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57화
“본인한테 물어보죠.”
호규가 대뜸 물병을 내밀었다.
좋은 생각이야.
나는 흔쾌히 호규의 물병을 받았다. 그리고 물병의 뚜껑을 열어서 안에 든 내용물을 녀석들에게 쏟았다.
“어푸푸푸!”
녀석들 중 대머리 남자만 홀로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여자들은 아직도 멀미하는 중.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
대머리 녀석은 아직 정신이 덜 깼는지 비몽사몽 하며 눈만 껌뻑였다.
“아저씨, 좀 도와주실래요?”
“끌끌끌. 그래. 내가 이런 건 또 전문이지.”
아저씨는 대머리에게 엉덩이를 댄 다음 힘차게 방귀를 뀌었다. ‘뿡’ 소리와 함께 대머리 녀석뿐만 아니라 여자들까지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사람이 내는 소리 같지 않은 괴성, 녀석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괴로워했다.
“이 잔인한 새끼들!”
대머리 녀석이 이를 갈면서 우리를 흘겨봤다.
흠,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역시 아저씨를 쓰는 것은 너무 심했나 보다.
그냥 적당히 몇 대 갈길걸…….
“너희들 말인데, 정체가 뭐냐?”
아저씨는 꿋꿋이 엉덩이를 내밀며 대머리 녀석에게 물었다.
아저씨의 엉덩이와 마주하는 상황이라니……. 가능하면 절대 그런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다.
“빨리 말 안 하면 또 뀐다?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응. 저 말만은 나도 보장해. 어서 말해.
슬슬 우리한테도 구린내가 퍼져서 짜증나거든.
“아, 알았어요.”
대머리 녀석은 사색이 되어서 그대로 줄줄 불었다.
“저흰…… 사실…….”
“빨리 말해! 다음엔 똥 방귀야!”
아저씨의 엄포에 녀석들은 모두 울상을 지었다.
“저희는 사실 스캐빈저예요.”
스캐빈저…….
크윽, 예전에 거북악어 사냥할 때가 생각나네.
그때 거북악어의 등껍질을 아주 보기 좋게 도둑 맞았…… 잠깐만……. 서, 설마?
“너희였냐?”
깜짝 놀라 던진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아저씨도, 호규도 내가 한 말을 듣고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서, 설마?”
호규는 후드를 바로 고치며 황당해했다.
“끌끌끌!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주저 말고 밀어라.’라는 말대로 됐군.”
아저씨는 엉덩이를 조금 더 가까이 갖다 대며 눈알을 부라렸다.
“그런 말 없어요. 지어내지 마세요.”
일단 아저씨를 녀석들에게서 떼어 냈다. 아저씨가 떨어지자 녀석들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대머리는 한 풀 기가 꺾여서 의외로 시원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녀석들 말에 따르면 4인조는 ‘불타는 고구마’란 이름으로 활동 중인 팀이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취업 대신 헌터 일을 선택. 그러나 막상 경험해 보니 생각보다 위험하고 힘들어서 사냥은 중도 포기한 것이었다.
현재는 스캐빈저로 전락.
“저번에 너무 무방비하셔서 이번에도 잘될 줄 알았어요.”
거북악어의 등껍질은 이 녀석들 소행이 맞았다. 그리고 이번엔 우리가 쌍두하피를 잡는 것을 보고 이런 장난 같은 짓을 한 것이었다.
이런 망할 녀석들! 남은 목숨 걸고 일하는데, 편하게 이득을 챙겨?
용서할 수 없다.
크윽, 한국인의 DNA에 잠들어 있는 ‘갑질을 하고픈 잠재적 욕망’이 깨어난다!
“잘못했어요.”
쌍둥이가 동시에 용서를 빌었다.
녀석들 말에 따르면 대머리 남자가…… 겨우 20살?
어……. 진짜로?
산발 머리가…… 19살, 그리고 쌍둥이가 18살이라고?
우와, 이걸…… 때리면…… 안 되겠지? 이것도 철컹철컹인가?
