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32화
내 응원에 직원들의 눈빛이 변했다.
아차, 혹시 내가 실수한 걸까?
살짝 주눅이 들어 입을 다문다.
본의 아니게 시합에 부정을 끼쳤다면 나뿐만 아니라 아란까지 실격당할 수 있다.
가급적이면 최악의 상황은 피하고 싶다.
“휴우.”
다행히 직원의 시선이 비껴갔다.
단순 응원은 괜찮은 건가?
용기를 내 계속 아란을 불렀다.
“침착하게 대처해! 그러면 이길 수 있어!”
이번엔 직원 하나가 즉시 다가왔다.
“김상팔 씨. 쓸데없는 소리를 하시면 실격 처리되실 수 있습니다.”
“넵!”
하하하. 아놔, 진짜……!
“침착? 그것도 실력이 되어야 가능한 거야!”
변태남은 아란이 충격에서 빠져나오기 전 승부를 결착 지을 심산인지, 거침없이 주먹을 뻗었다.
폭격처럼 쏟아지는 잽.
아란은 몸을 굽혀 방어가 아닌 인내를 택했다. 그러나 아란의 반응 속도론 변태남의 민첩성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쓰러져라!”
변태남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아란은 팔과 다리로 얼굴, 배를 보호하면서 계속 H력을 응축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 눈엔 아란의 H력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안 보이겠지만, 내 눈엔 똑똑히 보였다.
이것도 약에 의한 효능, 혹은 부작용! 능력이라고 치기엔 너무 허접하다.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H력을 제외한 힘이 양다리로 모이는 중.
전체적인 양은 별것 아니다. 그러나 미성년, 특히 여성임을 감안하면 믿기지 않을 농도다. H력도 신체에서 발휘되는 것이기에 근육처럼 연령과 성별 간 차이가 다소 존재한다.
다리에 모인 H력이 발끝부터 쌓여 발목, 종아리를 채운다.
“마음이 아프군! 어린애를 괴롭히니 말이야.”
변태남은 사정없이 주먹을 날리며 씩 웃었다.
즐기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좀 섬뜩하다.
“생포란 건 살아만 있으면 되는 거야. 안 그래?”
변태남의 오른쪽 주먹이 아란의 양팔을 강타, 아란의 방어가 흐트러졌다. 그러자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왼쪽 주먹이 아란의 오른쪽 뺨에 직행했다.
앗!
아란의 고개가 왼쪽으로 꺾인다. 그리고 고개를 따라 몸 전체가 기우뚱거린다.
두 번째 위기.
아란이 한쪽 무릎을 꿇는다.
“하하하. 어때? 순순히 생포되면 살포시 안아 줄 수도 있는데?”
그건 추행이야. 철컹철컹. 넌 경찰서 가면 이름 때문에 더 고생한다!
“퉷!”
아란이 거친 얼굴로 링 바닥에 침을 뱉었다.
타액과 섞인 피가 지금 아란의 상태를 표현, 아란의 입가에 피가 흘렀다.
두 번의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아란의 눈빛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반짝이며 변태남을 응시, 독기가 반짝였다.
“하하……하……?”
변태남이 입을 다문다.
변태남이 보기에도 아란의 눈길이 꽤 살벌한가 보다.
눈동자에 압도된 순간, 변태남이 멈칫했다!
“이얍!”
무릎 꿇은 상태에서 날아오른 아란의 몸이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
오른쪽 다리에 힘이 실렸다. 그리고 아란의 발끝이 곡선을 그렸다.
“느려!”
변태남은 한 박자 늦게 왼팔로 목을 가렸다.
역시 스피드는 한 수 위. 하지만 아란이 그린 선이 허공을 지나 변태남의 팔에 적중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졌다.
“크아아악!”
육중한 둔기가 내려친 것처럼 변태남이 왼팔이 구부러졌다.
보기만 해도 아픈 골절.
변태남은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으아아아, 내 팔!”
변태남이 흘린 식은땀과 침이 바닥을 적셨다.
아란은 링 가장자리의 로프에 기대어 서서 곁눈질로 직원을 바라봤다.
“흐음…….”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판정을 머뭇거렸다.
좀 더 두고 보자는 건가?
하긴, 아직 확실히 승부가 났다고 보긴 어렵다.
생포란 의미는 완전한 제압, 혹은 구속. 그러나 아직 변태남은 충분히 싸울 수 있고, 아란이 완벽하게 이겼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크으으윽!”
