장, 몸이 떨린다.

정말 내가 더듬은 거야?

영상은 느린 속도로 천천히 재생.

나와 소녀의 모습이 왼쪽 구석에 선명히 보인다.

옆으로 뻗은 내 손이 소녀에게……가 아니라…….

응?

엥?

소녀의 엉덩이를 다른 손이 더듬고 있다?

진범의 손은 소녀의 비명에 놀라 떨어지면서 때마침 전진 중이던 내 손과 만났다. 중간에서 만난 두 손은 굵고 짧은 접촉 후 서로 제 갈 길을 가며 헤어졌다.

진범으로 보이는 형체는 화들짝 놀라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소녀의 비명이 울리며 인파가 갈라졌다.

이건 너무 절묘하잖아!

“와…….”

처음엔 안도.

그다음엔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억울해! 발차기는 왜 맞은 거지?

“흐음. 이것 참…….”

직원은 참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연신 헛기침을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난 상냥하게 직원을 노려보고는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황한 것은 소녀도 마찬가지. 만약 그 순간 바로 경찰을 불렀다면, 오늘 자격시험은 물 건너갔을 것이다.

직원은 진범을 찾기 위해 열심히 영상을 되감았다. 그러나 진범의 손만 영상에 찍혔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각도로 봐선 이 사람들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직원은 내 원망을 듣지 않기 위해 열심히 용의자들을 짚었다.

손의 움직임으로 볼 때 진범은 셋 중 하나!

첫 번째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아저씨.

능글맞은 웃음과 뚜렷한 이목구비가 화면에 또렷이 나온다. 약간 한량 같은 스타일에 다분히 여자 좋아하게 생긴 인상이다. 지나가는 여자마다 윙크를 날리는 게 보인다.

소싯적에 여자 많이 사귀어 봤을 것 같은 솜씨.

딱 알맞게 의심스럽다.

두 번째는 까무잡잡한 얼굴의 남성.

콧수염과 과도한 파마머리가 눈에 띈다.

외국인?

하하. 그럴 리가 없지.

혼혈이나, 귀화일 것이다.

건장한 체격을 지녔으니, 성욕도 왕성할 것. 이어폰을 낀 채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는데, 손짓이 좀 지저분하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하나하나가 무슨 지렁이처럼 보인다.

세 번째는 무려 아줌마.

이 사람도 외모는 범상치 않다. 이마의 주름이 눈썹을 따라 내려앉아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없고, 쭉 찢어진 입가가 귓가까지 이어진다.

밤새 빨간색 일회용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괴담 속 주인공처럼 생긴 얼굴이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다른 여자 엉덩이에 눈독을 들이는 건 의심해도 되겠지?

어떻게 세 명이 다 의심스럽냐? 일부러 나 골탕 먹이는 건가!

일단 저 세 사람이 나처럼 자격시험을 보기 위해 왔단 사실은 직원에 의해 바로 확인되었다.

“증거가 불분명하니, 경찰이 아닌 저희가 저 셋을 구속하긴 좀…….”

하하하.

그럼 전 증거가 확실해서 그러셨나요?

한 번 당해 보니까, 이거 살짝 피해망상이 생기네.

나만 당할 순 없지!

“이름이라도 알려 주세요. 안 그러면 여기서 있던 일을 헌터 협회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어요. 증거도 없이 아무나 의심해서 경찰에 넘기려 했다고요!”

“하, 하지만…….”

“이름은 알아야 다음에 또 그러면 손가락질하면서 ‘조심해! 더듬는 놈이야!’라고 할 거 아니에요? 설마 그거 하나 못 알려 준다는 거예요? 그쪽은 나한테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

직원은 우물쭈물하면서 이름 세 개를 말해 줬다.

아저씨는 부로수.

외국인은 하불로.

아줌마는 갈리.

왜 이름이 하나같이 특출 난지는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우리나라에 성씨가 참 많구나. 어렸을 땐 ‘김이박최’만 사는 줄 알았는데…….

참고로 소녀의 이름은 주아란.

음……. 내가 아는 어느 주 씨랑 성질머리도 비슷하고, 이름도 비슷하네?

언니랑 다른 점이 있다면 얼굴에 주근깨가 있단 것 정도. 세손가락팀은 잘 지낼까?

아란의 나이는 18세. 아직 고3의 미성년자다.

