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88화
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에게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어떤 부분을 감췄으며, 방금 일어난 일이 어떤 상황인지 내 추측을 곁들여 보충 설명을 해 줬다.
“그랬군.”
다들 의외로 순순히 사실을 받아들였다.
뭐, 헌터란 직업이 항상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다 보니 무감각해진 걸까?
겁에 질린 불타는 고구마와 화가 잔뜩 난 반도의 자식들을 제외하곤 특별히 무어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우릴 이용할 수 있어요? 우린 미성년자라고요!”
오박이 버럭 소리쳤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넌’ 미성년이 아니잖아?”
내 말에 오박은 꾹 입을 다물었다. 이번 사냥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반도의 자식들이었다.
9명 중 4명이 사망, 2명이 중상.
소리 높여 항의할 수 있는 것은 팀장인 한광일뿐이었다.
의외로 같은 정면조였던 하이퍼맨은 부상자를 제외하면 사망자 0.
세손가락은 다움 형을 잃었고, 우리 팀은 변해라와 유정이 중상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위자료 삼아 죽은 사람들 몫까지 받아야겠어! 당연히 지불해 주겠지?”
본래 헌터끼리의 관례상 사냥 도중 죽은 자에게는 부조금 이상의 몫을 나눠 주지 않는다.
오죽하면 ‘죽은 에이스보다 산 잉여가 낫다.’란 말까지 있을 정도.
한광일은 그런 관례를 깨고 죽은 팀원들의 몫을 요구하는 것이다. 일종의 입막음 비용이라 볼 수 있다.
“좋아요. 대신 비밀은 엄수해 주세요. 만약 새어 나가면…….”
난 정확히 내가 이해한 대로 모두에게 말했다.
“협회에서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건 다들 원하지 않으시죠?”
‘협회’란 이름에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병 주고, 약 주고. 입막음엔 이게 최고다.
너무 몰아세우면 겁에 질려 배신하고, 너무 풀어 주면 만만히 보고 덤벼든다.
결국 원래 주기로 한 금액보다 조금 더 많은 금액을 주는 것에 전원 동의했다.
문일이는 다움 형의 죽음에 대해 뭔가 항의하려는 얼굴이었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나이트윙을 통째로 옮기기 위해 헬기를 호출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직접 들고 가도 상관없으나, 그러기엔 다들 너무 지친 상태였다.
헬기는 전화로 부르자마자 금방 날아왔다.
역시 돈이 최고구나.
헬기는 주변 바오밥나무 때문에 우리 가까이 오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바오밥나무 숲 경계까지 우리가 직접 나이트윙을 옮겼고, 거기서 로프를 받아 헬기에 연결했다.
“빠이빠이!”
박유화는 멀어져 가는 헬기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헬기가 향하는 하늘 너머로 해가 기우는 것이 보인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또 야영장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서둘러 나가죠.”
각자 짐을 멘 후 서둘러 사냥 구역을 가로질렀다.
처음 입구에서 입력한 사냥 기한은 1박 2일. 시간이 지나면 구조대가 출동할 것이고 그러면 또 추가비용이 발생한다.
계산해 보자.
사냥은 성공, 미스터 버드는 도주.
처음 예상했던 9억이 6억이 될 수도, 3억이 될 수도 있다.
무기, 의약품, 기타 도구의 구입비용에 약 1억이 쓰였다. 절반은 내 예금, 절반은 대출을 받았다.
하하, 대출받을 때 알게 된 사실인데 정식 헌터 자격증이 있으면 대출받기 참 쉽다. 그것도 제1금융권에서!
다음으로 다른 팀에 제시한 보수.
죽은 사람들 몫까지 주기로 했으니까 대략 6억.
하하하, 벌써 적자네. 거기다가 우리 팀원들도 있으니…….
망했다.
애초에 왜 9억을 고스란히 다 받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이런 얼간이, 등신……! 무려 1억이나 마이너스다.
하하. 내일부터 노숙자 신세인가? 가슴속에서 피눈물이 흐른다.
