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55화
“글쎄요.”
있긴 한데, 굳이 캐묻고 싶지 않다.
애초에 그것보단 졸린 면이 더 크고…….
지금은 그냥 자고 싶다.
“나도 말이야. 가끔은 누군가에게 터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 어때? 들려줄까? 공짜인데……?”
“글쎄요.”
와, 정말 듣고 싶다. 그런데 지금 제가 많이 졸리거든요?
“그냥 다음에 들어 드릴게요.”
눈이 감긴다.
아, 이제 좀 자자. 아저씨 다음은 최향자, 그다음이 내 차례다. 지금 자지 못하면 오늘은 잠 다 잔 셈이다. 군대 불침번이 생각난다.
아아, 잠이 든다. 잠에 빠진다.
이제 의식이 끊기…….
“음……?”
의식이 끊기…….
“응?”
왜 잠이 안 들지? 엄청 피곤하고, 엄청 졸린데…….
왜 잠들 수가 없는 거야.
젠장.
눈물을 삼키며 도로 일어나 아저씨 옆에 앉았다.
“응? 뭐야, 역시 내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거냐?”
“아니요.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아저씨는 내 말을 듣자마자 씩 웃으며 뒤로 벌러덩 누웠다.
“그럼 네가 대신 불 좀 봐라. 나 딱 10분만 자마.”
망했다.
“예. 주무세요.”
아저씨는 최향자와 교대할 시간까지 숙면을 취했다.
의외로 최향자는 내가 깨우러 가지 않아도 시간에 맞춰 알아서 텐트 밖으로 나왔다.
왠지 불길한데…….
“그럼 전 이만 자러 갈게요. 이따가 깨워 주세요.”
재빨리 최향자에게 인사를 하고 베개를 챙겼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았다.
“잠깐.”
최향자의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어머나?
“왜, 왜요?”
“잠깐 앉아 봐. 할 이야기가 있어.”
이번에야말로 삥 뜯기는 건가…….
지갑에 얼마가 있더라?
“네.”
일단 순순히 최향자 옆에 앉았다.
최향자의 목소리 한 방에 졸음이 싹 달아난다. 졸음 깨는 약보다 더 확실하네.
“저기 말이야…….”
흠칫.
나도 모르게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딴생각 중이라 평소보다 배는 더 심장이 놀랐다.
“예?”
슬쩍 최향자의 안색을 살폈다.
이글거리는 불꽃에 그늘과 빛이 교차해 내가 보는 대상에 일렁임이 생긴다. 덕분에 최향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최향자는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이런 숨 막히는 시간이 무려 20분가량 이어지니까, 실제로 기도가 막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든다.
기다리는 동안 속으로 혼자 양을 셌다.
숫자는 어느덧 1000을 돌파, 그냥 최향자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까?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곤욕이다. 그냥 밖에 나가서 야행성 괴물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게 낫다!
“고마워.”
드디어 최향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나한테…… 뭐라고?
“예?”
놀라움에 눈을 비비고 최향자를 바라봤다. 최향자는 화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천천히 최향자의 얼굴을 살핀다. 길게 내린 머리부터 가녀린 목선까지. 불꽃으로 화장을 한 듯 최향자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라 있다.
설마…… 쑥스러운 건가? 부끄러워하는 거야? 진심으로?
나한테?
천하의 ‘검은 곰’한테 감사 인사를 받다니……. 기분이 이상하다.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숙연해지지?
모르겠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하고 보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응.”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갔다. 가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니, 최향자가 날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흠, 살짝 소름이 끼치네.
나도 모르게 최향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휴우!”
유리문으로 빠져나오고 나서야 숨통이 트인다.
똑같은 공기, 똑같은 체온인데…… 훨씬 홀가분하다. 흠, 그건 그렇고…… 조명 덕분인가?
화구 불에 비친 최향자는 평소보다 아주 쪼끔 더 예뻐 보였다.
상의 주머니에서 캠코더와 지지대를 꺼내 머리에 연결, 이번엔 캠코더를 야시경처럼 눈앞에 고정시켰다. 드래건 사냥 때처럼 캠코더의 적외선 촬영 기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캠코더의 전원을 누르니 시선이 연결된 왼쪽 눈에서 어둠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조용히 시간만 때우다 갑시다요.”
