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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김상팔-102화 (102/250)

102화

102화

“내가 이겼지?”

나존귀의 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5억 잃고, 2천만 딴 주제에……. 저 자식한테 5억은 용돈 수준인 건가?

통로를 걷는데, 몸이 똑바로 세워지질 않는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호흡이 가쁜 탓. 정신마저 아득하다.

“내 돈…… 내 돈…….”

속이 울렁거린다. 이겼을 땐 전혀 느껴 보지 못한 뒤틀림. 이게 바로 도박의 그림자다.

도박은 나쁜 거예요, 여러분.

“으윽!”

통로에 깔린 카펫이 쓸데없이 푹신하다. 덕분에 걸음이 꼬이면서 내 다리에 내 발이 걸려 바닥에 푹 고꾸라진다.

“추하군요.”

또 누구야? 기분도 더러운데……. 넘어진 채 고개만 들어 상대를 올려다봤다.

김익조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팔 씨 정도 되는 분이 이런 추태를 보이시면 안 됩니다.”

“저 정도라고요?”

나다운 게 뭔데? 아 참, 이 대사는 반드시 ‘너답지 않아!’ 다음에 나와야 하는데…….

김익조는 한쪽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와, 너무 전형적이잖아? 방금 엄청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런가? 괜스레 냉소적이 된다.

“제가 도움을 드릴까요?”

응, 아니야.

“아니요.”

이 손을 잡으면 피똥 쌀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든다.

“상팔 씨만 괜찮으시다면, 제 다음 판돈을 상팔 씨께 맡기겠습니다.”

“판돈?”

이 사람, 점심시간 이후로 방에 없었지?

“높으신 분이 도박을 하셔도 되나요?”

불법은 아니지만, 좀 모양 빠지는 짓 아닌가?

“전 쭉 이겼습니다.”

쭉? 그럼 아까 직원이 말했던 나머지 연승자가 바로 김익조?

“대단하시네요.”

세상은 역시 불공평하다. 저런 사람이 도박까지 잘하다니…….

“비결을 알려 드릴까요?”

비결? 그걸 왜 ‘나’한테 알려 줘?

“뭔데요?”

일단 들어나 보자. 듣는다고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 김익조는 고개를 내밀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전 결과를 미리 알고 있습니다.”

이런 씨발. 방금 말한 ‘불공평’ 취소. 세상은 역시 더럽고 치사하다.

결과가 정해진 시합이라니, 이거 승부 조작이잖아? 당장 신고해서 조작 당사자인 괴물들을 업계에서 퇴출…….

젠장. 이게 만약 돈과 돈의 이해관계로 얽혀 있고, 그 단위가 국가라면…… 신고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역시 상팔 씨는 두뇌 회전이 빠르시군요.”

김익조의 손이 내 어깨 위에 올려졌다. 호규의 손과 다르게 이 손에서는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고, 대신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마지막, 5번째 시합은 ‘진짜’입니다. 이 시합엔 정해진 결말이 없죠. 그래서 상팔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만약 상팔 씨가 이 5번째 시합에서 제 대신 배팅을 해 승리하신다면…….”

“하신다면……?”

나도 모르게 김익조의 말꼬리를 따라했다.

“제 권한으로 스페셜 매치 출입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돈은요?”

저 지금 그딴 스페셜 매치는 관심 없거든요? 전 재산이자, 빚내선 번 686만 원이 날아갔거든요?

“섭섭지 않게 챙겨 드리죠.”

“구체적으로요?”

양복 입고 직함 괜찮다고 무조건 믿으면 안 된다.

“글쎄요. 승리하신다면, 돌려받는 금액의 10%를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호의를 베푸시는 이유는요?”

당신, 유독 나한테만 기회를 주십디다? 달콤한 만큼 의구심이 솟구친다.

“상팔 씨와 우호적인 관계가 되고 싶은 것뿐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나 같은 놈이랑……. 역시 아저씨 때문인가. 나한테 접근해서 아저씨한테 뭔가를 할 작정? 아니면…… 아저씨 자체를 노리는 걸까?

“얼마를 맡기실 건데요?”

방에서 나온 것은 돈을 잃은 충격 때문도 이기도 하지만, 날 따라 돈을 건 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웠기 때문이다.

“글쎄요.”

김익조는 별것 아니란 투로 말했다.

“10억.”

십, 억?