이런 게 바로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다.’인가? 사냥은 성공했으나 결과적으로는 파산. 내 손에 남을 것은 돈이 아니라 원망과 빚 독촉이다.
미치겠네.
“그나저나 말이다.”
뜨끔! 수전노 한돈 아저씨가 대뜸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설마, 내 마음속 소리를 들으신 건가? 아저씨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시지 않을 것이다.
“왜, 왜 그러세요?”
젠장,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시지? 지금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나이트윙 몸값으로 얼마가 나올까? 적어도 5억 이상은 나올 것 같은데?”
앗? 아! 그래! 그걸 잊고 있었구나! 나이트윙 몸값이 있었다. 그게 팔리면 적어도 몇억은 받을 테니까…….
설사 김익조한테 3억만 받더라도 충분하다!
내가 투입한 자금을 전부 회수하기 당장 곤란하더라도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약속한 금액을 줄 수 있다면 만사 오케이!
나머지는 내가 감안하면 된다.
“아저씨! 아저씨는 천재예요. ‘천’하에 ‘재’수 없는 놈이 아니라 진짜 천재요!”
“뭐, 뭐야?”
아저씨가 날 상당히 떨떠름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난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아저씨는 정말 멋진 분이에요!”
“끌끌끌! 그걸 이제 알았어? 너도 참 알아차리는 게 늦구나.”
“네. 맞아요! 전 아직도 알아차리는 게 느린 것 같아요. 앞으로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세요.”
아저씨 배를 두드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역시 아직도 아저씨에게 배울 점이 많다.
최고의 최고 팀장인 모배구도 치료하는 중간중간 아저씨의 치료술을 보며 얼이 빠졌었다. 모배구의 말로는 자기가 아는 치료술사 중에 최고라고 했다.
아슬아슬하게 폐쇄 시간 전에 정문에 도착. 주차장으로 나와서야 다들 늘어지게 쉴 수 있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그럼 약속드린 보수는 협회에서 입금되는 대로 바로 드릴게요.”
다른 팀들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지친 몸을 이끌고 밴에 올라탔다.
유일하게 한광일만 그 돈을 ‘당장’ 내놓으라며 실랑이를 벌였다.
“이런 게 어디 있어? 일 끝났으면 바로 돈을 줘야지? 지금 상팔이가 형 물 먹이는 거야? 어머머, 형이 우스워 보여? 우리 팀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데?”
맞는 말이다. 에이스들이 떠난 반도의 자식들은 초보자와 약자로 채워진 빈껍데기. 그런 사람들에게 전방조를 시킨 게 참 미안했다. 그 탓에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사망하고, 일부는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우리 팀에서 사망자가 안 나온 것은 다행이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다.
“돈 나오면 드릴게요. 저 못 믿으세요?”
“이러면 안 되지! 형이 얼마나 급이 높은데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거야? 너, 이러면 다음부터 안 도와준다?”
하하하, 안 도와줘도 될 것 같은데? 누가 불러 준대?
“적당히 하시지?”
목에 깁스를 한 최향자가 나와 한광일 사이를 갈랐다. 최향자는 정체불명의 페이스 훠궈에 의해 심한 목 부상을 입었다.
“어머나, 세상에! 우리 검은 곰순이가 오빠야한테 인사하러 온 거니? 뽀뽀해 줄까?”
“이 새끼!”
최향자는 허리를 이용해 박치기를 했다. 정확히 최향자의 이마와 한광일의 이마가 충돌. 그 충격으로 한광일은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또 보자.”
최향자는 내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치고는 밴을 타고 떠났다. 역시 검은 곰. 참 시원시원한 사람이다.
아란은 세손가락과 함께 떠났다. 아무래도 다움 형의 죽음을 안 언니 주아라의 상심이 컸기 때문인 것 같다.
세손가락이라는 이름처럼 세 사람은 꽤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절친한 사이였다.
문일과 주아라는 작별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가 버렸다.
반도의 자식들은 구급차를 호출, 밴을 견인해서 떠났다.
