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99화
“잘했어! 이런 식이면 우리 이따가 회식해도 되겠는데?”
아저씨가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말했다. 이 아저씨, 먹는 걸 너무 좋아해!
“이번엔 아저씨가 사시죠?”
“돈 빌려준 대가는?”
헐. 그게 대가였어?
유리 막이 올라가고, 수면 가스로 잠든 뿔개가 우리 안으로 옮겨졌다. 그 뒤 죽은 검치삵들 위에 검은 천이 덮였다.
“괴물은 우리의 이웃! 괴물도 생명!”
응? 가장 낮은 층의 객석에서 20여 명의 사람이 필드를 향해 뛰어내렸다.
손에는 팻말과 깃발, 그리고 문구가 적힌 목도리 같은 것이 들려 있다.
“괴물을 보호하자!”
“문명인답게! 생명을 존중하자!”
소위 말하는 ‘괴물 보호 운동가’다. 쉽게 말해 괴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이름부터가 ‘괴’물인데……. 마치 좀비 보호 운동을 보는 기분이다.
운동가들은 죽은 검치삵 위의 천을 걷어 내며 객석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들은 야만인들이야! 이들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생태계의 일원이라고!”
“당신같이 역겨운 인간들은 차라리 괴물한테 잡아먹히는 게 나아!”
“괴물이 사람만 공격하는 건 자연의 섭리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자들은 모두…….”
세 번째 외침이 끝나기 전, 죽은 줄 알았던 검치삵 한 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안 죽었어? 두 눈을 크게 뜨며 김익조를 쳐다봤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처럼 김익조도 당황한 눈치, 서둘러 직원에게 명령해 필드 위에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신속하게 움직여도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당연했다.
“사람 살려!”
괴물 보호 운동가 한 명이 검치삵의 엄니에 허벅지를 물리고 말았다. 찔린 다리에선 피가 터져 나와 검치삵의 목구멍과 필드 위로 흘렀다.
필드 아래 직원들은 허둥지둥 대며 쉽사리 제압에 나서지 못했다. 직원들과 운동가들의 고성이 고스란히 보는 이들에게 전해졌다.
“동료를 구하고 싶으면 어서 비켜요!”
직원들은 총기를 검치삵에게 겨눴다. 그러나 총구와 검치삵 사이를 운동가들이 가로막았다.
“괴물을 죽이려면 먼저 우릴 쏴요!”
동료가 물린 와중에도 운동가들은 한결같았다. 신념 하나는 인정해 줄 만하다. 단…….
물린 당사자는 진짜 죽을 맛.
“어서 쏴! 날 구해 줘! 어서 이 괴물을 죽이란 말이야! 죽여!”
물린 운동가는 동료들에게 팔을 휘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은 방 안의 TV 화면을 통해 우리에게 생생히 전달되었다.
“어서 비켜요! 당신들 동료가 죽는다고!”
직원의 말에 운동가 중 리더로 보이는 여성이 대답했다.
“괴물에게 죽는다면 괜찮아. 저 사람도 스스로 그걸 원하고 있거든.”
아닌데?
“아니야! 난 살고 싶어. 살고 싶다고! 어서 이 괴물을 죽여 줘!”
그저 어이가 없는 대치.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지 모를 상황이다.
방 안의 직원은 서둘러 ‘벽’을 열더니, 선이 연결된 수화기를 꺼내 김익조에게 내밀었다.
김익조는 수화기를 받아 필드 위 직원에게 직접 말했다.
“유리 막을 덮고, 수면 가스로 전부 다 재워 버려.”
―하지만 민간인…….
김익조는 우물쭈물하는 직원에게 호통 쳤다.
“저건 민간인이 아니야! 저건 ‘방해물’이다!”
―알겠습니다.
직원들은 필드 위에서 철수, 유리 막이 움직여 필드를 다시 덮었다.
“하하하! 어리석은 협회, 우리를 괴물 취급하려고? 너희한테 그럴 권리가 있어?”
리더로 보이는 여성이 TV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왼쪽 눈 아래 눈물점이 인상적이다.
김익조는 직원에게 지시, 여성 주변에 있는 스피커로 수화기를 연결했다.
“잘 들어라. 난 동물 보호 운동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더 이상 위협이 안 되거든. 인간이 다른 생물을 신경 써 주기 시작한 건, 인간이 자연의 힘을 초월하기 시작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뒤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여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TV 화면을 향해 중지를 올렸다.
