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43화
약한 게 분하다.
겨우 강해졌다고, 조금은 자만하고 있었는데…….
아저씨에게서 돌아서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
“이건 비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미안해할 필요 없어.”
왜 아저씨가 날 위로하는 거지?
지금은…… 내가 아저씨를 위로해도 모자란데…….
“몸조심하세요. 보너스…… 받으셔야죠.”
“끌끌끌. 그래!”
일그러진 심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로 얻어맞는 소리가 몇 번이고 귓가를 울렸다.
빠르게 발표장에 도착, 문을 여니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일단 빠르게 발표장 상황을 살폈다.
다들 조금 전 요동친 건물 천장을 올려다보며 불안하게 웅성거렸다. 지진이 발생한 것도 아닐 터인데, 심지어 직원들조차 스마트폰만 붙들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지시나 통제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젠장! 왜 신호가 가지 않는 거지? 누구 위층하고 연락된 사람 있어?”
“없어! 지금 전파 자체가 차단된 거 같아.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연락 수단이 전부 두절됐어.”
“아까 알아보러 나간 사람은 왜 안 돌아오지?”
직원들은 이미 두 사람을 뽑아 상황 파악을 위해 위로 올려 보낸 모양이었다. 그때 두 명이 내 등을 밀치며 발표장으로 들어왔다. 둘 다 심각한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알아봤어?”
돌아온 직원들은 발표장 무대로 올라가 소리를 질렀다.
“놈들이 문밖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 있어요! 위층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온 걸로 봐선 위층 사람들은 아직 상황을 모르거나, 아니면 이미…….”
“놈들?”
상황을 모르는 합격자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직원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직원 대신 모두에게 알렸다.
“죄수고릴라예요.”
“그걸 어떻게? 놈들을 보셨습니까?”
놈……들?
미치겠네. 그럼 한 마리가 아니란 거잖아?
사람들은 별별 반응을 내놨다. 누군가는 나가서 괴물들과 싸우기를 원했고, 누군가는 밖에서 구조해 줄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길 원했으며, 누군가는 그냥 질질 짜면서 겁에 질려 있었다.
참고로 그 질질 짜면서 겁에 질린 누군가는 이들 중 가장 우수한 실력을 지닌 나존귀였다.
“이런 건 아빠한테서 못 들었다고? 내가 누군 줄 알아? 나, 나존귀야!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아빠가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걸? 빨리 우리 아빠한테 전화를 넣어! 빨리 날 여기서 내보내라고! 이건 명령이야. 부탁이 아니라고! 어서 날 여기서 내보내 줘! 역시 나 같은 존재가 너희랑 똑같이 시험을 본다는 것부터 잘못되었어. 이건 미친 짓이야, 나는 여기서 나가겠어!”
나존귀는 헐레벌떡 발표장 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너무 당황한 탓인지 잠기지도 않은 문고리를 열지도 못했다.
“안 되잖아? 으아아앙!”
나존귀는 H력을 담아 문을 걷어찼다. 몇몇이 나존귀를 말리려 했지만, H력을 두른 채 발광을 떠는 미친놈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존귀는 기어코 문을 부술 작정. 그러나 발표장의 문은 겉의 장식과 달리 속에는 철판으로 되어 있었다. 어설픈 공격으로는 그냥 겉만 찌그러질 뿐 뒤틀리거나, 부서지진 않았다.
“가만히 있어!”
아저씨의 모습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나존귀에게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다른 사람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던 나존귀는 갑자기 날아온 내 주먹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아 기절했다.
“어…… 대단하네!”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동안 나존귀를 질질 끌어서 발표장 구석에 던져 놓았다.
지금 밖에선 싸우는 분도 계시는데! 1등이란 놈이 겨우 이거란 말이야?
그렇게 정리가 되나 싶었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존귀가 문을 두드린 소리를 듣고는 괴물들이 발표장으로 몰려왔고, 나존귀가 한 것 이상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존귀 때와는 달리 철문이 점차 크게 찌그러지며 형상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문과 연결된 벽에서도 자잘하게 금이 갔다.
“놈들이 왔어!”
