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75화
남자들끼리 뭘 부끄러워하는가 싶지만, 왠지 아저씨의 얼굴에 조롱이 묻어나 있어서 꺼림칙하다.
“가,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해요? 저 여기서 샤워하는 거 뻔히 알면서……!”
“끌끌끌! 미안, 갑자기 중요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그리고 너무 부끄러워할 거 없어. 어차피 개들 ‘것’보단 작잖아?”
이게 뉴스에서 말하던 그 동성희롱이구나! 머리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찌릿함이 느껴지며 몸이 절로 쪼그라들었다.
“그, 그래도 평균은 되는데……요.”
찬물 샤워라 쪼그라든 거거든요?
“끌끌끌!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고, 어떠냐? 감이 좀 잡혀?”
“아니요.”
감은 개뿔! 아무것도 모르겠다. 역량의 차이? 그런 것을 많이 느낀다.
난 아무래도 삼류도 안 되나 보다.
“모르겠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개들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개들을 제압하라니…….”
말이 쉽지, 이건 그냥 ‘정치를 하되, 청렴결백하게 해라!’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아저씨는 풀이 죽은 나에게 다가와 내 머리를 주먹으로 툭툭 두드렸다.
“역시 넌 머리가 너무 딱딱해. 생각을 잘하려면 조금은 부드러운 게 좋은데 말이야.”
이건 또 뭔 개소리시지?
“그러니까 아저씨 말씀은…… 제가 너무…….”
딱딱하게 생각한다? 너무 어렵게 보고 있다고?
“그래. 넌 너무 고지식해. 가끔은 그냥 몸을 맡겨 봐. 세 달씩이나 했으면 이제 슬슬 눈치챌 때도 됐잖아?”
“뭘요?”
알려 주실 거면 그냥 속 시원하게 알려 주세요!
아저씨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한 만큼은 알려 줬다. 이 이상은 알려 주지 않는다.”
응? 이, 이 아저씨가 지금 누굴 놀리시나!
“쳇! 알려 주기 싫으시면 아예 말씀을 마세요.”
“끌끌끌! 이렇게 놀리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놀리겠어? 명심해라, 누군가를 약 올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타이밍이야!”
인생은 타이밍…….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정말 명언이다.
저녁은 변해라가 만든 ‘검은 카레’다.
먹물? 일단 조심스레 입안에 넣었다.
“오옷!”
입안에 바다가? 혀 밑에서부터 목구멍 뒤쪽까지 바다가 밀려온다.
그야말로 바다의 맛, 특급요리사도 한 방에 즉사시킬 정도의 맛이다.
“퉤엣!”
아저씨는 카레를 보기 좋게 뱉은 후 라면을 가지러 일어섰다.
변태신은 딸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좋게 이야기해서 바다의 맛이지. 이건 그냥 비린내 더하기 짠맛, 그리고 역겨움이 섞여 있다. 바다를 졸였니?
저녁 식사에서 살아남은 후 잠자리에 누워서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저씨는 발상의 전환이나 동물적 감에 의지한 해법을 말씀하신 것 같은데…….
사실 요 세 달 동안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지냈던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작전을 생각해 내서 실행했고, 모두 처절하게 실패했다.
일단 그동안 했던 작전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는 조련 시작 1주째.
H력을 풀 파워로 뿜어내며 모든 신체 능력을 강화시켰다. 증가된 힘으로 개들을 하나하나 떼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특수복의 불편함 때문에 속도가 저하된 것이 큰 방해로 작용하고 말았다.
한 마리를 떼어 내면 두 마리, 두 마리를 떼어 내면 세 마리, 세 마리를 떼어 내면 네 마리가 달라붙었다.
결국 H력 고갈로 인한 졸도로 인해 실패.
두 번째는 조련 시작 2주째.
이번에도 H력을 풀 파워로 뿜어내며 모든 신체 능력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첫 번째와 달리 속도에 집중, 어떻게든 개들을 따돌릴 생각이었다.