이기면 두 배니까 20억. 수수료를 떼고도 19억. 10%면 1억 9천만 원. 차고도 넘치는 금액이다.

“하겠습니다.”

김익조의 손이 무안하도록 일부러 몸을 뒤로 빼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김익조를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익조의 눈꼬리를 올라갔다. 그리고 김익조의 얼굴이 전체적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하하하.”

김익조는 입으로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나와 마주 봤다.

“그럼 방으로 돌아갈까요?”

“옙!”

우리는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다음 시합을 기다렸다.

필드 위의 특수우리 중 하나만 치워지고, 하나는 교체되었다.

남은 것은 드래건의 우리. 즉, 성체 드래건은 다섯 번째 시합에 연달아 출전하는 것이다.

[제5시합 : 드래건 ― 4 VS 드릴소 2 ― 6]

드릴소!

우리 안에 드릴소 두 마리가 얌전히 있었다.

처음 봤을 땐 손평화와 함께 잡은 녀석들인 줄 알았다. 그러나 TV 화면에 나온 확대된 모습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우리가 잡은 개체와 달리 이 드릴소들은 뿔의 표면이 거칠고, 몸에 흉터가 잔뜩 나 있다. 다른 랭킹 헌터가 잡아온 것이 분명했다.

“배팅하시겠습니까?”

마지막 시합. 직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드래건에게 4천만.”

“드릴소에게 9백 5십만.”

이번엔 공개된 비율 정도로 방 안의 배팅이 나뉘었다. 참고로 나존귀는 드릴소에게 5백만을 걸었다.

“김상팔 님?”

직원이 친절함을 무기로 날 노려봤다.

“좀 더 보고 결정할게요.”

TV 화면에 확대된 드래건의 얼굴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가시갈기를 이용해 불칸의 거품총알을 막아 내긴 했으나, 얼굴 군데군데 비늘이 까진 것이 보였다.

“완벽한 방어는 아니었구나.”

우리가 드릴소를 상대할 땐 녀석들의 성격이 온순했고, 난폭해지기 전에 재빨리 제압했기에 간단히 끝날 수 있었다.

드릴소는 엄연히 5급. 그 무서운 유니콘과 동급이다. 유니콘의 뿔 찌르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

“드릴소의 뿔과 장갑이라면…….”

불칸처럼 드래건의 원형톱날에 쉽사리 썰리진 않을 것이다.

등급이 한 단계 낮음에도 드릴소의 배팅 비율이 더 높은 이유는 그런 까닭. 그것은 2마리란 점과 드릴소가 드래건보다 체력적으로 여유롭기 때문이다.

반면에 드래건은 살짝 지쳐 보이고, 불칸을 공격하면서 꼬리 비늘도 상당히 상한 상태. 좋아. 결정했어!

당당히 직원을 향해 돌아서며 방 안이 떠나라 외쳤다.

“드래건에게 10억!”

처음으로 직원이 표정이 무너졌다. 직원뿐만이 아니라 방 안에서 나와 김익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10억?”

나존귀는 눈을 비비며 내 손에 들린 블랙카드를 바라봤다.

김익조가 빌려준 한도 무제한의 카드. 10억쯤은 가볍게 땡길 수 있다! 이것만큼은 나존귀도 없을 것이다.

“김상팔 님, 그 카드는……?”

직원의 시선이 내 옆에 선 김익조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곧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내가 내민 카드를 받았다.

“네. 김상팔 님, 드래건에 10억 거셨습니다.”

술렁술렁. 나와 김익조 주변 사람들의 눈알이 뒤집힌다.

“이런 제기랄, 또 믿어야 하나?”

“한 번 건 돈은 돌려받지 못할 텐데…….”

“이렇게 된 이상 전 재산 몰빵한다!”

갈팡질팡하는 사람, 다리만 동동 구르는 사람, 이를 갈면서 날 따라 돈을 거는 사람. 그렇게 1분과 같은 30분이 날아갔다.

나, 김익조, 호규, 그리고 김대팔은 나란히 서서 필드를 내려다봤다.

드래건과 드릴소는 우리에서 나와 있었다. 연속된 시합으로 잔뜩 날카로워진 드래건과 인위적으로 흥분시켜 난폭해진 드릴소.

드릴소들은 머리에 달린 뿔을 드릴처럼 회전시키며 천천히 드래건을 향해 전진했다. 그러자 드래건은 불칸과의 싸움에서처럼 꼬리비늘을 여러 겹의 톱날처럼 만들어 휙 꼬리를 휘둘렀다. 이번에도 간단히 승부가 날까?

