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54화
일단 아저씨를 따라 걸었다. 우리는 수풀 사이로 들어가 유리 돔으로 접근할 만한 위협 요소를 찾았다.
“생각보다 자리가 좋군. 근처에 괴물의 흔적이 전혀 없어.”
“예. 그런 것 같아요. 그나저나 아저씨 몸은 괜찮으세요? 직접 싸우시진 않았지만, 6명을 단숨에 치료하셨잖아요?”
치료술은 고급 기술.
당연히 치료술사의 몸에 가는 부담도 상당하다. 괜히 치료술사가 귀한 대접을 받는 게 아니다.
“괜찮아. 이 정돈 이골이 나서 버틸 만해. 문제는…….”
아저씨 말이 무겁게 끊어진다.
“‘문제는’요?”
어느새 우리 머리 위로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는 수풀을 빠져나오며 야영장으로 향했다.
“문제는…… 쌍두하피가 이곳으로 온 이유야. 아까 해체하면서 알았는데……. 그 녀석…… 내장이 전부 뭉개져 있었어.”
“예?”
내장이…… 전부? 어쩐지 5급치곤 너무 싱겁다 싶었는데……. 난 우리가 강해진 줄 알았지?
“녀석은 정상이 아니었어. 일반적으로 괴물은 자기가 사는 구역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아. 녀석들은 생물보단 기계에 가깝거든. 감정의 교감 따윈 없어. 있는 거라곤 투쟁뿐이지.”
옳은 말씀.
그렇기에 녀석들을 길들이는 것은 극한으로 어렵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몇몇 특수한 방법을 제외하면 답이 없다.
“괴물은 싸우다 죽을지언정 사는 곳을 옮기진 않아. 즉, 뭔가 비정상적인 요인에 의해 이곳으로 왔단 뜻이지.”
“잠깐만요. 카리가 습격당한 게 6주 전이잖아요. 그럼 최소한 그전에 누군가 5급 사냥 구역에서 쌍두하피를 잡아와 여기에다 풀었고, 카리와 이일이 습격당한 후에 어떤 이유로 인해 쌍두하피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가, 때마침 우리가 복수하러 온 타이밍에 맞춰 내장이 모두 뭉개졌단 말씀이세요?”
너무 석연치 않은데……. 하지만 아저씨 분석이 틀릴 리가 없어. 그렇다면…… 정말로…….
인위적이란 거야?
“함정에 빠진 게 아니라면 좋겠구나.”
만약 이 모든 게 최향자를 노린 함정이라면…….
의심 가는 인물이 하나 있다. 최향자의 기억에서 본 붕대남. 녀석은 분명 최향자의 지인을 죽였고, 최향자도 죽이려 했다.
만약 놈이 아직도 최향자를 노린다면…….
설마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나?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리는 야영장 문 앞에 멈춰 섰다. 양손 가득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가득이었기에 안쪽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 주길 기다렸다.
“조심해라. 만약 괴물을 길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적이 된다면…… 아주 피곤해져! 당장 손을 떼는 게 상책이야.”
“생각해 볼게요.”
아저씨의 말이 지극히 옳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살해당하려는데, 보고도 외면할 수 있을까?
난…… 그런 것에 서툴다.
옳지 못한 일이…… 낯설다.
“어서 오세요.”
루호가 우리를 위해 유리문을 열어 주었다.
밝은 루호의 얼굴을 보니 근심이 더욱 깊어진다. 이따가 밤이 무르익으면 루호에게도 이야기를 해 둬야 할 것 같다.
그 뒤 우리는 저녁 준비에 열중했다.
화구.
문명의 이기로 만든 모닥불, 정확히 따지자면 바닥에 설치된 야외용 가스레인지라 볼 수 있다. 화구 옆 버튼을 누르면 일정 시간 동안 강한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구조다.
화구 주위에 둘러앉은 우리는 받침대를 설치했고, 거기에 물이 담긴 주전자를 올렸다.
양은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좀 나아진다.
검은 과부들은 아예 봉지 라면과 반합을 가져왔다.
주전자와 반합의 물 끓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다.
“다 됐다!”
김치는 검은 과부들 것을 함께 나눠 먹었다.