처음엔 계획대로 되는 것 같았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돌 때까지만 해도 개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고, 체력에도 자신 있었다. 그러나 다리가 걸려 넘어지면서…… 망했다.
결국 살아 있는 개 껌 신세가 되면서 실패.
세 번째는 조련 시작 1달째.
이번엔 미스터 블레이드에게 썼던 무광탄을 쓰려고 했다. 어차피 개들이 무는 공격은 특수복에 의해 차단, 무게중심만 잃지 않으면 문제없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개들의 몸값. 설사 위험용으로 쏜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개들이 다치면…… 파산…….
결국 개인 파산 우려로 실패.
네 번째는 조련 시작 1달하고 2주째.
이쯤 되니까, 개들한테 씹히는 것에 무감각해진다. 역시 뭐든 하다 보면 익숙해지나 보다. 이때 쓴 작전은 미스터 타이거가 쓴 H력의 물질화였는데…….
처음엔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물질화를 완성하려는 중간에 개들의 방해가 너무 거셌다. 실전에서 쓰려면 미스터 타이거처럼 빠르게 물질화를 맞춰야 했다.
결국 재능이 없어서 실패.
다섯 번째는 조련 시작 2달하고 1주째.
유니콘 때처럼 사슴으로 변신하려고 시도했다. 그때의 기억과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개들에게 물리는 와중에도 계속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내 몸에 흐르는 H력은 루호의 것이 아닌 한돈 아저씨의 것. 겨드랑이 털이 잠시 하얀색으로 물들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더 큰 문제는 능력을 해제하고 H력을 다 소모해도, 겨드랑이 털 색깔이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단 것이었다. 덕분에 세 사람으로부터 ‘새치 겨드랑이’라고 놀림받았다.
이렇게 무의미한 세 달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삼류가 세 달이라고 했는데…… 젠장…….”
“드르렁! 크르렁!”
옆자리의 아저씨 코 고는 소리에 귀가 따갑다. 내 속도 모르고 맛나게 주무시는 아저씨…….
고개를 돌려 아저씨의 얼굴을 바라봤다.
“완전 무방비시네. 누가 업어 가…….”
잠깐, 무방비? 무방비!
갑자기 머릿속에 전기가 흐른다. 찌릿한 감각, 그리고 묘한 쾌감. 사과에 머리를 맞은 뉴턴이 빙의한 것 같다.
“무방비다! 무방비야!”
이런 개새……! 이 개자식들! 두고 보자! 내일 증명하겠어!
너무 기쁜 나머지 담요를 뻥 차 버린 후 제자리를 뛰었다.
유레카를 외치며 알몸으로 마을을 돌아다닌 아르키메데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조용히 해!”
뒤통수로 베개……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날아와 부딪쳤다. 묵직하고, 아프다. 기쁨에 정신이 팔려 있던 머리가 이번엔 고통에 몸부림쳤다.
“끄으으윽!”
머리를 붙잡고 바닥에 웅크렸다. 엎드리고 나서야 머리로 날아온 물체가 아령이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미친……! 사람을 죽이려고?”
이를 갈면서 아령이 날아온 방향으로 눈을 흘겼다.
한돈 아저씨와 변태신 아저씨가 주무시는 옆자리의 침대. 거기서 상체를 일으킨 변해라. 그녀의 호랑이 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내 등을 비껴가며 변해라의 얼굴 바로 아래까지 미쳤다. 그리고 어둠이 드리워진 변해라의 눈빛은 당장에라도 날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조용히 자.”
변해라는 딱 그 한마디만을 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체를 눕혔다.
젠장.
다른 건 몰라도 눈싸움만큼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어째 내 주변엔 유독 저런 사람이 많을 걸까?
너무 불공평하다.
“주무세요.”
나도 모르게 소곤소곤 말하며 자리에 누웠다.
‘주무세요.’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비굴하고, 한심하다. 아저씨였다면 오히려 더 큰소리를 내며 난리를 치셨겠지?
