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87화
비웃음을 가장한 도발, 녀석의 상체가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함정? 그러나 최향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뒈져!”
최향자는 분노에 못 이겨 대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대검이 미스터 버드에게 닿기 전 미스터 버드가 뭔가를 뱉었다.
“앗?”
서둘러 두 사람이 있는 나이트윙 위로 올라갔다.
미스터 버드가 뱉은 것은 하얀색 둥근 물체. 아마 기억 속의 내용이 정확하다면, ‘알’일 것이다.
“키키키! 드디어 너도 죽이게 됐어. 드디어 두 놈 다 죽였다고!”
나이트윙의 머리 위에는 좋아하는 미스터 버드와 쓰러져 발버둥 치는 최향자가 있었다.
“저건……?”
최향자의 머리에 뭔가 섬뜩한 것이 붙어 꼬리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저거 그거잖아? 외계인 영화에서 나오는 거? 그 뭐라더라? 페이스 훠궈?
누런색 뱀 같은 몸에 가느다란 열 개의 다리. 보기만 해도 역겹다.
나도 꽤 괴물 공부는 열심히 한 편인데, 이런 건 정말 머리털 나고 처음 본다.
일단 서둘러 최향자에게서 괴물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괴물의 조이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쉽사리 꽈리가 풀리지 않았다.
“그건 절대 못 풀어. 그 녀석은 내 H력을 먹고 자랐거든. 조이는 힘 하나만큼은…….”
어쩌라고? 나 지금 스테로이드 맞은 거랑 다름없는 상태거든? 아니지, 그것보다 훨씬 심각하지!
H력을 발동!
최대한으로 신체를 강화해 단숨에 최향자의 얼굴에서 괴물을 끊어 버렸다. 그러자 미스터 버드의 입이 작게 오므라들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미스터 버드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눈살을 찌푸렸다.
차마 ‘헌한발 팀장이다!’라고는 못 하겠다. 그러면 또 ‘헌한발이 무엇의 약자냐?’란 의문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간단히 이름만…….
“헌터 협회 한국 지부장은 발기부전이다!”
썅!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말이 제멋대로 뱉어졌다. 이, 이건 내 의사가 아니야! 이, 이건…….
망했다.
잠시나마 작아졌던 미스터 버드의 입이 다시 양옆으로 쫙 찢어졌다.
“키키키! 걸작인데? 아주 걸작이야.”
미스터 버드는 박수를 치며 나이트윙 위에서 뛰어내렸다. 다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뭐해? 어서 내려와.”
흠칫. 당황한 나머지, 녀석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젠장, 적한테 지적을 당할 줄이야!
“꼼짝 마!”
기다리던 목소리. 드디어 왔구나!
저 멀리에 있던 바오밥나무 뒤에서 9명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처음에 계획을 짠 협회의 요원들. 박장은 보이지 않았다. 요원들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미스터 버드를 포위, 가장 연장자인 남성이 말했다. 무슨 미란다 원칙 같다.
“미스터 버드.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없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향후 협조 여하에 따라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주어질 수도 있으니…….”
미스터 버드는 남성의 말을 끊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감히 흥을 깨?”
미스터 버드의 입에서 야구공만 한 알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알은 입 밖으로 날아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부화, 그 속에서 말린 형태의 조개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소용돌이무늬 조개는 땅에 떨어진 직후 소용돌이가 위로 솟아오르며 소라 형태로 커졌다.
“쓸데없는 짓을 하다니…….”
요원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품속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겨 미스터 버드를 맞췄다.
총에 맞은 미스터 버드는 풀썩 쓰러졌다. 설마 죽인 거야?
“한심하군.”
요원들의 웃음이 마치 우리를 향한 비웃음처럼 들린다. 기분 탓일까? 요원 하나가 총에 맞은 미스터 버드의 몸에 손을 대 능력으로 치료를 했다. 그리고 녀석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밧줄로 꽁꽁 묶었다.
그사이 우리들도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려 서로를 부축해 몸을 추슬렀다.
“이제 연행하자고.”
미스터 버드가 뱉은 10개의 소라껍데기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흥미로워. 이런 건 일찍이 본 적이 없는데?”