괴물의 눈에 띄면 골치 아프다. 물론 이런 곳에서 강한 괴물이 나올 리는 없다. 여긴 엄연히 ‘보의 길’이다. 3급 중 가장 약한 괴물들이 사는 곳 중 하나. 나와야 갱벌레 정도. 게다가 여차하면 야영장으로 도망가면 된다. 이 부근 괴물들은 절대 유리 돔을 부술 수 없다.
“룰루랄라, 룰루랄라…….”
아무 의미 없는 노래. 녹색의 세상에서 나 혼자 있단 두려움을 잊기 위한 자기최면이다.
쌍두하피.
분명 한국에 서식하는 괴물 중 악질적인 면으로 유명하다. 일단 비행을 하기 때문에 사냥하기 쉽지 않고, 5급 이상으로 질긴 살가죽에 웬만한 공격이 차단된다. 그야말로 날아다니는 장갑차. 더군다나 오늘 새로 알게 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머리가 하나 줄게 되면 움직임이 더 빨라진다. 녀석이 흥분해서 제대로 날뛰지 못한 덕에 사냥이 성공한 것이지, 냉정하게 공격했다면 우리가 전멸했을 확률이 높다.
오늘 사냥으로 우리 팀의 장단점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조루호. 능력발현은 3분이지만, 일단 능력 자체가 상당히 강력하다. 최소한 사슴으로 변한 루호가 밀리는 걸 본 적은 없다. 다만 능력을 쓰지 않을 때 사용하는 유성추의 경우에는 조금 애매하다. 송사리들을 상대할 땐 괜찮지만, 덩치가 있거나 오늘 쌍두하피처럼 방어력이 높은 괴물한텐 씨알도 안 먹힌다. 이건 분명 보완해야 한다.
다음 한돈 아저씨. 치료술은 일류다. 어쩌면 종합적으로 볼 때 우리 팀원 중 최고 능력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통에 있어 다소 문제가 있다. 심각하진 않지만, 사람에 따라선 이게 혐오로까지 작용할 수 있다. 루호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고, 나도 그런 아저씨의 모습이 싫진 않다. 문제는 유정과 호규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 그리고 공격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단 점도 걱정이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 말곤 싸우질 않으시니…….
다음 유정. 머리에 쓴 두건 벗고 ‘사실 나 여자였어요!’ 할 것 같은 외모지만……. 루호도 비슷한 처지라 별 상관은 없다. 실력은 준수, 협회에서 보여 준 활약도 보통 이상이다. 솔직히 지금 우리 팀에서 가장 낫지 않나 싶다. 정확한 능력발현을 보지 못한 것만 빼면 다 괜찮다.
예전에 정식 헌터였다가 은퇴했다고 했지?
나중에 기회를 봐서 물어보자.
다음 호규. 후드를 쓴 음침한 이미지지만, 내가 볼 땐 그냥 패션이다. 목소리를 충격파로 바꾸는 능력발현도 아주 좋다. 다만 조금 자신감이 부족한 게 옥에 티. 그리고 목이 쉬면 능력을 쓸 수 없단 것도 약점이다. 이 부분은 무기나 아저씨의 치료술로 보완하면 될 것 같다. 전에 속한 팀은 본인을 빼고 전멸. 전부 쌍두하피에게 당한 걸까?
마지막으로 나. 사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팀의 구멍이다. 팀장으로서 리더십이 부족하다. 게다가 팀원을 모으는 데 급급해서 각 멤버 간 상성, 팀의 사냥 전술도 제대로 세우질 않았다. 분명 오늘 사냥감인 쌍두하피가 얼마나 위험한 녀석인지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준비가 부족했다. 오늘은 요행히 성공했지만, 다음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 일단 내 능력발현부터가 불안정하다. 좀 더 제대로 된 무기로 허점을 메워야 한다.