아란이 숨을 고르는 동안 변태남이 몸을 일으켰다.
아까처럼 여유가 넘치진 않는다.
복서에게 있어 팔 하나를 못 쓴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패널티.
사실상 전투 속행이 불가한 상황이다. 하지만 아란처럼 변태남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까불지 마! 이 망할 년이……!”
아이고, 어린애한테 ‘년’이라뇨?
성인 여성한테 써도 실례되는 말을 참 잘도 쓰시네.
“훕훕! 훕훕! 후우!”
변태남은 가쁜 숨을 내쉬며 빠르게 다리를 풀었다.
스텝은 아까보다 가볍지 않지만, 여전히 아란보다 날렵하다.
위태로운 건 아란도 마찬가지.
변태남에게 맞은 아래턱과 오른뺨이 벌겋게 부어오르다 못해 피멍이 맺혀 있었다.
아란은 로프에서 일어나 다시 변태남을 노려봤다.
“너만 한 방이 있는 게 아니거든?”
변태남의 오른팔이 뿜어낸 아지랑이로 링 위가 일그러졌다.
아지랑이로 인해 일어나는 굴절, 대기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리고 아지랑이와 함께 움직이는 변태남의 다리가 빠르게 아란에게로 향했다.
“이거나 처먹어!”
변태남의 오른 주먹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여러 번 아란을 때렸다.
처음 몇 대는 명중, 아란의 몸이 뒤로 밀렸다.
충격에 날아간 아란의 몸은 로프의 반동으로 자세를 유지한 후 그 힘을 이용해 허리 아래까지 상체를 숙였다.
그사이 변태남의 주먹은 허공을 향해 헛손질.
완벽한 빈틈이다!
“하앗!”
아란은 카포에라처럼 상체를 최대한으로 낮춘 채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아란의 발끝은 지면에서 살짝만 떠 변태남의 다리로 날아갔다. 하지만 변태남은 점프로 그것을 가볍게 피했다.
“하하하! 이제 끝……?”
아란은 반 바퀴 더 몸을 돌려 발차기를 날렸다.
이번에는 몸을 최대한으로 펴면서 발끝을 위로 올린 공격.
망치와 같은 발뒤꿈치가 변태남의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두 사람의 몸이 중력으로 인해 아래로 향하고, 아란은 무사히 착지.
반면에 변태남은 벌러덩 링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
“승자, 아란!”
아란은 변태남의 배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자신보다 훨씬 빠른 상대와 싸우는 것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소모도 상당하다.
뭐, 좋은 시합이었으니 좋은 다이어트 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변태남은 들것에 실려 방 밖으로 나갔고, 아란은 제 발로 당당히 내려왔다. 몇몇 응시자가 아란의 고군분투에 감동, 기립박수로 아란을 맞았다.
“잘했어!”
“역시 작은 고추가 맵군!”
“이젠 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되겠는걸?”
아란은 응급처치를 위해 직원을 따라 한쪽 구석에 마련된 침대로 갔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간단한 치료를 받았다.
소독약과 핀셋, 그리고 붕대와 거즈.
저렇게 일반적인 치료를 볼 때마다 H세포 능력자 중 치료술을 가진 이들이 참 부럽게 느껴진다.
“다음, 김상팔 대 안구!”
뜨끔.
갑작스러운 호령에 정신이 번쩍 들다. 그리고 아란에게 받은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긴장감이 몰려와 머리를 뒤흔들었다.
아오, 왜 이렇게 빨리 불린 거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슬쩍 몸 안에 남은 H력을 체크.
역시, 사용하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조금씩 소모되는 중이다.
차라리 잘된 걸까? 그런데 내 능력으로 어떻게 상대를 제압하지?
내 상대인 안구는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를 지닌 청년.
빡빡머리에 외모는 지극히 평범하다. 하지만 분명 특별하겠지. 평범하게 생긴 놈 치고 정말 평범한 녀석은 없다.
특히 날 불안하게 만든 것은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안구라면 그 녀석이잖아? 그 엄청난 녀석.”
“그래. 그 무시무시한 녀석이야. 김상팔이란 놈도 참 재수 없군.”
“꼬마 아가씨 시합보다 훨씬 잔인하겠어.”
젠장, 그런 이야기는 미리 하라고!