아저씨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대머리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감히 어른들 밥줄을 건드려? 너 이 자식,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뭔 줄 알아? ‘정색’한 아저씨들이야! 세상의 매운맛, 쓴맛, 신맛, 짠맛, 단맛을 보여 줄까?”
웬 단맛?
그리고 저 아저씨 아닌데요. 어디서 은근슬쩍 ‘들’을 붙이세요?
이 ‘아저씨’가……!
“경찰에 넘기죠.”
내 말에 대머리 일당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아저씨한텐 자식, 나한텐 한참 어린 동생뻘이다. 그러나 이 자식들이 저지른 죄의 액수는 그냥 봐주자고 하기엔 너무 크다!
“안 돼. 안 봐줘. 봐줄 생각 없어. 끌끌끌!”
아저씨는 좋아서 녀석들 주위를 빙빙 돌았다.
“저희도 이런 일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먹고살려고……."
산발 머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자 거기에 더하려는 듯 대머리가 외쳤다.
“저희도 알고 보면 불쌍한 놈들이에요!”
아저씨는 그 말에 발끈하여 소리쳤다.
“닥쳐! 뭐야? 너희도 ‘알고 보니, 불쌍한 놈들이었어.’ 부류냐? 우웩!”
아저씨는 헛구역질을 하며 더욱 소리를 높였다.
“그럼 알고 보면 불쌍한 놈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용서해 줘야 한다는 거냐? 성범죄자, A급 전범, 연쇄살인마, 사이비 교주, 매국노가 ‘알고 보니 불쌍한 놈’이면 용서해 줘야겠네? 그렇지? 법이고 제도고 다 무슨 소용이야? ‘알고 보니 불쌍한 놈’이면 다 용서해야지. 안 그래? 요즘은 불쌍하면 면죄가 되나 봐? 그렇게 따지면 나도 ‘알고 보면 불쌍한 놈’이야!”
어이쿠, 아주 제대로 비꼬시네.
한바탕 비판 폭풍이 지나간 후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아저씨 눈치를 보며 슬며시 호규에게 물었다.
“호규 씨도 이의 없죠?”
“네.”
일단 우리 짐을 모두 아저씨에게 몰아 준 후 나와 호규가 함께 녀석들을 붙들었다. 함께 묶어 놓았지만, 만약의 경우 발을 맞춰 도망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출발!”
우리는 팀 ‘불타는 고구마’와 함께 산을 내려왔다. 출입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일행은 우리와 함께 온 이 어린 범죄자들의 진실을 듣고는 크게 화를 냈다.
특히 최향자가…….
말을 말자.
자취방을 나오며 어깨를 폈다.
정식 헌터로서의 첫날, 지갑에 든 자격증의 무게가 새삼 남다르게 느껴졌다.
헌터 협회 한국 지부 소속 정식 헌터 김상팔.
그것이 바로 합격 통지서 속 내용이었다. 지갑이 든 왼쪽 가슴을 문지르며 흐뭇함에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하! 역시 사람은 명찰이 전부라니까!”
자랑스러운 신토불이 한국인, 간판 하나에 세상이 달라 보인다.
얼마나 열심히 해서 딴 자격증인가?
게다가 시험 도중에 웬 흉악범 둘이 난동을 부리기까지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쉽게 이룬 것이 없다.
정식 헌터의 가장 큰 장점은 협회에서 주는 일거리와 헌터세의 인하를 뽑을 수 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협회에서 받은 의뢰다.
“향자 누님한테선 연락 없나?”
스마트폰을 꺼내 우리 팀원들과 검은 과부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일단 전원 송신, 하지만 불참할 사람도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오늘 할 일거리는 비교적 보수가 적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안전한 일이다.
드래건 사냥 의뢰처럼 괜찮은 일거리는 협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헌터 팀만 받을 수 있다.
아직 우리 팀은 정식 등록을 하지 않는 상태.
우린 여전히 팀 이름으로 고심하고 있다.
버스 정거장에 서서 버스가 오는 동안 하나씩 답장이 도착했다.
의외로 한돈 아저씨가 가장 먼저 참석을 알려 왔고, 목적지에서 따로 합류하기로 했다.
두 번째인 루호도 목적지에서 따로 합류.