트레이닝복과 삐삐머리의 조합. 따로 놓고 보면 구식에 촌스럽지만, 그게 하나로 합쳐지니 꽤 괜찮아 보인다.

진정한 낭랑 18세. 말괄량이 삐삐가 자라면 딱 이렇게 생겼을 것 같다.

아란과 난 함께 모니터룸을 나왔다.

직원은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지만,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아란 양. 뭐 할 말 없어요?”

아란은 볼을 긁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안해요. 이해하세요.”

사과보단 무슨 선언에 가까운 말.

무슨 대국민 사과냐? 그렇게 진정성 없기도 힘들겠다!

아란은 어이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날 뒤로 하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젠장, 필기에서 확 떨어져 버려라!

“이제 곧 자격시험을 시작합니다! 다들 절 따라오세요!”

안내를 맡은 직원이 계단 위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1층 로비에 있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계단 위 직원을 주목.

다른 직원들의 지시에 따라 계단에 올랐다.

“자, 자! 2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2층에 있는 발표장에서 올라가시면 바로 1차 시험을 받게 되실 겁니다. 차례차례 질서를 지켜 주세요!”

마음을 가다듬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2층으로 올라갔다.

“헌터 자격시험 지원자께서는 이쪽으로 가 주십시오!”

2층에서도 직원들의 안내가 이어졌고, 지원자들은 우르르 몰려 발표장이라 쓰인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 강당 뺨치게 널찍한 방.

맨 안쪽 중앙의 무대 같은 곳과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의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름 그대로 발표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예전에 대학 다닐 때가 생각나네.

들어간 순서에 따라 중간쯤 되는 자리에 앉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앞으로 펼쳐질 시험에 대해 웅성거릴 때쯤 발표장 안이 어두워졌다.

“시작한다!”

무대 위 스크린에 빛이 비치며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자 방안을 가득 채우던 웅성거림이 한순간에 확 사라졌다.

스크린에 글자가 한 줄씩 비쳤다.

대략 헌터 협회 한국 지부의 역사에 대한 내용.

그냥 광고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 지부가 생긴 지 아직 100년이 안 됐구나! 생각보다 역사가 짧은데?”

우리나라가 으레 그렇지만, 한국 사냥 업계는 급속도로 발전한 편이다.

다른 국가의 헌터 협회와 비교해 보면 한강의 기적 저리가라 할 수준. 그 덕에 부작용도 어마어마하다.

가장 큰 불만은 역시 비용 문제. 헌터 전용의 물품에는 기본적으로 ‘헌터세’란 명목의 세금이 붙어 있다.

이게 얼마나 살인적이냐면, 외국에서 백만 원인 권총이 우리나라에선 무려 그 열 배의 가격에 팔리고 있다.

즉, 무려 구백만 원이 세금인 것이다. 거기에 사냥 시 이용할 수 있는 일부 서비스의 무자비한 가격도 장난이 아니다.

죽은 사냥감의 운송비용이나, 부산물을 실을 아이스 캡슐의 대여비, 또는 위급상황 시 출동하는 구조대 출장비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착실하게 뜯고 있는 것이다.

스크린이 올라가고, 직원들이 수십 장의 문제지를 든 채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지금부터 시험지를 배부하겠습니다. 시험 시작 종소리가 울리기 전까지 문제를 푸시면 안 됩니다.”

책상이나 나무판도 없이 문제지를 풀려니, 좀 불편하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인지 무릎이나 의자 팔걸이를 이용해 문제지를 받치고 있었다.

문제지는 한 장짜리, 문제는 딱 10개.

보기엔 간단해 보이지만, 문제 수준은 절대 그렇지 않다.

종소리가 울리고, 가장 먼저 1번 문제를 읽었다.

[01번 문제. 당신 눈앞에 꼬챙이문어가 있다. 이때 당신이 자랑스러운 헌터 협회 한국 지부 소속 정식 헌터로서 취할 행동에 대해 서술하시오.]

꼬챙이문어는 2급 사냥 구역인 ‘갯벌판’에서만 사는 괴물인데…….

일단 갯벌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해 적었다.

