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82화
“오래전 헌터 랭킹 상위권끼리 팀을 짜서 외국으로 원정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거든? 당시엔 한국 지부가 막 생긴 때라 지금이랑은 실력이나 장비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였대. 그런데 그 원정 사냥에서…….”
한국 지부가 막 생겼을 때면 약 50여 년 전, 혹시 이게 아저씨의 기억에서 본 그 눈 덮인 산맥?
“그때 사냥하러 간 괴물 이름이 혹시…… 블리자드래곤 아니에요?”
‘어, 형 말이 그거야!’ 딱 그 대답이면 모든 게 들어맞을 일이다.
그러나…….
“그건 이 형도 잘 모르겠다. 나도 어떤 할아버지한테 들은 거라…….”
여기도 할아버지? 도대체 언제 일어난 일이야?
“하여튼 그 사냥에서 ‘안 타는 쓰레기’가 유명해진 모양이야. 정말 조심해야 돼.”
다움 형은 한광일이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아저씨에 대한 경고를 하고는 세손가락의 다른 두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야호! 그럼 우린 빌려주는 거지?”
박유화는 끈덕지게 또 장마리를 끌고 와 무기 주변을 기웃거렸다. 얜…… 참…… 질리지도 않네. 이 고소한 인절미 같은……!
“끌끌끌! 너희는 내가 꺼리지 않냐?”
아저씨는 양손으로 배를 주무르며 만족스럽게 물었다.
“별로 상관없어. 미신은 안 믿거든. 언니가 그랬어, 아저씨랑 팀을 짜면 반드시 전멸한다며? 근데 상팔이는 잘만 살고 있잖아?”
헉! 팀을 짠 상대가 다 죽어서 소문이 안 돌았구나? 이 아저씨…… 여러 가지로 대단하시네. 말 그대로 참 ‘가지가지’ 하신다!
“상팔아.”
아저씨의 부름. 딴생각 중이었던 중이라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
“남는 거 빌려줘라. 이 녀석들은 자격이 충분해, 끌끌끌!”
그 자격을 왜 아저씨가 마음대로 정하…… 하아, 됐어. 말씨름하기도 지겹다.
“그러세요.”
“고마워, 아저씨!”
박유화는 장마리와 같이 신나라 무기를 골랐다. 꼭 무슨 바겐세일 하는 명품 가게에 온 표정, 역시 공짜 싫어하는 사람은 없구나. 그런데 왜 아저씨한테만 감사하는 거야?
박유화와 장마리는 각각 산탄총 한 정씩을 빌려 갔다. 제일 비싼 물건을 잘도……! 이 값은 나중에 톡톡히 받아 내겠어.
지금은 나이트윙 사냥 성공만을 생각하자. 소문만 믿고 아저씨를 배제하기엔……. 아저씨의 치료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전투에 불필요한 개인 짐과 탄환, 그리고 기타 용품은 모두 한데 모아 불타는 고구마가 멜 배낭에 넣었다.
녀석들에게 지게 할 배낭의 크기는 한돈 아저씨가 멘 것과 동일한 크기. 높이 160에 너비는 80, 내용물은 대부분이 금속. 무게는…… 완전군장보다 배 이상으로 무거울 것이다.
불타는 고구마는 일단 명목상의 팀장 오박이 20살, 다른 팀원들은 그 이하다. 산발 머리인 김미수가 19살, 단발머리 쌍둥이는 18살로 무려 주아란과 동갑이다.
새삼스럽지만, 아란이 언니인 주아라와 꽤 나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 놀랍다. 주아라가 나랑 동갑이니까……. 아란네 부모님께서 금슬이 참 좋으신가 보다.
쌍둥이의 경우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헤어스타일, 심지어 옷까지 똑같은 것을 입어서 머리색으로만 구별할 수 있다.
본인들 말에 따르면 보라색이 아미니, 노란색이 아미리라고 한다. 아마 일부러 염색을 한 모양이다.
오늘 알게 된 사실인데, 넷은 의외로 능력자였다. 즉, H력을 갖고 있다는 뜻! 그럼에도 지난날 갱벌레한테 쫓겼단 사실이 참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게 만들었다.
“너무 무거워요! 이건 비인간적이라고요!”
