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101화
“단 스페셜 매치에는 아무나 참가하실 수 없습니다. 오로지 ‘인정’받은 분만 오실 수 있죠.”
“그 인정이 VIP룸에서 5연승인가요?”
“그렇습니다. 일반 객석에선 아무리 연승을 해도 소용없죠. 또한 고작 수십억에 빌빌대는 졸부들도 마찬가집니다.”
어차피 민초란 거냐. 눈물이 앞을 가리네!
어떤 의미에서 스페셜 매치는 검증된 돈줄끼리의 도박. 아무리 합법이라도 찝찝하다.
“그런데 끼려면 판돈이 많아야 하잖아요?”
직원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원하시면 협회에서 ‘무이자’로 빌려드립니다. 스페셜 매치는 말 그대로 ‘스페셜’ 하니까요.”
무이자?
협회는 매 시합마다 수수료를 받으니…… 사실상 그게 이자인 셈이다.
직원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들어와서 배팅을 받은 후 나가고, 다시 시합이 끝난 후 들어와서 계산을 해 주는 반복된 패턴. 은근 귀찮을 것 같다.
“팀장님! 다음 시합에서 이기면 천 삼백만이에요!”
정확히는 수수료 빼고 1304만 원. 그 돈이면 사냥 준비 자금으로 충분하다.
물론 지금 가진 686만 원도 적지 않은 액수지만, 내 다음 목표를 준비하기엔 부족하다. 한 번 더 이기고 손 떼자.
도박은 늪에 빠진 것과 같다. 여기서 탈출하는 방법은 돈으로 발밑을 채우든지, 아니면 죽어서 발견되든지, 그것도 아니면 더 늦기 전에 발을 빼는 것이다.
30분 뒤 필드가 정리되고 네 번째 시합의 괴물들이 올려졌다.
“앗!”
이번엔 차원이 다르다.
오늘 시합에선 익숙한 녀석들이 잔뜩 나왔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나에게는 이 녀석이 최악이었다.
[제4시합 : 드래건 ― 9 VS 불칸 4 ― 1]
드래건. 힘든 거로만 따지면 나이트윙보다 더한 놈이었다. 근데 그 드래건을 잡아왔다고?
“이런 미친…….”
랭킹 헌터들은 진짜 괴물이구나. 드래건 정도의 괴물을 생포할 정도라면…….
고개를 돌려 김대팔에게 물었다.
“혹시 어금니에서?”
공룡 머리는 좌우로 흔들렸다.
“아니요.”
아니야?
“겨우 드래건 따위에 팀 단위로 가진 않습니다.”
뭬, 뭬야? 드래건 따위?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럼…….”
“저희 팀 부팀장이신 한유리 씨가 혼자 잡아오신 겁니다.”
예? 뭐라굽쇼? 혼자서, 드래건을, 그것도 생포?
한유리면…… 헌터 랭킹 5위. 10위부터는 넘사벽이란 말이 사실이구나. 말로만 듣던 파워 인플레!
역시 어금니는 최상의 팀이었다.
드래건 한 마리와 불칸 4마리. 배팅 비율은 무려 9대 1이란 일방적인 수치가 나왔다.
나존귀는 이를 갈면서 서류철을 든 직원에게 소리쳤다.
“난 지지 않아!”
어쩌라고? 직원은 무뚝뚝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딱히 나존귀에게 대꾸하진 않았다.
“배팅을 받겠습니다. 이번에 불칸에게 배팅하시는 분들께는 승리할 시 액수를 4배로 드리겠습니다.”
직원의 선언. 이번에는 다들 신중한 눈치다.
무려 4배. 지금 내가 가진 686만 원이 2744만 원으로 불어나는 기적! 젠장, 갑자기 손이 떨린다.
술렁술렁. 시야가 일그러지며 현기증이 난다. 탐욕과 허망, 그리고 중독.
걸고 싶다. 불칸 4마리라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화면에 또 두 괴물의 모습이 비쳤다.
“앗!”
내가 전에 만난 드래건은 성체가 아니었다. 성체가 되기 직전의 녀석이었다. 그런데 지금 화면에 나오는 녀석은 육각형의 머리 뒤에 가시와 같은 갈기가 잔뜩 나 있다. 즉 성체인 것이다.