깜깜한 밤하늘, 으슥한 산 중턱에서 먹는 컵라면! 소형 용기라 너무 아쉽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있어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라면과 김치의 조합이 최고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라면이 사라졌다.
쫄깃쫄깃한 면발, 아삭아삭한 배추, 그리고 양쪽을 아우르는 MSG.
정말 최고다.
“후식은 초코바와 사탕이에요!”
초코바는 2인당 하나씩, 사탕은 1인당 3개씩 나눠 먹었다. 검은 과부들은 3명인 관계로 내가 최향자와 초코바를 나눴다. 난 최향자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특별히 반으로 자른 초코바 조각 중 큰 쪽을 양보했다.
에헴!
식사가 끝나고, 다들 화구 주변에 모여 앉았다.
배가 부르니 기분이 나른해진다. 역시 사람도 동물인가 보다.
“내일 비명횡산을 내려가면 한턱내라고!”
아저씨가 최향자에게 말했다. 최향자는 인상을 쓴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만 보면 당장에라도 아저씨를 한 방 때릴 기세다.
“그러고 보니까, 두 분은 서로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최향자와 한돈 아저씨의 첫 만남. 생각만 해도 흥미가 샘솟는다.
기대는 잠깐뿐이었다.
모두가 귀를 쫑긋 세운 상황에서 최향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로 걸어왔다.
어, 이거 분위기가 왠지……?
“닥쳐.”
‘혹시나’가 ‘역시나’다.
최향자의 단호한 목소리에 다들 시선을 돌렸다.
아, 나도 고개를 돌리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살아남기 힘들겠지?
하하하. 젠장…….
하나둘 화구에서 흩어져 잠 잘 준비를 시작했다. 검은 과부들은 준비해 온 텐트에 자리를 깔고 안으로 들어갔다.
잘 자란 인사도 없네? 흠, 내가 뭘 기대한 걸까?
우리 팀은 아저씨에게 산 장비와 나뭇잎으로 대충 자리를 만들었다. 루호, 유정, 아저씨가 침낭, 나와 호규는 베개를 받았다. 핫팩은 개인당 2개. 그래도 야영장 자체가 돔 형태이기에 화구만 안 꺼지면 크게 문제 될 것 같진 않았다. 불 담당은 호규, 아저씨, 최향자, 그리고 내가 순서대로 맡는 것으로 정했다.
하하. 아저씨가 최향자를 깨울 때 과연 어떤 곤욕을 치르실까?
“그럼 다들 주무세요.”
내 외침과 함께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낮에 있던 사냥 때문에 다들 기진맥진한 터라 바로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응?”
코 고는 소리가…… 텐트에서 들리네? 누구지?
셋 중 누가 코를…….
“아이고…….”
코 고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너도나도 피곤한 하루였던 것이다.
나도 일단 잠을 청했다. 그러나 평소처럼 쉽게 잠에 빠져들지 못했다. 아직도 내 머릿속엔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다.
“에잇!”
자리에서 일어나 화구로 자리를 옮겼다. 화구 옆에는 첫 순서인 호규가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이 깜깜한 밤중에도 호규는 후드를 깊이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거 딱 졸기 좋은 패션인데…….
일단 호규 옆에 자리를 잡고 누운 채 베개에 머리를 눕혔다.
“기분은 괜찮아요? 아까 계속 떨었잖아요.”
“아……. 그, 그거요?”
호규는 쥐구멍에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침울하게 대답했다.
본인도 오늘 사냥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혹시…… 할 말…… 있어요?”
왠지 그럴 것 같다.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 없이 한 번 더 H력을 흡수해 기억을 엿보면 되지만……. 가급적 그 방법을 쓰고 싶진 않다.
아까 흡수했을 땐 오늘 아침 사냥을 준비하던 호규의 기억을 엿보고 말았다. 어찌 됐든 내가 엿본 호규의 기억 속 모습을 근거로 추측할 때 적어도 오늘 아침까지 호규의 컨디션은 매우 좋았다.
“사실…….”
호규는 의외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털어놓고 후련해지고 싶은 걸까?
“저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하세요?”
음, 호규와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때 호규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죽어 가고 있었다.
