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104화
내부는 딱 상상한 대로, 옛날 냄새 풍기는 복도에 학교 매점보다도 작은 스낵 코너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스낵 코너에서 파는 메뉴가 무척 다양했단 것이다.
“메뉴에 있는 것 하나씩 다! 계산은…….”
아저씨가 날 가리키며 점원에게 거의 명령에 가까운 주문을 했다.
“어쩐지, 표값을 내시더라니…….”
근데 애초에 더치페이하기로 한 거였잖아? 왜 또 어느새 내가 계산하고 있는 거야?
“젠장, 이러다가 또 금방 거덜 나겠네.”
계산을 하고 상영관에 들어갔다. 점원이 빌려준 쟁반에 간식을 한 아름 든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며 중앙 자리에 앉았다.
“사람이 저희뿐이에요.”
호규가 좌석들을 보더니 한 마디 던졌다. 흠, 조조라서 그런가?
“전세 낸 기분이네요.”
루호는 빠른 걸음으로 아저씨 옆자리로 가 앉았다.
이젠 아저씨랑 루호도 꽤 친해진 것 같다. 으르렁거리긴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보여 준 거리감은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
나, 아저씨, 루호, 호규는 나란히 앉았다.
아직 영화 시작 전.
“이것 봐라! 노가리가 있다?”
아저씨는 통째로 구워진 노가리를 들면서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세상에. 맥주집도 아니고, 영화관에서 웬 노가리? 아저씨는 노가리 한 마리를 한입에 집어넣고는 우물우물 씹었다.
“오징어도 있어요.”
호규의 선택은 맥반석 오징어, 루호의 선택은 통감자 구이였다.
“여기 무슨 휴게소야?”
어? 그러고 보니까……? 김밥, 순대, 고구마스틱, 핫도그, 호두과자, 치킨 팝콘, 토스트, 핫바, 호떡, 닭꼬치, 츄러스, 떡볶이, 떡꼬치, 어묵, 소시지, 꼬마김밥, 버터 옥수수, 꽈배기…….
“어? 전 이거 먹을게요.”
쟁반에 놓인 음식 중 내가 고른 것은 치즈 소스와 나초칩.
울긋불긋한 치즈 소스에 나초칩을 찍어 입어 넣었다. 그리고 씹을 때마다 의외로 신선한 치즈와 바삭한 나초칩의 맛에 깜짝 놀랐다.
잘 구운 파이의 표면처럼 씹을 때마다 새롭게 부서지는 칩의 식감은 기대보다 훨씬 만족스럽다.
잠시 후, 상영관이 어두워지며 영화가 시작됐다.
대기업 영화관과 달리 광고 없이 바로 영화가 시작된단 점은 음식 이상으로 큰 장점이었다.
사실 영화 내용 자체는 별것 없었다. 그냥 나쁜 놈, 더 나쁜 놈, 아주 나쁜 놈이 나와 서로에게 총질을 하는 영화였다.
그나마 인상적인 것은 맨 마지막에 그냥 나쁜 놈이 다른 두 사람을 쏘며 말한 ‘석양이 진다!’라고 한 대사.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 어느덧 오후 1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영화관을 나와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와 아저씨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예선을 치르기 위해 선수 대기실로 들어갔다.
“상팔 형,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팀장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힘, 내세요.”
루호와 호규의 응원을 뒤로 하며 우리는 복도를 걸어갔다. 그 와중에 아저씨는 본인만 응원을 받지 못해서 서운해하셨다.
“저런 배은망덕한 어린놈의 자식들!”
흠, 배낭 안 멘 아저씨는 참 오랜만에 본다.
“아저씨,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오냐. 이따가 보자.”
안으로 들어가서 둘로 갈라진 통로가 나왔고, 우리는 거기서 헤어졌다.
내가 씨름을 고를 때 ‘하필 씨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적 선택이며, 지금의 내 상태를 보고 내린 최적의 결정이다.
일단 헌팅페스티발의 씨름 종목에는 평범한 씨름 종목에는 없는 규칙이 몇 개 있다.
1. 상대를 죽이면 안 된다.
1―1. 선수의 목숨이 위험하단 심판의 판단하에 언제든 경기가 중단될 수 있다.
2. 능력이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하면 안 된다.
2―1. 단, 자신의 신체를 보완하기 위한 능력일 경우, 부분적으로 허용한다.
3. 승부는 단판. 시간은 무제한.