요원 하나가 몸을 굽혀 소라껍데기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소라껍데기를 손가락으로 직접 건드리려는 순간, 껍질 속에서 곤충의 다리 같은 것이 튀어나와 요원의 손가락을 잘랐다.
“으악!”
그것을 시작으로 모든 소라껍데기에서 ‘소라게’로 추정되는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저건 3급 괴물인 소용돌이게. 갱벌레 정도의 크기지만, 실질적인 위험도는 갱벌레와 비교하기 미안할 수준이다.
녀석들은 일제히 뛰어올라 요원들을 노렸다.
점프한 후 소라껍데기 무늬를 따라 빙그르르 회전. 녀석들은 드릴처럼 소라 끝으로 목표를 찔러 반대편으로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H력의 능력 발동으로 인한 육체 강화와 옷 아래 입은 보호복이 무색하게 요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9명이 당하기까지 불과 1분 내외. 보고 있는 우리가 다 허탈해진다.
“키키키!”
미스터 버드는 모두가 쓰러진 가운데 홀로 소용돌이게들 옆에 서 있었다.
놈의 입이 또 쫙 벌려진다.
“멍청이들! 역시 평범한 놈들은 재미가 없어. 겨우 이런 실력으로 날 잡겠다고?”
미스터 버드는 전신에서 아지랑이를 뿜어내며 손가락으로 변해라를 가리켰다.
“가라.”
모두가 방심한 틈을 타 소용돌이게들은 일제히 변해라를 향해 뛰어들었다.
물론 변해라는 바보가 아니라 나름 세바스찬을 이용해 방어하려 했다.
“세바스찬!”
통통 튀면서 이동하는 소용돌이게들을 세바스찬의 뿔과 이빨이 박살 낸다.
소라껍데기가 박살 나고, 으스러지면서 눈 깜짝할 새에 9마리가 죽었다.
“크윽!”
문제는 변해라에게 도달한 한 마리. 녀석의 소라에 변해라의 옆구리가 뜯겼다.
다들 철석같이 세바스찬을 믿고 있던 터라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앗?
“설마?”
놈의 의도를 알겠어. 변해라에게 문제가 생기면…….
“모두 도망쳐!”
하이퍼맨 팀장 노구가 산탄총을 들며 소리쳤다.
그렇다.
중상인 변해라는 정상적으로 H력을 방출할 수 없고, 이는 곧 세바스찬에게 건 능력의 이상으로 직결된다.
노구 앞에 선 세바스찬은 노구를 향해 뿔을 겨누며 침을 질질 흘렸다.
녀석은 이제 고삐 풀린 망아지, 살육을 즐기는 괴물일 뿐이다.
노구는 정상이 아닌 몸으로 능숙하게 산탄총을 발포했다.
역시 팀장은 곧 죽어도 팀장! 다른 팀원들이 너저분한 가운데서도 홀로 일어서 싸우고 있다.
세바스찬은 양쪽 뿔을 중앙으로 휘게 해서 얼굴을 보호했다. 그 덕에 세바스찬의 머리로 쏟아진 산탄은 뿔에 튕겨 나가 사방으로 튀었다.
옆에 있던 마지막 소용돌이게는 그 산탄을 맞고 장렬히 박살 났다.
“젠장!”
세바스찬의 뿔이 노구의 복부를 정면에서 관통, 노구를 꿴 채 그대로 변해라에게 향했다.
배에 뿔이 박혀 질질 끌려 다니게 된 노구는 세바스찬과 힘겨루기를 하는 대신 아예 세바스찬의 몸통에 찰싹 달라붙는 쪽을 선택했다.
“세바스……찬…….”
변해라와 세바스찬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뭘 해야 할지를 깨달았는지 다시 무기를 든 후 둘을 에워쌌다.
아무리 세바스찬이 4급 괴물이고, 우리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빨리…… 빨……리 녀석을…….”
변해라는 세바스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우리에게 애원했다. 그 건방진 변해라가……. 다들 서둘러 세바스찬을 제압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잠깐만! 이럴 땐 마음의 힘을 믿어야 돼.”
엥? 고개를 돌려 이 황당한 소리를 한 사람을 바라봤다.