“꿈속에서 배부른 소리 실컷 하길 바란다.”
김익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필드 바닥에서 수면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기계에 의해 뿜어져 나온 흰색의 가스는 필드 위의 괴물과 사람을 모두 잠재웠다.
“군인들이 어떤 수난을 당했는지 모르는 주제에…….”
김익조는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쉰 후에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놈들을 가둬 놔. 나중에 내가 심문하겠다.”
심문? 김익조의 얼굴 아래로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2번째 시합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어 2시간 동안 휴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나가서 점심을 먹는 김에 유정과 변해라, 그리고 주아라, 아란을 찾기 위해 방을 떠났다.
“유정 씨! 해라야! 아라야! 아란 양!”
바다와 같은 인파 속에서 네 사람을 찾아 간절히 외쳤다. 핸드폰은 넷 모두 전혀 받지 않고 있다.
“그냥 찾지 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아저씨가 내 옷을 잡아끌면서 통로 곳곳에 세워진 노점상을 가리켰다.
“좀 참으세요! 아까 간식도 드시다 말았잖아요?”
“음식이 날 부른단 말이다!”
“그럼 혼자 가셔서 사 드세요! 2시까지 돌아오시면 되거든요?”
“그래도 되냐?”
아저씨는 내 옷을 놓고는 코를 후볐다.
“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예! 정말 괜찮아요!”
“리얼리?”
“예스!”
“아 유 시리어스?”
어?
잠깐만, 이거 무슨 데자뷰 같은데?
“네. 괜찮긴 한데요.”
뭔가 자신감이 빠져서 대답했다.
아저씨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쌩 달려서 인파 속으로 사라……지지 않은 채 독보적 몸매와 존재감, 그리고 거대한 배낭을 무기 삼아 인파를 찢어 가르며 나아갔다.
“살아 있는 공성 망치 같네요.”
루호가 씁쓸하게 한마디 던졌다.
“외모만 보면 비슷하지, 뭐…….”
내 말에 호규가 ‘풋!’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한 번 더 유정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나요?”
“아니.”
“그렇군요.”
“그렇지. 그런데 너 누구……니?”
티라노 대가리?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빈손으로 티라노 인형 머리를 후려쳤다.
내 손에 맞은 김대팔은 살짝 뒤로 밀려날 뿐 쓰러지진 않았다.
“너무하시는군요.”
“왜 따라다녀요?”
저 공룡 옷, 언젠가 꼭 벗길 거야! 김대팔은 공룡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심심해서요.”
“점심 먹으러 안 가세요?”
“점심보단 상팔 씨한테 더 흥미가 가네요.”
와, 이 말을 미녀한테 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아서 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랜 재시도 끝에 드디어 유정이 전화를 받았다! 여전히 전파가 잘 안 통하는지 음질은 최악이다.
“여보세요? 유정 씨, 왜 안 오세요?”
―저희 지금 VIP룸인데요?
이런 썅! 썅썅바 하나를 둘로 나누다가 막대기 두 개가 쏙 빠져서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떨어진 기분이다.
“넷이 함께 있나요?”
―네. 그런데 어디 계세요?
“잠깐 나왔어요. 방 안 탁자에 놓인 간식은 우리 팀 거니까, 드시고 계세요.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우리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도중 아저씨를 찾을까 3초 정도 고민했으나, 그냥 방치하기로 했다.
귀환한 VIP룸에서 우리는 모두 모일 수 있었다.
한돈 아저씨만 빼고.
“어서 오세요.”
다행히 네 사람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 과자를 먹고 있었다.
“그냥 여기서 시켜 먹죠.”
나가서 흩어졌다가 또 못 찾으면 그것도 문제다. 그냥 모인 김에 쭉 함께 다니는 것이 좋다.
다들 별다른 이의 없이 내 말에 따랐다. 우리는 직원에게 받은 메뉴 표로 음식을 주문……했는데, 간식 때처럼 가격이 참…….
“파스타 한 그릇에 5만 원?”
파스타 면발에 금가루를 섞었나?
“스테이크 하나에 10만 원?”
이런 미친……! 당장 투기장만 나서도 축제장 전체가 먹을 것 천지인데, 잘도 이런 미치광이 가격을?
“형.”