3―1. 고의로 승부를 지연시키는 행위는 경고를 받는다. 경고가 3번 누적될 경우, 실격 처리한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대충 이 정도. 능력에 직접적으로 공격당하지만 않는다면, 결국 평범한 씨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특별한 주특기가 없는 내 입장에선 이런 규칙이 곧 기회가 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나도 모르게 상대의 H력을 흡수하는 행위, 다만 그 문제는 나이트윙 사냥 이후로 많이 개선시켰다.
“후후후.”
우승까지는 아니더라도 3위 안에만 들면 헌터 랭킹 상승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응?”
예선 대기실.
수많은 헌터들이 있었지만, 랭킹 모임 때 봤던 얼굴들은 고작 몇몇이었다. 잘된 거겠지?
“아얏!”
누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야, 이거 재밌겠는데?”
“너, 너는……?”
적지형. 이 개자식이? 적지형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미친놈처럼 웃었다.
“나한테 지려고 모인 호구들이 한 트럭이야!”
녀석의 조롱에 대기실 안이 차갑게 식었고, 다들 살벌한 눈빛으로 직지형을 바라봤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감히 직지형의 도발에 응하지는 않았다.
“예선은 능력 수치로 합니다. 다들 씨름판으로 나와 주십시오!”
예선을 능력 수치로 한다고? 그럼 그냥 참가 신청 받을 때 수치 측정을 하면 되지,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나?
참가자들은 우르르 대기실을 나와 객석으로 둘러싸인 필드로 향했다.
필드는 투기장의 것과 비슷한 넓이였다. 차이점은 한가운데 모래로 가득 찬 씨름판이 있다는 것과 가장자리에 달리기를 위한 트랙으로 빙 둘러싸였단 것. 그리고 관객들의 상태가 투기장보단 순하다는 것이었다.
“사랑해요, 적지형!”
“날 가져요, 적지형!”
“적지형, 포에버!”
와, 저게 말로만 듣던 팬클럽이구나. 객석 맨 앞줄에서 한 떼의 여성들이 플랜카드를 흔들고 있었다.
적지형은 여성들에게 손을 흔들며 다른 손으로는 나를 포함한 다른 참가자들을 향해 중지를 뻗었다.
“이게 바로 클래스 차이다! 하하하!”
지금 여기서 저 말에 토를 달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한국 헌터 랭킹 40위란 이름에는 그만한 힘과 자격이 충분하다.
언젠가 밟아 주마! 이를 갈면서 결의를 불태웠다.
“차례차례 줄을 서십시오! 지금부터 능력 수치를 측정합니다. 가장 높은 상위 16명을 뽑은 다음, 토너먼트로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러, 니, 까.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측정해서 뽑으면 되잖아! 왜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만든 거야?
“다음!”
내 앞 사람의 측정 순서. 헌터의 능력 수치를 측정하는 측정기는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밀성을 위해 사람의 몸 전체를 검사하는 대형 측정기.
다른 하나는 약식으로 간단히 측정하는 소형 측정기.
씨름판에 놓인 소형 측정기는 병원이나 공공기관에 한 대씩 놓여 있을 법한 혈압계처럼 생겼다.
측정 센서인 고리 안에 팔을 집어넣으면 센서가 팔에서 감지되는 생체 신호와 H력 등의 신호를 감지해 그 총합을 숫자로 나타내 준다.
“홍길동 씨, 검사 결과 210입니다!”
210이라……. 지금의 내 수치보단 확실하게 낮다.
“다음!”
직원의 호령에 맞춰 자신만만하게 팔을 뻗었다. 센서가 내 팔을 스캔하는 것이 미적지근한 온도로 느껴졌다.
“김상팔 씨, 검사 결과…….”
숫자를 보던 직원이 입이 잠시 멈췄다. 오오, 높게 나온 건가? 그런 거야?
“320입니다. 오늘 측정한 분들 중 두 번째로 높으시네요.”
“설마 첫 번째가 적지형은 아니겠죠?”
물론 적지형의 능력 수치가 나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그 부분은 안 봐도 비디오.
직원에게 던진 내 물음은 적지형에 대한 적개심에 더 가까웠다.
“아니요. 적지형 씨는 아직 측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측정하신 분들 중 최고는 ‘김호랑’ 씨입니다. 수치는 400이군요.”
400? 시작하기도 전에 졌네. 그 뒤 30명이 넘는 사람이 측정을 했다. 그러나 내 이상의 능력 수치인 사람은 없었다.