같이 앉아 있을 땐 잠잠하다가 갑자기 그런 소리들을 하는 거야?
그나저나, 도대체 안구가 누구지? 난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하도 특이한 이름을 많이 들어서인지, 이젠 웬만한 이름을 들어도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된다.
안구는 덤덤히 링 위에 서서 날 쳐다봤다.
밤톨같이 생긴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이런 녀석이 정말 위험한 상대인지 의구심이 든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구가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한다.
뭐지?
안구의 공손한 인사에 일단 나도 똑같이 허리를 숙였다.
“잘 부탁합니다.”
안구는 직원에게 부탁해 진열장에서 죽도를, 난 목도를 부탁했다.
우리는 선택한 무기를 든 채 직원의 시작 신호를 기다렸다.
“준비.”
죽도는 충격, 목도는 타격에 특화된 도구.
목도는 딱딱해서 뼈를 부러뜨리기 좋고, 죽도는 묵직해서 충격을 주기 좋다.
생포란 가급적 상처가 적고, 대상이 건강해야 좋은 법.
좀 전에 벌어진 아란의 승리는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일단 상대인 변태남이 반죽음이 되었고, 자신도 상처를 많이 입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안구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닌 ‘제압’을 해야 한다.
내 무술 실력이 특수요원 007이나, 액션스타 이소룡 정도라면 간단한 일이다.
본래 완벽한 제압이란 압도적인 실력 차에서나 가능하다. 아니라면 결국 서로 피를 흘려야만 한다.
덩치로 보면 내가 안구에게 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주아란도 객관적으로는 변태남보다 열세였지만, 승리했다. 그리고 루호나 아저씨도 외관만 보면 전혀 강하게 생기지 않았다.
루호는 딱 병약한 미청년, 아저씨는 그냥 동네아저씨.
“시작!”
우리는 침착하게 서서 서로를 살폈다.
안구의 키는 작지만, 죽도를 든 자세에는 빈틈이 없다. 그에 비해 내 손에 들린 목검은 빈약, 약자는 바로 나다.
“하아…….”
왜 목검을 골랐지? 왜 하필 목검이야?
진열장에 분명 죽창 같은 것도 있었을 텐데…….
죽창을 골랐어야 했어. 그랬으면 나도 한 방, 너도 한 방. 모두가 한 방이었다고!
젠장.
안구가 죽도라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목검을 골라 버렸다.
이럴 때 보면 역시 난 한심한 놈이다. 안구는 분명 검을 다룰 줄 아는 녀석일 것이다. 그에 비해 난 검도 쪽엔 젬병이다.
“안 오시나요?”
이 녀석 봐라?
안구의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난다.
이 녀석,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날 얕보고 있는 건가?
갑자기 묘한 승부욕이 샘솟았다.
“그쪽이 먼저 와 보시죠?”
“그러겠습니다!”
안구는 몸을 앞으로 던졌다.
난 본능적으로 옆으로 이동, 안구가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지켜봤다.
“하앗!”
안구는 공처럼 굴러 단숨에 내가 있던 자리에 도착. 내가 움직인 방향으로 죽도를 휘둘렀다.
일단 목검으로 맞받아친다.
응?
내가 내려친 목검이 죽도에 맞아 밀려 나갔다.
난 위에서, 안구는 아래에서 휘둘렀음에도 내가 위력에서 밀린 것이다.
역시 보기보다 강한 상대다.
자세를 고쳐서 목검 대신 발길질로 안구를 노렸다.
아직 일어서지 못했으니, 높이의 우위만 점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아다다다!”
경쾌하게 춤을 추듯 발을 움직여 안구를 밟았다. 그러나 안구는 바닥을 구르며 열심히 내 발바닥을 피했고, 나는 졸지에 링 위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 되었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양다리를 각각 45도 각도로 비트는 동작.
이걸 뭐라고 부르지?
탭댄스? 트위스트?
링 주변에서 비웃음이 쏟아진다. 부끄럽지만, 이것이 지금의 내 현실이다.
안구는 날 피해 멀찍이 거리를 벌려 굴렀다.
힘은 분명 좋지만 나머지는 그다지. 일단 린치가 치명적이다.
구르기로 돌진한 것도 불리한 신장의 차이를 역으로 이용해 보려는 수작이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좋은 수가 됐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겐 그런 수는 통하지 않는다.
“이제 시작입니다.”
안구는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슬쩍 직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눈초리가 좀 이상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