물론 그것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그렇게 하면 좀 후련해지지 않을까 싶다. 자존심과 민폐, 그리고 예의와 굴욕. 어떻게 보면 인간이란 항상 묘한 양면성을 내재하며 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상체를 세운 후 쫙 기지개를 켰다. 어제보단 덜 상쾌한 아침, 퀴퀴한 냄새와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핸드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언제나 똑같은 오전 5시. 침대 2개는 이미 비어 있다. 농장 주인인 변태신과 그의 딸 변해라는 훨씬 전에 일어나 개를 돌보러 나간 것이다.
“아저씨, 일어나세요.”
아저씨를 흔들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코만 골 뿐,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럴 땐 아저씨를 깨우는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 어째, 매일 아침이 ‘복사, 붙여넣기’냐?
“식사하세요.”
“끼요요옷!”
돼지 멱따는 소리와는 다른 기괴한 소리.
푹 자고 있던 아저씨는 괴성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는 동작도 소리만큼이나 평범함의 영역을 초월, 이젠 무슨 싸구려 CG영화 같다.
아저씨는 누워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몸을 허공으로 띄운 후 그 상태에서 630도 회전 후 제자리에 착지했다.
“밥!”
아저씨는 연신 ‘밥’을 외치며, 사무소를 나갔다.
“하아.”
난 혼자서 아저씨와 내가 잔 자리를 정리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오늘로서 이 지겨운 나날과 작별이다!
아침 식사는 야외에 있는 탁자에서 간단하게 한다. 오늘 메뉴도 잼 바른 토스트. 역시나 다들 잘 먹는다.
식사를 간단하게 마치면 오늘도 변함없이 ‘조련’ 시작!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맨몸이다. 물론 맨살은 아니다. 문명인으로서 옷은 입고 있다.
당당히 걸어 운동장 가운데에 서고, 변해라가 개들을 이끌고 날 둘러싼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너, 나보다 한 살 어리잖아? 근데 왜 꼬박꼬박 반말이야?”
내가 만만하니?
“만만한데?”
와, 양아치네. 변태신 아저씨가 딸 교육을 잘못하셨어!
“이번에 내가 성공하면 앞으로는 깍듯하게 오빠라고 불러라?”
변해라는 피식 웃으며 개들에게 손짓했다.
“공격!”
동의한 걸로 생각할게.
“하아아압!”
개들은 달려들고, 난 전신에 힘을 줬다. H력으로 전신을 강화.
그런 다음 나에게 덤벼드는 개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손바닥을 날렸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개들의 따귀를 때린다. 개들 몸값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자잘한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주먹으로 때리거나, 발로 차는 게 더 효과적이지만…… 그래도 파산은 무섭다.
“깨갱!”
1초에 두 대.
태어나서 이렇게 빨리 손을 휘두르는 것은 처음이다. H력은 오로지 팔과 눈에만 집중. 오로지 개들의 따귀만을 노려, 일절의 접촉도 허용하지 않는다. 물리지만 않으면 된다!
“낑!”
“깽!”
“깡!”
크기에 상관없이 따귀를 맞은 개들은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애초에 이 녀석들은 정말로 내게 덤비는 것이 아니다. 녀석들에게 난 그저 장난감, 놀이 상대다. 그러니 이 정도의 충격으로도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겨우 이런 녀석들에게 그동안 농락당했다니……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하앗!”
사선을 넘나들면서 쌓은 감각.
정신 집중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정신 집중, 정신 집중, 정신 집중……!
몸이 비명을 지르면서 관절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근육이 당겨지고, 뼈가 뻐근할 때쯤 수십 마리의 개 중 남은 것은 10마리. 눈물이 날 만한 성과다.
남은 개들은 쉽게 달려들지 못하고, 거리만 유지한 채 내 눈치를 살핀다.
“덤벼!”
쐐기와도 같은 고함.
목청이 터져라 힘껏 질렀다. 그러자 개들은 다른 개들이 도망친 방향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다.
“하하하……. 그래, 도망쳐라…….”
해냈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도 함께 풀렸다. 엉덩이에 흙이 묻어도 개의치 않는다. 그냥 땅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어때?”
처음부터 끝까지 날 지켜보고 있던 변해라에게 자신만만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