“다음, 적지형 씨!”
드디어 왔다.
헌터계 최고의 문제아. 그리고 인성 종결자. 적지형의 팔이 당당하게 측정기의 링을 통과했다.
“측정 결과…… 540입니다.”
적지형의 능력 수치가 공개되자, 날 포함한 다른 참가자들 얼굴에서 희망의 빛이 사라졌다. 휴, 우승은 포기하고…… 3위를 노리자.
16강이니까 2번만 이기면 된다. 운이 좋다면 적지형과 직접 붙지 않고 4강에 오를 수도 있다.
마지막 참가자의 기권으로 모든 측정이 끝났다. 그리고 씨름으로 붙을 16명의 참가자 선별이 결정됐다.
예상한 대로 나, 적지형, 김호랑이란 사람은 토너먼트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추가로 한 명, 의외의 이름이 있었다.
“오시오?”
빙신연맹의 팀장, 오시오. 턱수염과 콧수염이 합쳐진 덥수룩한 얼굴이 참으로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오시오의 주특기는 빙결. 게다가 게재된 능력 수치는 나와 똑같은 320.
“이것으로 예선을 마칩니다. 본선은 육상 경기가 먼저 시행되고 난 후 진행됩니다. 토너먼트 대진표는 완성되는 즉시, 필드 한쪽에 게재됩니다. 일단 본선 진출자 분들께선 대기실로 가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본선 진출자는 탈락자와 함께 필드를 나왔다. 그리고 아까 지나온 통로에서 탈락자는 출입문으로, 본선 진출자는 대기실로 향했다.
아저씨는 잘 하셨을까? 아저씨도 나처럼 능력 수치로 예선을 보셨다면…….
아저씨의 능력 수치가 심히 알고 싶다. 대기실은 기다란 벤치와 작은 TV가 놓여 있었다.
우리를 안내한 직원은 TV의 전원을 넣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육상 경기 본선이 시작됩니다. 그동안 심심하실 테니, 여기 화면으로 중개를 보시기 바랍니다.”
TV 화면이 좀 작다는 것만 빼면 화질은 괜찮았다. 그리고 막 켜진 화면으로 육상 경기 본선에 진출한 사람들의 모습이 나왔다.
“앗?”
아저씨 옆에 장마리가 있었다.
“검은 과부들도 왔구나!”
장마리는 민소매 셔츠와 핫팬츠 차림. 물론 색상은 검은색이다.
일대일 대결인 씨름과 달리 육상 경기의 본선 진출자는 어림잡아도 3~40명은 되어 보였다.
TV 속 심판이 본선 진출자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단거리 시합을 실시합니다! 참가하실 분은 나오십시오.”
그 말에 10명이 잽싸게 앞으로 나왔다. 거기엔 장마리도 껴있었다.
아저씨는 가만히 뒤에 있는 것으로 봐선 장거리에 나가실 생각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처자네요.”
약간은 어눌한 발음, 그리고 일반적이지 않은 높낮이. 그제야 16명 중 하나가 좀 남다르단 것을 깨달았다.
소위 말하는 서양인. 창백한 얼굴에 밝은 갈색 머리, 그리고 파란 눈. 호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닌 미남이었다.
“외국인?”
“하하하. 외국인 맞습니다. 한국에 놀러 왔지요.”
원칙상 헌팅페스티발의 경기는 H력 능력자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다만 보통은 자기네 나라에서 참가하지, 굳이 외국에 와서 참가하진 않는다.
외국인을 보게 될 때 하게 되는 주입식 교육 제1번.
“웨, 웨어 아유 프럼? 아임 프롬 코리아.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하면서도 스스로 ‘이게 뭔 개소리지?’란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재밌네요.”
미남은 공손히 목례를 한 후 자기소개를 했다.
“제 이름은 드미트리 안토노프, 줄여서 디마라고 불러 주세요. 러시아에서 왔습니다.”
러, 러시아? 백인이라 당연히 미국이나 유럽에서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이것도 은근 편견이구나.
“오, 웰컴 투 코리아. 왓츠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상팔 킴.”
와, 이게 말로만 듣던 울렁증인가. 입술이 굳어서 입모양이 일그러졌다.
“김상팔 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국어 하는 러시아인, 영어 하는 한국인. 이제 여기에 러시아어 하는 영국인만 있으면 완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