이름은 갯벌판이지만, 사실 이곳은 바닷가가 아닌 질펀한 늪지대에 가깝다. 괴물이란 놈들은 오직 육지에서만 살기에 이런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일단 장비와 도구를 널찍한 판자에 실어 썰매처럼 끌어서 옮긴다. 사람의 경우에는 전용장화를 이용,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한다.

흠, 어렵네.

꼬챙이문어는 갯벌 속에서 꼬치 같은 주둥이를 내밀고 숨을 쉰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녀석들의 이 꼬치 같은 주둥이에 있는 맹독이다. 여기에 찔리면 치료술이고, 약이고 그 순간 골로 간다.

하하. 그렇지만 괜히 2급이 아니다. 꼬치는 끝에만 찔리지 않으면 안전, 그 밖의 촉수나 머리 부분도 전혀 위협이 안 된다.

차례차례 문제를 풀어 갔다. 다행히 막히거나, 어려운 것은 없었다.

마지막 10번.

이건 또 특이하다.

[10번 문제. 불행히도 대한민국에 ‘또’ 쿠데타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때 현명한 헌터 협회 한국 지부 정식 헌터라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이건 그냥 대놓고, 충성을 요구하는 건데?

역시 더러운 세상이군.

아까 5번인가, 6번에선 협회에 기부금 내라고 강요했지? 헌터 협회가 원래 쓰레기인 거야, 아니면 뭐든 한국에 들어와서 현지화가 되면 이렇게 변하는 거야? 종교고, 기업이고 할 것 없이 많이들 한국화 됐네?

일단, 최대한 한국 지부를 위해서 일한다는 투로 답을 작성했다.

가식. 이중. 거짓.

이럴 때야말로 그런 것들이 필요한 순간이다. 마치 기업 입사면접을 볼 때처럼 최대한 시험관 입맛에 맞게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허울, 비위를 잘 맞춰야 한다.

문제 풀이 완료.

주관식 문제 10개를 푸는데, 주어진 1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그만! 더 이상 문제를 푸시면 안 됩니다.”

직원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빠르게 문제지를 걷어 갔다.

채점은 실시간.

무대 위에 마련된 탁자에 선 20여 명의 직원이 걷어 온 문제지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채점이 이뤄지는 동안 응시자들에게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꺄아아악!”

또 여자의 비명 소리.

모두의 이목이 한곳으로 쏠린다.

소리가 난 곳은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린 정수기 앞.

한 여성이 웬 청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사람이 절 더듬었어요!”

“아, 아니야! 난 범인이 아니야!”

비슷한 패턴, 흡사한 진행.

사람들이 두 사람을 둘러쌌고, 청년은 모두의 질타를 받았다.

“이 나쁜 놈! 할 짓이 없어서 추행을 해?”

“이 부러운……이 아니라 몹쓸 자식! 더듬으니까 좋냐?”

“이런 살인자보다 더 나쁜 놈! 요즘 성범죄가 가장 욕먹는 거 몰라?”

아까 내 경우에는 1층 로비가 시끌벅적해서 묻혔지만, 이번엔 좀 분위기가 심각했다.

남성들은 손가락질, 여성들은 청년에게 달라붙어 몸으로 밀어 댔다.

청년은 울먹이면서 결백을 주장하지만 흥분한 대중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내가 한 게 아니야! 아무리 겁을 주고 소리를 질러도…… 난…… 난…….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청년의 호소에 사람들은 못 미더워하면서도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몇몇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어딜 가든 극단적인 사람 몇은 있는 법!

“거짓말하지 마! 피해자가 떡하니 있는데, 어디서 오리발이야!”

“그럼 지금 이분이 거짓말이라도 했단 거야? 피해자는 항상 옳다고!”

“거세를 시킨 다음에 갈고리에 꿰서 천장에 매달아 놓자!”

엥? 마지막 말 누가 했어?

그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도로 난폭해지려 했다.

본래 청중이란 가장 선동당하기 쉬운 존재. 약장수와 사이비가 괜히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직원들도 당황한 눈치. 그러나 누구 하나 사람들을 말리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슨 의식을 하듯 청년의 주위를 돌며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어렸을 때 본 영화 속 야만인의 의식 같다.

헌터가 되러 왔다가 다른 의미의 ‘헌트’를 보게 될 줄이야.

물론 모든 응시자가 흥분한 것은 아니다.

아까 날 발로 찬 아란을 포함해 몇몇은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사태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난 어떻게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