성체를 생포했어? 한 번 더 놀라며 전율이 느껴졌다.
상대인 불칸은 내가 잡아서 넘긴 2마리를 포함해 그보다 더 덩치가 큰 개체가 2마리 더 있다.
불칸의 대롱에서 나오는 거품 기관총의 위력은 바위도 단숨에 박살 낼 정도. 4마리가 집중 사격을 한다면 드래건의 비늘도 충분히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분쇄기와 작은 기관총들의 싸움.
드래건의 싸움 방식은 몸에 달린 비늘을 원형 톱날 모양으로 만들어 회전시킨 후 그걸로 상대를 갈아 버리는 것. 한 번 깔리면 그걸로 끝이다.
드래건의 덩치는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두 괴물 사이에는 무려 2단계의 등급 차가 있다.
이쯤 되면 드래건한테 걸지 않는 것이 바보처럼 보일 것이다. 드래건의 비늘은 강철에 필적한다. 하지만 눈과 입, 그리고 비늘의 틈은 일반적인 생물의 것과 다를 바 없다.
불칸의 거품 기관총이 얼굴을 노릴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드래건은 장님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의 시합은 무의미하다.
불칸은 4마리. 이건 진짜 도박이다.
“저기…….”
직원을 부르는 입술이 메말라서 까칠까칠하다.
“배팅하시겠습니까?”
단정한 차림과 깨끗한 얼굴이 참 거슬린다. 처음으로 깨달은 건데, 직원의 외모는 어딘가 삭막하다.
“불칸에게 686만 원.”
“네. 김상팔 님, 불칸에게 686만 원 거셨습니다.”
날 따라 사람들이 우르르 불칸에게 걸었다.
“나도 불칸에 5천만!”
“불칸에 7백만!”
“난 불칸에 1억 2천!”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라붙었다. 그러나 나존귀는 달랐다.
“난 드래건에게 1천만.”
“네. 나존귀 님, 드래건에게 1천만 원 거셨습니다.”
기분이 묘하다. 졌을 경우, 뒷감당이 안 될 것 같다.
배팅이 마감되고, 직원은 또 사라졌다. 그리고 필드 위에 유리 막이 씌워졌다.
“다른 사람들이 좀 늦네요?”
호규는 손가락 끝을 물었다. 걸린 액수가 액수인 만큼 긴장된 모양이었다.
“그러게요.”
이상하네. 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축제장이 너무 넓어서 그런 걸까.
“하아…….”
시작 알람이 울리고, 4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넓은 필드도 성체 드래건에게는 다소 작은 편이다. 드래건은 유리 막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몸을 최대한 쫙 폈다.
혹시 드래건의 톱날 비늘에 유리 막이 깨지진 않을까?
“괜찮을 겁니다.”
흠칫.
김대팔이 날 보며 공룡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 정도로 깨진다면 협회 체면이 말이 아니죠.”
그건 그렇겠지. 지금 강화도에 모인 사람이 족히 100만은 넘을 것이다. 관광, 협회, 치안, 의료, 소방, 정부, 종교 등등 여러 이유로 사람이 모여 있다.
불칸 4마리는 우리에서 나와 넓게 흩어졌다.
게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 곧 자리를 잡은 불칸들은 집게로 몸을 필드에 고정시킨 채 머리 위에 달린 입에서 긴 대롱을 빼냈다.
드래건은 자신을 노리는 4개의 대롱을 천천히 살폈다. 아직 비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영화, 평야의 무법자 마지막 장면. 승부는 순식간에 날 것이었다.
드래건도, 불칸도 서로를 바라보며 숨만 쉬고 있었다.
“왜, 왜 안 싸우는 거야? 어서 싸우라고!”
나존귀가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다들 침을 삼키며 숨소리도 안 내는데, 녀석은 혼자 실성해서 쉴 새 없이 지껄였다.
“내가 얼마를 잃었는지 알아? 어서 죽여 버려! 덩치는 뒀다가 국 끓여 먹을 거야? 드래건, 죽여라! 드래건, 깔아뭉개!”
드래건‘을’? 아니면 드래건‘이’? 조사를 너무 우습게 생략하는구나.