다행히 1등을 제외한 나머지 합격자들은 싸울 의지가 충분했다. 날 포함한 합격자들은 문 앞에 서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 그냥 당할 순 없어!”
“어차피 언젠가는 마주칠 녀석들이야! 쫄 거 없다고.”
“우린 사냥꾼이야! 그런 우리가 사냥당할 것 같아?”
“한 번 죽지, 두 번 죽어? 갈 데까지 가 보자!”
맨주먹, 맨발. 그렇지만 정신은 완전무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죄수고릴라면 3급이지?”
장혁이 어깨 근육을 풀며 대뜸 말을 걸어왔다. 은근슬쩍 다른 사람 H력을 흡수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이라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온다!”
장혁은 가장 앞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두들 장혁의 한마디를 따라 자세를 취하며 철문을 향했다.
이윽고 철문이 떨어져 사람들 사이로 날아왔고, 모두들 몸을 사리며 철문을 피하느라 바빴다.
“왔다!”
뻥 뚫린 입구로 죄수고릴라가 들어왔다. 들어온 한 마리 뒤로 여러 마리의 모습이 보였다.
“으랏차차!”
가장 앞에 선 장혁은 힘차게 주먹을 휘두르며, 돌진해 오던 죄수고릴라의 면상에 찍어 박았다. 죄수고릴라의 코가 뭉개지며 뿜어 나온 피가 장혁의 얼굴에 튀겼다. 장혁은 입안으로 들어온 피를 뱉으며 모두에게 외쳤다.
“방심만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어! 녀석들은 지금 잔뜩 지친 상태다! H력 없는 내 주먹에 놈이 피해를 받은 것이 증거야! 모두 겁먹지 말고 밀어붙여!”
역시 경험의 차이? 모두 그 말에 용기를 얻었다. 사실 확인보단 그저 희망을 얻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불합격하자마자 바로 집에 간 이이와 신인성이 부러워진다.
이쪽은 합격자 7명, 죄수고릴라는 십여 마리. 죄수고릴라가 덩치가 큰 것을 이용, 좁은 발표장 입구를 틀어막는 것에 전력을 쏟기로 했다. 문은 겨우 한 마리만 통과할 너비이기에 우리는 역할을 나눴다.
일단 입구를 막는 역할은 갈리가 맡았다. 갈리의 능력에 문으로 들어오려던 죄수고릴라들이 무력하게 쓰러졌고, 뒤에 있던 녀석들은 깜짝 놀라 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발표장 내부로 들어온 죄수고릴라는 다섯 마리. 장혁이 혼자 한 마리, 유정과 구지태가 한 마리, 김대팔과 주아란이 함께 두 마리, 그리고…… 내가 혼자서 한 마리? 난 서둘러 가장 넓은 무대 쪽으로 녀석을 유인했다. 그러자 무대 뒤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날 욕하며 소품실로 도망쳤다.
“어…… 왜 이렇게 됐지?”
당황스럽다. 그냥 단체전에 묻어가려고 했는데……. 왜? 어째서?
“아까 보여 준 실력이라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망할 티라노가 날 보며 말했다. 젠장, 자기는 아란하고 팀 먹어서 편한 주제에!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인형 탈을 안 벗네?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할 때가 아니지.”
여유 부릴 틈도 없이 죄수고릴라의 통나무 같은 손이 쫙 뻗어 온다. 뭉툭한 손가락 끝만 봐도 아까 찢겨진 아저씨가 떠오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선, 놈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이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죄수고릴라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없게 돼 버린다. 정면을 응시한 채 허리만 비스듬히 꺾어 녀석의 손을 피했다.
한 번, 두 번…… 좋았어, 세 번, 네 번 성공! 누가 보면 우리가 노는 줄 알 것이다. 귓불에 바람이 스치는 촉감에 목 뒤로 닭살이 돋는다.
“간신히 피했네.”
죄수고릴라는 눈을 크게 뜨며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내 허리만 한 목 위로 혈관이 팽창하는 게 보인다. 누가 안 도와주나?
“하앗!”
우렁찬 기합 소리. 당연히 내가 낸 것이 아니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놀랍게도 구지태다? 저 사이비 놈이 직접 육탄전으로 싸우네? 구지태가 저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일일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앗!”