“기억하죠.”
호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전에 한 번 쌍두하피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날…….”
그날?
그럼 우리가 거북악어를 사냥하러 온 날, 쌍두하피가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호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날, 동료들과 전 금살모사의 알을 수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등산로에서 벗어나 수풀을 뒤지고 있었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괴물의 알은 괴물이 서식하는 곳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아마 녀석들 나름대로 생존을 위해 사냥꾼들이 찾지 못할 장소에 숨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평소에 하나도 안 보이던 알을 3개씩이나 찾을 수 있었죠.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숲속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날갯소리……. 그땐 몰랐는데, 오늘 알았어요. 바로 쌍두하피였던 거예요.”
엄청 당황스러웠겠군.
비행 괴물은 5급부터인데…….
“저희는 흩어졌어요. 다들 어쩔 줄 몰랐죠. 그저…… 겁에 질려서 달렸어요. 그러다가 날갯소리가 제 바로 위에 있단 걸 깨달았죠. 소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왔어요. 그래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생각으로 능력발현을 하려 했죠. 그런데…….”
호규는 잠시 말을 흐리며 감정을 진정시켰다.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무슨 남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직후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정신을 잃었죠. 나중에 정신을 차린 건 팀장님 덕분이었어요. 오늘도…… 사실 정말 열심히 싸우려고 했어요. 어쨌든 제대로 참가한 첫 팀 사냥이니까요. 그런데…….”
호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날갯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얼어붙어서……. 듣자마자 깨달았어요. 그때 그놈이었다는 걸……. 분명히 팀장님한테 위험한 일이라고 설명을 듣고…… 선택해서 온 거였는데……. 쓸모없어서 죄송해요. 결국 함께했던 동료들은 모두 죽었고, 저만 혼자 살아남았어요. 전 비겁해요. 동료를 희생시켜서…… 혼자만 살았어요. 전 기생충이에요. 팀의 암세포…… 쓰레기예요.”
아이고. 그, 그렇게까지 말할 건…….
이러면 내가 미안한데…….
몸을 일으켜 의기소침한 호규의 등을 두드렸다.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마요. 그래도 호규 씨 능력 덕분에 우리가 이긴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한 활약의 절반은 호규 씨가 한 거죠.”
“팀장님…….”
호규가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안겼다.
아이고, 난 왜 이렇게 남자들한테 인기가 좋냐.
아이고, 아이고…….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시간을 보냈다. 호규를 위로하면서도 혹시라도 이 상황을 누가 볼까 봐 노심초사했던 것은 비밀. 시간이 지나고, 호규와 아저씨가 교대하면서 내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끌끌끌! 아주 그냥 연애소설을 써라. 제목은 내가 지어 주마. ‘팀장님은 호규 거!’가 어때? 거기에 루호도 등장시켜서 막 질투하게 해 봐. 셋이서 브로맨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 주는 거야! ANG! ANG! ANG!”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아저씨가 다 보셨나 보다. 호규가 잠을 자러 간 후에도, 난 아저씨에게 잡혀 조롱을 당해야 했다. 젠장! 나도 자야 한다고요! 마지막 순서가 저란 말이에요!
썅!
“아까 호규 씨가요…….”
일단 주제를 돌리자. 아까 호규와 나눴던 이야기를 아저씨에게 말했다.
아저씨는 내 말을 들은 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자 목소리? 쌍두하피 날갯소리랑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웃음을 멈추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여기서 내가 엿본 최향자의 기억까지 말씀드려야 하나?
그건…… 자칫 최향자에게 매우 실례가 될 수 있다. 가급적 그러고 싶진 않다.
난 오래 살고 싶다!
“역시 누군가가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것 같구나. 조심해야 해! 다른 녀석들한테도 말해 두는 게 낫지 않겠냐?”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선 생각해 봤는데요. 당분간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황뿐이지, 증거가 없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이제 슬슬 자고 싶은데……. 저 엄청 피곤하거든요?
살짝 아저씨 눈치를 보며 몸을 눕혔다. 그러나 아저씨는 날 곤히 자게 놔두질 않았다.
“야, 나에 대해선 궁금한 거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