운전자가 모두 죽어서 하는 수 없었다고……. 아마 한광일 성격상 구급차 비용까지 달라고 징징댈 것이다.
“하하하! 간만에 즐거웠다. 또 보자, 애송이!”
노구와 하이퍼맨은 피곤한 와중에도 쾌활하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면 베테랑이란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최고의 최고도 떠나고 남은 것은 우리 팀과 불타는 고구마. 오박은 집까지 가는 콜택시를 불렀다.
“형님!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박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게 웬 조화야?
“어? 그, 그래…….”
“혹시 나중에 또 좋은 일 있으면 불러 주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가, 갑자기 개과천선한 거야?
다른 셋은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안 하던 짓을 한다. 쌍둥이는 내 양팔을, 김미수는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빠! 나중에 또 불러 주세요.”
“오늘 즐거웠어요!”
“혹시 심심하면 연락 주세요. 같이 놀아요!”
어린 애들이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어린놈의 자식들! 애들이면 애들답게 굴어야지.”
보다 못한 아저씨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살려 주세요. 아저씨!
“쳇!”
세 사람은 아저씨를 피해 우르르 떨어졌고, 그렇게 불타는 고구마도 주차장을 떠났다.
멀어져 가는 택시 창문을 열고 녀석들은 끝까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어린것들이 벌써부터 돈맛을 알았군. 끌끌끌!”
아저씨는 내 등을 탁탁 치면서 크게 웃었다.
“뭐, 그래도 불법적으로 버는 것보단 노동으로 버는 쪽이 백배는 낫지.”
나도 아저씨 말에 동감이다. 처음엔 싫다고 징징거리더니, 이젠 또 시켜 달란다. 하하하.
“저희도 돌아가요.”
다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밴에 올라탔다. 운전은 내가 했고, 우선 병원에 들러 다친 팀원들을 입원시켰다.
난 나머지 팀원들을 데려다주고 나서 밴 반납까지 한 후 입원했다.
뒤풀이는 치료가 끝나고 모든 팀원이 건강을 회복하면 그때 하기로 정했다. 그나저나 변해라가 걱정된다.
변해라는 육체보단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입은 듯했다.
눈앞이 아른거린다.
나이트윙을 통해 읽은 미스터 버드의 기억. 처음엔 내가 뭘 본 것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차분하게 시간을 들이자 내가 본 기억의 내용이 한 편의 영화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타타타! 오랜만이군.”
흠칫! 미스터 버드의 시야에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바로 미스터 타이거였다.
저 울룩불룩한 근육 바보 자식.
진짜로 탈옥한 건가?
스포츠머리의 미스터 타이거는 근육을 강조하는 탱크톱 차림. 그 옆엔 미스터 터틀도 있었다.
네모난 직사각형 안경을 쓴 미스터 터틀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미스터 타이거를 빼 오는 건 정말 애먹었습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요.”
“타타타! 신세졌다, 미스터 터틀!”
미스터 타이거가 미스터 터틀의 등짝을 세게 후려치자, 작은 체구의 미스터 터틀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이렇게 다 모이는 건 간만이야.”
미스터 버드의 말. 그리고 직후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작은 키, 가느다란 몸매. 그리고 하얀 원피스 차림. 어쩌면 여기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부자연스러운 존재였다.
새하얀 장발이 원피스와 조화를 이루며 고고함까지 내뿜는 소녀. 그녀는 양복 차림 남자와 함께 있었다.
기억이 불안정해서인지 남자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지.”
양복 차림 남자는 옆에 마련된 탁자를 가리켰다. 오각형의 탁자는 각 면마다 의자가 있었고, 다섯은 미리 정해진 듯 알아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미스터 버드를 중심으로 봤을 때 왼쪽부터 양복 차림 남자, 소녀, 미스터 타이거, 미스터 터틀 순서였다.
다섯이 모두 자리에 앉자 갑자기 어두워지며 천장에서 뭔가 홈시어터 같은 것이 내려왔다. 그리고 기계에 불이 들어오며 한쪽 벽을 향해 영상을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