방심한 사이, 놈이 무대 위에 있는 물건들을 잡아 마구잡이로 던졌다. 커튼, 스피커, 소품 상자 등이 사방으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전부 다 피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
“제길!”
지지대까지 통째로 뜯긴 커튼을 피하려다 다리에 소품 상자, 복부에 단상을 맞았다. 단상이 생각보다 묵직하게 몸 안쪽으로 충격을 준다. 몸속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내장 쪽에 상처가 생긴 모양이다.
기세 좋게 단상을 밀어내고, 커튼의 지지대를 잡아 들었다. H력 없이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 이렇게 뭐라도 들고 있는 편이 훨씬 낫다.
“괜찮습니까?”
무대 바로 아래서 아란과 함께 싸우고 있는 티라노가 날 보며 소리쳤다. 제길, 자기는 아란이 대신 싸우는 동안 광탄이나 쏘는 주제에……! 크윽, 부럽다.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여 주면 안 된다. 들키면 정식 자격 취득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괜……찮습니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나머지 괴물들을 제압하는 데 집중하세요.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죄수고릴라가 대뜸 날 향해 점프했다.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괴물의 습격. 지지대를 봉처럼 휘두르면서 녀석의 머리 옆면을 힘껏 때렸다.
“어떠냐? 안 아프지?”
그 어떤 피해도 못 준다는 것은 때린 내가 가장 잘 안다. 지지대를 통해 전해지는 감촉은 꼭 맨땅을 때린 것처럼 딱딱하다. 머리는 물론이고, 목뼈까지 조금의 흔들림이 없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죄수고릴라 놈!
죄수고릴라는 내 바로 앞으로 착지, 불과 1m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주먹을 날렸다. 아무래도 이번엔 그냥 순순히 맞아 세상 하직해야 하나 보다.
“크윽!”
지지대로 주먹을 막아 봤지만, 헛수고. 철로 만든 지지대가 V자로 접히며 댕강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지지대를 가르며 날아온 주먹은 내 가슴에 명중, 심장과 폐에 강한 충격을 줬다.
“우웩!”
내부 압력 때문인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으로 피를 토했다. 아까 찢어진 상처에서 나온 걸까, 아니면 지금 상처가 나서 나온 걸까?
입안을 혀로 핥았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꽤 덩어리진 느낌이었다.
내가 뱉은 피는 곧장 죄수고릴라의 눈으로 날아갔다. 뜻밖의 행운. 녀석은 시야가 흐려지면서 나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사이 무대 반대편으로 도망쳐 죄수고릴라와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활약을 하면서 죄수고릴라 사냥에 속도를 박차고 있었다. 김대팔과 아란은 벌써 자기들이 담당한 한 마리를 쓰러뜨렸고, 유정과 구지태는 담당 죄수고릴라를 좌석 사이로 몰아 양옆에서 협공을 하고 있었다. 장혁은 아직까지 비등비등. 유일하게 나만 위기인 상황이다.
“쳇, 다른 사람들은 잘만 쓰러뜨리는데……. 완전 꽝이네.”
양손에 든 지지대 조각을 잘 살펴본다. 부러진 끝이 뾰족한 것이 무기로 쓰기에 딱 알맞은 형상이다. 문제는 나한테 H력이 없는 것이다.
“이걸로 찌를 순 있는데……”
가죽이 뚫리진 않겠지?
죄수고릴라는 눈에서 피를 닦아 낸 후에도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차분한 눈동자가 나를 노려본다. 거대한 자연이 날 농락하려는 것 같다. 같은 인간이 아닌 괴물. 종족을 넘어선 강자와 약자. 동물원에서 우리에 갇힌 고릴라를 구경하려고 했더니, 도리어 고릴라가 관람객을 구경하고 있더란 반전인 셈이다.
“받아라!”
에라, 모르겠다! 부러진 지지대 끝을 죄수고릴라에게 향한 채 그냥 냅다 앞으로 달렸다. 강철봉 끝에서 빛나는 모서리를 본 죄수고릴라는 즉시 지지대 끝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