루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날 불렀다. 대충 무슨 내용인지 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다.
“내가…… 쏘는 거니까…… 부담 없이 시켜. 하하……하…….”
원래 이런 말은 쾌활하게 해야 받는 사람 입장에서 걱정이 없는데……. 생각과는 반대로 성대는 정직했다.
“그, 그래도 아저씨가 없어서 참…… 다행이다.”
아저씨가 계셨다면 점심 식사로 파산했을 것이다. 피눈물 나는 선불이 끝나고, 직원이 카트에 요리를 담아 끌고 왔다.
다행히 음식은 비싼 만큼 맛있고, 양도 푸짐했다.
“그나저나 좀 이상하네요. 아무리 혼잡해도 갑자기 전화가 안 되는 건…….”
유정의 말에 따르면, 내가 수없이 한 전화 중 실제로 연결된 마지막 시도를 빼면 한 번도 전화가 울리지 않았다고 한다.
“전파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걸까요?”
호규가 파스타를 삼키며 의견을 말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만 계속 안 된 게 정상인가?
“시험 삼아서 지금 한번 해 볼까요?”
유정이 핸드폰을 꺼냈다.
“좋아요. 이번엔 유정 씨가 해 보세요.”
만약 고의에 의해 전파가 차단된 거라면……. 갑자기 예전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다.
유정이 내 번호를 눌렀지만, 내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확실히 이상하네요.”
방 안을 둘러봐 김익조를 찾았다. 그러나 김익조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협회 직원 역시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밥 먹으러 갔나 보네.”
나중에 하면 되겠지?
“저기…….”
공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예?”
“어차피 2시까지는 점심 식사 시간인데, 다 먹고 축제 구경 가면 안 될까?”
흠. 전화가 안 되는 게 좀 걸리는데…….
“여기 위치는 확실하게 찾을 수 있겠어요?”
“저 알아요!”
아란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래. 아란의 저 활기찬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거절했을 때 발차기로 얻어맞을 일이 두렵다.
“그럼 조를 짜서 다니세요. 혼자 다녔다가 미아가 되면 또 찾아야 하니까요.”
“형은 안 나가세요? 같이 가시죠.”
벌써 식사를 끝낸 루호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있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데…….”
솔직히 좀 쉬고 싶다. 계속 구경만 한 녀석이 뭐가 그렇게 피곤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난 계속해서 배팅과 분석을 해 왔다!
아란은 아무런 스스럼없이 루호의 손을 덥석 잡아서 끌었다.
“그럼 루호 오빠, 우리랑 같이 다녀요. 공미 언니가 오빠한테 관심 있대요!”
“그래요, 같이 가요.”
공미는 딱딱한 말투로 루호에게 권했다. 아무래도 공미의 반응으로 봐선 그냥 아란이 농담을 한 모양이다.
“그러죠. 호규 씨는요?”
“전 그냥 여기서 팀장님하고 있을게요.”
결국 나와 호규 둘이서 남게 되었다.
“저도 있습니다.”
아 참, 김대팔도 있다.
우린 각자 소파 하나씩을 차지한 채 무료하게 늘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점심 식사를 위해 나가서 방 안에는 사람이 몇 없었다.
“후후후! 김상팔, 너무 오만방자하지 마라.”
나존귀가 건방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더럽게 비싼 밥을 먹은 김에 한숨 자려고 했더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꺼져 줄래?
“비록 내가 2전 2패긴 하지만, 아직 기횐 3번이나 더 남아 있어.”
응, 아니야. 너 얼마 날렸는지 까먹었냐? 차라리 그 돈을 그냥 나한테 버려 줘!
“예.”
그냥 가라. 제발……!
“난 말이지. 절대 패배를 모르는 몸이야. 어렸을 때부터 쭉 이겨만 왔지.”
생각해 보니까, 이 자식도 정식 헌터가 됐었지? 세상 참 양아치네.
“좋으시겠습니다.”
호규는 내 눈치를 보며 소파에서 일어서려 했다. 일단 손을 뻗어 호규를 말렸다.
“그래. 앞으로 두고 보자고. 우리의 승부는 이제부터야!”
우리의 승부? 누구시죠? 이 자식 개연성을 어디에다 팔아먹은 거야?
나존귀는 그렇게 혼자만의 선전포고를 마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그래, 나가라. 넌 나가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