오박이 비틀거리며 울먹였다. 여자애 셋은 아무 말 않고 잘만 들고 있는데……. 이 자식이! 어디 한번 ‘남자’답지 못한 걸로 지적받는 남자의 기분을 느끼게 해 줄까?
“좋은 말로 할 때 들어.”
최대한 절제해서 오박을 압박했다. 이런 말은 보통 아저씨 전문이지만 너무 오냐오냐해 줘서 좋을 일 없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게 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쳇! 제까짓…….”
투덜대려던 녀석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녀석들 앞으로 대검을 멘 최향자가 슥 나타나 섰다.
“똑바로 해. 안 그러면 끝나고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충성!”
웬 경례? 불타는 고구마 4명은 최향자를 향해 무려 경례를 했다. 저번 쌍두하피 사냥 후 받은 정신교육이 상당히 혹독했단 증거로 보인다.
그때 최향자가 어지간히 화를 내긴 했다. 무슨 행군 떠나는 병사들을 시찰하는 대대장처럼 최향자는 불타는 고구마 주변을 돌면서 꼼꼼히 녀석들의 행색을 살폈다.
가방끈부터, 자세 하나하나를 지적하는 최향자의 모습을 보니 예전에 군에 있을 때가 생각난다. 그 당시 우리 대대장의 별명은 ‘악마의 자식’이었고, 참 출세욕이 징글징글한 사람이었다.
“좋아.”
최향자가 돌아가고 나서야 녀석들은 허리를 굽힐 수 있었다.
어느덧 출발 시간인 오후 1시 30분. 각 팀들은 준비를 끝내고 정문 앞에 섰다.
드디어 내가 주도하는 첫 번째 연합 사냥이 시작된다! 벅찬 가슴을 안고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외쳤다. 이 사냥이 끝났을 때 이들 중 몇몇은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살아서 봐요!”
다들 쓴웃음을 지으며 정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내가 관리기에 정보를 입력하자 철문이 천천히 움직였다.
6급 사냥 구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흉악한 괴물들이 각 동굴 하나씩을 차지한 ‘동굴산’과 그 동굴산 옆으로 넓게 펼쳐진 새까만 초원.
녹색의 경계를 벗어난 검은 풀들의 낙원인 그곳은 일명 ‘검은 초원’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나이트윙이 서식하는 장소는 검은 초원에서도 가장 안쪽에 해당하는 부분, 걸어서 꼬박 4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가는 것부터가 고역. 다들 긴장된 얼굴로 사냥 구역에 발을 디뎠다.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노래를 부르자. 그러자 몇몇이 따라 부른다. 군가, 전선을 깐다. 정확히는 ‘전선을 간다.’지만, 난 ‘깐다’가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맨 앞에 서서 동료들을 이끄는 길. 바로 옆 동굴산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여기로 돌아오는 데 반년 이상 걸린 것 같다.
이제 난 더 이상 그때의 나약한 보조 헌터가 아니다. 열심히 수련한 덕에 나만의 힘도 가지게 되었고, 함께해 주는 동료들도 잔뜩 생겼다.
내 능력발현은 H력 흡수와 H력 안에 깃든 능력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H력을 흡수할 때 접촉한 상대의 기억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당사자는 내게서 흡수당하는 것만 느낄 뿐, 기억에 관한 부분은 알지 못한다.
기억은 참 대단하다. 극히 단면적인 기억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판단력, 취향, 습성, 관심, 성향, 선악 등등. 5분이면 충분하다.
5분만 봐도 소위 말하는 ‘인성’에 해당하는 부분은 꽤 파악이 된다. 우리 팀 중에 내가 기억을 보지 않은 사람은 한돈 아저씨와 유정뿐이다.
루호의 경우 ‘백구’라고 부르는 사슴과 나눈 추억, 호규의 경우 동료들이 살해당할 때의 끔찍한 경험, 아란의 경우 언니에 대한 동경심 비슷한 감정, 변해라의 경우 아버지와 비교되는 열등감을 알 수 있었다.
100명의 동료가 모인다면, 거기엔 100개의 사연이 모인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이유가 있고, 각자의 목적이 있으며, 각자의 이상이 있다.
서로 마음이 안 맞아 다툴 수 있고, 상대를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하나의 집단이 되기 위한 과정이며, 일종의 성장통이다.