한광일. 녀석이 갑자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로 그동안 함께 싸워 온 동료잖아? 당연히 서로 우정 같은 게 있을 거야. 왜 그런 말 있잖아? ‘우리 개는 순해서 절대 안 물어요.’ 같은 거……! 뿔개도 이름에 ‘개’가 들어가니까 괜찮을 거야. 내 직감은 틀린 적이 없거든.”
이건 또 새로운 개소리를……! 다들 한광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춤거렸다. 지금 가만히 있을 상황이…….
응?
세바스찬의 주둥이는 변해라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러나 돌연 정지. 가만히 서서 변해라를 바라봤다.
뭐지? 설마, 정말로 교감한 거야?
변해라는 덜덜 떨면서 눈물까지 글썽였다. 반면에 세바스찬은 느긋하게 변해라의 냄새를 맡으며 뭔가 ‘표정’을 지었다.
“안 돼!”
녀석의 눈은 사람의 그것처럼 휘어져 있었다. 그것은…….
“꺄아아악!”
불타는 고구마의 쌍둥이가 서로를 끌어안으며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은 세바스찬이 변해라의 상체를 덮친 것을 보며 경악했다.
“젠장!”
멍청한 한광일 놈! 저 자식 때문에 예전에 죽을 뻔했던 일이 또 떠오른다.
변해라의 상체를 통째로 문 세바스찬. 녀석의 눈이 다른 때와 달랐다.
“세상에…….”
세바스찬의 목덜미에 산탄총을 겨누면서도 내가 본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녀석의 눈이…….
웃고 있다.
말로만 듣던 괴물의 미소.
“기쁜 거냐? 지금까지 널 억눌러 온 녀석을 해치워서……?”
역시 괴물. 덕분에 나도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보통의 산탄으로는 치명상을 줄 수 없으나, 지금 내 총에 들어 있는 것은 예전 드래건에게 쐈던 슬러그탄. 강력한 대구경 총알이다.
총알이 세바스찬의 목을 관통, 거대한 크기답게 목 전체를 비틀며 형체를 일그러뜨렸다.
보통 사람 눈에는 그냥 갑자기 세바스찬의 목이 폭발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세바스찬의 머리는 쉽게 몸통과 떨어졌다. 우리는 세바스찬의 입을 벌려 변해라를 꺼냈다.
변해라는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통째로 뭉개진 상체, 머리부터 배까지 피로 범벅. 이건 옮기지도 못할 수준이다.
“아저씨!”
서둘러 무전기로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는 다급한 내 목소리를 듣고 당장 달려와 주셨다. 그리고 변해라의 치료를 시작했다.
“이런, 이런……. 결국 지 애비처럼 베드엔딩이 됐군.”
아저씨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변해라의 치료에 온 힘을 집중했다.
다른 요원들의 상처도 심한 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변해라보다 심한 사람은 없었다.
“망할 자식!”
미스터 버드는 벌써 모습을 감춘 뒤였다. 결국 녀석을 잡는 데 실패, 나이트윙을 사냥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요원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직 완치되지 않은 몸을 이끌며 미스터 버드를 추적하러 떠났다.
우리는 후방조의 도움을 받아 힘을 회복한 뒤, 나이트윙을 어떻게 옮길 것인지에 대해 의논했다.
몇몇은 수수께끼의 붕대남과 협회 요원들에 대해 떠들었지만, 대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헌터란 직업이 어떤 일을 겪더라도 그러려니 하게 되는 일인가 보다.
다들 그냥 ‘와, 어쩌다가 우리가 플레잉하고 엮인 거야? 짱인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말들을 듣고 있자니 마음 한쪽이 적지 않게 쓰렸다.
“야, 김상팔!”
어깨에 붕대를 감은 한광일이 내 멱살을 잡았다.
“너 얘가, 얘가! 너 알고 있었지? 다 알고 끌어들인 거지? 그렇지?”
화가 나도 말투가 여성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거냐? 뭐, 상관없지. 문일이가 죽은 다움 형의 시신을 배낭에 넣는 것이 보였다.
“좋아요. 전부 다 말씀드릴게요. 사람들을 모아 주세요.”
미스터 버드가 나이트윙과 하나가 됐을 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이다.
설사 그로 인해 내가 돌을 맞더라도……. 내가 감내해야 할 책임, 처음부터 이럴 줄 예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