그에 반해 검은 과부들은 정확히 ‘소수 정예’란 말을 잘 실천하고 있다. 팀장인 최향자는 경험이 풍부하면서 협회와도 긴밀하다. 또한 다른 팀과 연합을 하면서 리더로서 중심을 잡는 것만 봐도 카리스마가 남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대검을 이용한 묵직한 공격은 강력하다. 팀원인 장마리와 박유화의 협동도 우수한 편. 능력발현을 통해 박유화는 방어, 장마리는 공수 전환이 자유롭다. 심플하지만, 그렇기에 간단히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전에 함께 일했던 ‘세손가락’도 비슷한 스타일이다. 반면에 우리 팀은 변칙적인 면이 강하다. 의표를 찔러 단숨에 제압하는 전술. 성공하면 좋지만, 실패하면 끝장이다.
“그만 돌아갈까?”
진정은 충분히 되었다. 돌아가면 당장 최향자와 순서를 바꿔 그냥 나 혼자 불을 살펴야겠다. 불 옆에 혼자 있으면 조용하고 따뜻해서 금방 잠들겠지?
하하하.
최향자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날이 밝을 때까지 나와 함께 밤을 샜다.
결국 난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젠장…….
모두들 상쾌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밝게 떠오른 아침 햇살 아래로 잠자리를 정리, 펄펄 끓인 커피로 아침을 대신한 후 야영장을 나왔다.
“하암…….”
졸리다. 아, 너무 졸려서 미칠 것 같다. 어느 정도냐면 비몽사몽인 정신에 한돈 아저씨가 루호와 유정보다 더 잘생겨 보인다.
최악이네.
커피를 마셔도 졸음이 달아나질 않는다. 커피는 어디까지나 기호 식품, 잠 깨는 약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선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상태일 때 이야기. 나같이 비정상적인 상태면 그냥 물이다.
우와, 물이 까맣다!
야영장을 출발해서 2~3시간이면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밴에서 한숨 자야지. 만약 거기서도 누가 날 방해한다면…… 진짜 정색하면서 때릴 거야.
출발 전 한 번 더 야영장을 돌아봤다.
단 하룻밤이지만, 안전하게 우릴 지켜 준 공간. 다음에 또 오고 싶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
응?
길 위쪽에 흙먼지가 보인다.
“저기, 저거 설마…….”
내가 가리킨 흙먼지를 보며 다들 입을 벌렸다. 그러나 장마리는 침착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같은데요?”
“사람?”
그 말에 아저씨가 가방에서 망원경을 꺼냈다. 아저씨가 꺼낸 망원경을 박유화가 낚아챘고, 즉시 흙먼지를 살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
아저씨의 푸념에도 박유화는 꿋꿋이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거…… 쫓기는 거야! 괴물한테 쫓기고 있어!”
“쫓기고 있다고요?”
유정은 즉시 소총을 손에 들었다. 이번에는 호규도 떨지 않으며 유정을 따라 총을 잡았다.
박유화는 중계에 신이 났는지 살짝 목소리를 키워 소리쳤다.
“뒤에서 쫓아오는 괴물은 갱벌레야! 애걔, 겨우 3마리? 저 정도에 쫓기는 거야?”
쟤는 자기 일 아니라고 함부로 이야기하네. 갱벌레가 한 마리일 땐 엄청 약해도 뭉치면 강해진다. 게다가 녀석들을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어디선가 계속 동료를 불러와 수가 늘어나기에 만만하지 않다.
“도와줘야 할까요?”
내 질문에 아저씨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버려 둬. 저 정도로는 잘 안 죽어. 게다가 바로 옆에 야영장이잖아? 괜찮을 거다.”
음, 그것도 그렇네.
“그럼 서둘러 가죠. 귀찮은 일에 말려들면 저희도 위험하니까요.”
“구해 주지…… 않는 건가요?”
호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차, 호규의 경우엔…… 구해 주고 싶겠구나. 크윽. 하는 수 없지.
“그럼 다른 분들은 먼저 출발하세요. 저랑 아저씨, 그리고 호규 씨 셋은 뒤에 남아서 저분들을 도울게요.”
“팀장님!”
호규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예상한 대로 아저씨의 얼굴은 썩어 갔다.
“야, 나는 왜? 나한테 선택의 자유도 없는 거냐?”
“부상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