성장통을 두려워하면 더 이상 자랄 수 없다. 그렇기에 난 더 아프고 싶다. 고통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헉헉!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한돈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 짐은 최소한의 것을 제외하고 전부 불타는 고구마에게 넘긴 상태. 그러나 아저씨는 본인 배낭을 끝까지 본인이 멜 것을 고집했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내 말에 아저씨는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러자 아저씨의 머리에서 맺힌 땀이 후드득 날리며 내게로 튀었다.
“으아아아! 더럽게 뭐하는 짓이에요?”
“무겁단 말이야!”
척 봐도 아저씨는 H력을 쓰지 않고 있었다. 사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능력 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의 사냥에서 혹여 H력이 부족해 불상사가 생기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 저랑 배낭을 바꾸실래요?”
내가 미쳤지. 왜 이런 소리가 튀어나왔을까? 순간 ‘아차!’ 싶었다.
“끌끌끌!”
아저씨는 ‘하, 이때를 노렸어!’란 표정을 지으며 휙 배낭을 벗어서 내밀었다.
자기 몸집만 한 배낭을 저렇게 가볍게 다루는 아저씨를 보자, ‘내가 속은 건가?’란 생각이 들었다.
“메!”
아저씨와 배낭을 바꿔서 멘 순간 나는 크게 후회했다.
일단 첫 번째로 배낭 뒷면과 등이 닿을 때 너무나 축축했고, 두 번째로 아저씨의 배낭은 정말, 정말, 정말 무거웠다. 무슨 바위를 짊어진 것 같다.
“크으으읍!”
하는 수 없이 H력을 내서 몸을 지탱했다. 이런 걸 H력 없이 계속 메고 다니는 아저씨는 사람이 아니야!
“무겁지? 내가 다른 힘은 없어도 메는 힘은 좀 하거든. 끌끌끌!”
아저씨는 내 배낭을 멘 채 내 앞에 서서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아이고,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네. 어깨가 참 가벼워!”
전 체증이 쌓일 예정입니다! 이를 갈면서 최대한 다리를 움직였다.
선두에 선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뒤로 쳐지면 맨 꼴찌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초원에 난 풀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가끔 키 작은 나무가 보였지만, 나무도 색깔은 검은색. ‘검은 초원’이란 이름에 걸맞게 사방이 검었다.
“이런, 해까지 지는군!”
아저씨가 초원 저편을 가리켰다. 초원 저 멀리 방벽이 보이고, 그 방벽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검은 초원 안쪽에 위치한 바오밥나무 숲.
일반적인 숲과 다르게 바오밥나무의 거대한 덩치 때문에 각 나무는 띄엄띄엄 서 있었다.
이름은 숲이지만, 실제로는 그냥 바오밥나무가 연달아 서 있는 전시장 같다.
“정지!”
바오밥나무 숲에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 있는 ‘야영장’에서 이동을 멈췄다.
현재 시각 오후 5시 30분, 해가 지는 중이라 사방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싸워요.”
상대는 박쥐형 괴물. 밤에 싸우는 것은 상대한테 유리할뿐더러 우리한테 불리하다.
야영장은 어디에 있든 다 비슷하다.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돔 형태의 구조물. 그 안에는 캠핑을 위한 여러 가지 간이 시설이 있다. 또한 넓이도 넓어, 우리들이 모두 들어가 텐트를 치고 물건을 늘어놓아도 넉넉했다.
완전히 해가 지고, 여러 종류의 빛이 야영장을 밝혔다.
각 팀별로 삼삼오오 설치한 텐트, 그리고 그 가운데 놓인 화구. 30여 명의 남녀가 얽혀서 고된 피로를 푸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아 참, 참고로 여긴 무려 샤워실도 있다! 여자들에겐 참 다행이다.
“어머, 어머! 내가 먼저 씻을 거야. 아무도 들어오지 마!”
여자들뿐만 아니라 여자 같은 한 남자에게도 다행이다. 한광일은 샤워실에 들어가려는 박유화를 밀치며 기어코 자기가 먼저 샤워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뭐야? 남자 주제에……!”
박유화는 이를 갈면서 분노를 담아 샤워실 문을 두드렸다.
“끌끌끌! 사람이 많으니 완전 개판이군.”
아저씨가 내 옆으로 와서 땅바닥에 앉았다. 나도 아저씨를 따라 그대로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