불꽃!

푸른색과 붉은색이 마구잡이로 섞인 불꽃이 두 괴물의 경질된 신체 사이에서 일었다.

불칸 때와는 달리 드릴소의 몸은 당당히 드래건의 톱날에 버텨 냈다. 덩치의 차이만 있을 뿐 경도의 차이는 없었다.

“그냥 눌러서 죽여!”

나존귀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자칭 ‘존나게 귀하신’ 분께서 저러는 모습이 참 꼴불견이다.

드릴소들은 드래건의 톱날 공격이 자신들에게 소용없단 것을 깨닫자마자 드릴로 냅다 드래건의 몸통을 파고들었다.

“이럴 수가!”

생각지도 못했다. 설마, 드래건의 몸통이 뚫릴 줄이야.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드릴소의 뿔이 몸통에 박히자 드래건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튕겼다. 다행히 드릴소의 뿔들은 깊게 박히지 않아 쉽게 빠졌다.

드래건은 목 뒤의 갈기를 빳빳하게 세워 마치 목도리도마뱀이나 킹코브라처럼 드릴소들을 위협했다.

드릴소들은 조금도 드래건에게 겁먹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드릴 뿔을 위로 치켜들며 맞대응했다.

톱날과 드릴, 강철로 된 역동적인 무기들이 빠르게 회전하며 서로 자웅을 겨뤘다.

드래건은 드릴소를 깔아뭉개고, 드릴소는 드래건을 밀쳐내는 데 집중, 탁탁 튀기는 불꽃의 모습이 마치 화약을 터뜨린 모양새 같다.

드릴소가 2마리였음에도 힘은 드래건이 한 수 위. 드래건은 꼬리를 위로 휘둘러 체중으로 드래건들을 눌렀다.

이번엔 드릴소들이 달리 방법이 없는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만 흔들어 댔다.

“티, 팀장님!”

호규가 내가 아닌 김대팔의 팔을 당기며 호들갑을 떨었다. 너무 당황했던 모양이다.

“저기……. 전 상팔 씨가 아닙니다만?”

천천히 드래건의 꼬리가 내려앉더니, 마침내 드릴소를 완전히 깔아뭉개고 말았다.

“앗!”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드래건이 여유롭게 꼬리를 들어 올리자, 드릴소가 있던 자리엔 구멍 두 개만 뻥 뚫려 있었다.

“필드 아래로 도망갔어요!”

김익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필드 아래는 필드 위를 덮은 유리 막처럼 반원의 합금으로 차단된 상태입니다.”

휴우, 그렇다면 다행이다.

드래건은 방금 전까지 싸우던 상대가 사라지니까 흥분해서 마구 날뛰었다.

머리를 유리 막에 부딪치고, 꼬리를 휘둘러 먼지를 일으키고, 온몸의 톱날 비늘을 총동원해 필드 위를 긁었다.

행위 예술 수준의 몸부림. 어쩌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드래건이 그렇게 한눈을 파는 사이, 필드 한쪽 귀퉁이 바닥이 볼록하게 솟았다. 그리고 바닥이 갈라지며 익숙한 드릴 2개가 필드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건이 위험하군요.”

김익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역시 높으신 분에게도 10억은 큰돈인가 보다. 막장드라마에서 보면 ‘우리 아들이랑 헤어져!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년아!’라고 하면서 사모님들이 넉넉하게 몇 억씩 제시하던데…….

드래건은 아직 드릴소들의 등장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사이 완전히 필드 위로 올라온 드릴소들은 양쪽으로 흩어져 한쪽은 드래건의 꼬리를, 다른 한쪽은 드래건의 중간을 찔렀다.

난폭하게 돌아가는 톱날비늘의 틈. 그곳에 드릴소의 뿔 드릴이 꽂히자 허무하리만큼 간단하게 회전이 멈췄다. 드릴소들의 공격에 드래건의 몸 전체가 휘청거렸다.

드래건의 저항이 약해지고, 드릴소의 뿔이 드래건의 몸속에서 뽑혔다. 이번엔 뿔에 붉은 피가 묻어나와 방울방울 떨어졌다.

드릴소들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드래건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드릴소들은 이미 드래건의 공략에 정통해진 뒤였다.

드래건의 몸이 벌집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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