“죽여! 죽여! 어서 비늘로 원형 톱을 만들어서 갈아 버리란 말이야! 꽃게 4마리 죽이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늘 위. 높고 높은 푸른 허공에서 모래를 실은 바람이 곧장 유리 막으로 불어왔다. 모래는 유리 막 꼭대기를 쓸면서 내려와 필드 전체를 덮었다.
필드는 평야에서 황야로 변했고, 전기톱을 든 무법자와 기관총사수들은 점잖게 서로를 노렸다.
야아아아아, 와오와오와오. 야아아아아, 와와아……!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서부영화의 음악. 눈을 쏘느냐, 갈아 버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5마리의 괴물은 몸이 굳은 것처럼 오랜 시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조각상 5개를 필드에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모래바람 때문인지 웬일로 객석도 조용했다. 모두들 이 승부가 단숨에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눈꺼풀 없는 불칸의 눈이 유리구슬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생기 없는 드래건의 눈이 불칸에 비하면 그나마 ‘생물’ 같다.
두 냉혈 괴물은 괜찮건만, 정작 지켜만 보는 사람들의 관자놀이는 흥건하다. 다들 얼굴 옆으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끌끌끌! 686만 원 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갱님!’
왜 환청의 비웃음이 한돈 아저씨 말투로 들리지? 젠장, 너무 리얼해.
1초가 1분처럼 늘어진다. 꼭 액션 장면마다 무조건 슬로우 모션을 집어넣는 액션 영화 같다.
H력으로 동체 시력을 강화한 것도 아닌데, 불칸과 드래건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보였다.
드래건을 겨눈 불칸의 대롱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몸통에서부터 대롱으로 덩어리 같은 것이 불룩하게 이동, 대롱 끝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다.
모래바람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에 반사되는 무지개 빛깔 구체. 거품들이 뭉쳐서 한꺼번에 대롱에서 날아갔다.
4개의 대롱에서 날아가는 수십 개의 거품 총알. 드래건의 머리를 노린 집중 사격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드래건의 머리에 사격의 여파로 일어난 먼지가 자욱했다. 그리고 드래건의 머리는 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일반적인 사격이라면 아무리 총을 많이 쏴도 저렇게까지 진한 먼지 구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거품 총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목표물에 명중한 거품이 폭발하며 생긴 2차 충격, 그것에 주변 공기가 충격을 받으며 더 크게 먼지가 이는 것이다.
집중사격은 최초 발포 이후로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이겼다! 제4시합 끝!”
방 안에 있는 어느 졸부 같은 남자가 검지로 날 가리키며 외쳤다. 왜 나한테 손가락질이야? 손가락을 확 부러뜨려 버릴까 보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김대팔의 침착한 목소리. 말투에서 묻어나는 냉정함 때문인지 웃고 있는 공룡 대가리가 왠지 꺼림칙하다.
“티, 팀장님!”
호규가 드래건을 가리켰다.
“젠장.”
망했다.
머리가 먼지에 가린 상태에서도 드래건의 몸이 움직였다.
드래건은 비늘을 톱날 삼아 하나하나의 단면적인 원형 톱날을 만든 뒤 몸통째로 회전시켰다. 그리고 꼬리 쪽 부분을 휙 휘둘렀다.
드래건은 꼬리를 한 번 휘둘러 무슨 쓰레기처럼 불칸들을 쓸어버렸다.
불칸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드래건의 톱날에 갈려 버렸다.
거품 기관총으로 드래건의 톱날을 쐈다면 좀 더 두고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고정시킨 몸통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와!”
드래건의 머리를 덮은 먼지가 걷히고, 방 안에는 탄식과 감탄이 동시에 터졌다.
“이럴 수가…….”
성체 드래건의 증표. 뒷목에 달린 가시갈기가 드래건의 머리 쪽으로 접혀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설마 저게 저런 식으로 움직일 줄이야…….
바이바이, 686만 원.
[드래건 승.]
내 유일한 계산 착오는 드래건이 성체라는 것.
“가시갈기만 없었어도……!”
유리벽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졌다, 이제 축제는 끝이다.
“팀장님…….”
호규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무게가 천근만근 내 어깨를 짓눌렀다.
“호규 씨. 저 잠시 바람 쐬고 올게요.”
더 있다간 VIP룸 바닥에 몸이 가라앉을 것 같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방을 나왔다.
“한돈 아저씨한테 빌린 돈이었는데…….”
아저씨한테 뭐라고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