호규는 밀린 공과금을 내기 위해 불참했다.
유정은 버스 정류장에서 합류.
이렇게 우리 팀에선 총 3명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검은 아씨들은 최향자와 박유화가 참가, 장마리는 불참.
장마리가 없는 것은 좀 아쉽다.
“유정 씨하고 단둘이 버스라…….”
비니를 깊숙이 눌러쓴 유정은 환한 미소와 함께 걸어왔다.
오늘은 두건이 아니군.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우리는 멋쩍게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예상보다 빨리 버스가 도착해서 우리의 어색한 순간은 짧게 끝났다.
우리는 맨 뒤에서 두 번째 좌석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봤다.
“호규 씨는 왜 하필 오늘 공과금을 내는 거야? 혹시 일부러 나오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건가? 음, 그럴 사람은 아닌데…….”
사실 호규가 오지 않았단 사실보단 아저씨가 참석했단 것에 더 의아스러웠다.
이번 일은 수전노인 아저씨에겐 그다지 수지타산 맞는 일이 아니다.
“아저씨…… 사고 치시면 안 되는데…….”
이번 일은 어떤 괴물의 신체 일부를 채취하는 일, 채취한 것은 반드시 관리인에게 넘겨야 한다. 문제는 아저씨 성격상 몇 개 정도는 충분히 밀반출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아저씨께 오지 말라고 할까?
고민이 된다. 딱히 치료술이 필요한 일도 아니고, 특별한 경험이나 경력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그야말로 허드렛일. 다음부터 팀원들에게 연락을 할 땐 조금 간추려서 해야겠다.
아아, 아저씨…….
어느덧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이 정거장에서 내린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정거장 주변은 평평하고 잔디가 쭉 깔려 있는 초원이었다.
헌터 자격 시험 중 내가 본 유정의 첫인상은 그냥 ‘왠지 희대의 기둥서방일 것 같지만, 그건 그냥 내 부러움이 낳은 오판일 뿐이겠지.’ 정도였다.
여자보다 더 가냘픈 체형에 어딜 가나 여성들을 달고 다니는 인기, 아무리 생각해도 헌터로 보이지 않았다.
모델 같은 직업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 나도 꽃미남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환생하거나 차원 이동해서 절세미남 되면 안 되나?
그건 좀…… 구식이겠지?
양손으로 볼을 주무르며 입을 쩝쩝거렸다.
자신이 한 번도 못생기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잘생긴 얼굴도 아니다.
대학교 때 딱 한 번 사귀어 본 여자 친구도 같은 과 후배, 아는 선배가 적극적으로 소개시켜 준 아이였다. 그나마도 나중에 여자 친구가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다.
그것도 1학년 후배랑…….
“역시 남자고 여자고, 어린 게 최고인 건가…….”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론 매일이 술이었다. 그냥 차인 것도 아니고, 바람피워서 차인 건 정말 상상 이상으로 충격이 컸다. 하지만 덕분에 같은 학과의 술고래 선배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물론 그중에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는 없지만…….
가볍게 사귀면 가볍게 끊어지는 것이 사람 관계인가 보다.
“아……. 갑자기 카메라 생각나네. 토 나온다.”
촬영용 카메라는 엄청 무겁고, 무지하게 비싼 현대 문명의 정점.
지난번 헌터 팀 ‘세손가락’과의 사냥에서 잃어버린 카메라값을 변상하느라 저축해 놓은 돈을 전부 날린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물론 그 일을 계기로 오늘 이 자리까지 온 거지만…….
초원 여기저기에는 목장들이 줄지어 있었고, 각 목장에는 말들이나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노닐고 있었다.
“설마 소젖을 짜거나 말을 모는 건 아니겠죠?”
유정이 경치 구경을 하면서 농담을 던졌다.
“글쎄요? 하고 싶어요?”
“하하하.”
우리는 느긋이 산책하는 기분으로 목장들 사이를 지나갔다. 가는 도중 뒤에서 뛰어온 루호가 합류, 우리 셋은 풀냄새와 함께 풍겨 오는 가축들의 똥 냄새를 맡으며 어느 목장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