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108화
그날 밤, 아저씨의 3등과 장마리의 우승을 축하하는 자리가 열렸다.
우리 팀과 검은 과부들은 한데 어울려 저녁식사를 했다.
“끌끌끌! 상팔이는 실격했대요! 팀장이 반칙패래요!”
무려 레스토랑에서 열린 자리이건만, 아저씨는 수제 맥주가 담긴 잔을 들며 식당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우리 팀장은 반칙쟁이입니다! 죄송합니다. 얘가 원래는 착한 애였는데, 나쁜 친구들을 사귀어서 그만……!”
식사 장소를 룸으로 잡은 덕에 다른 손님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었다. 다만, 들락날락거리는 웨이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까보다 이게 더 창피하다.
스테이크를 아저씨라고 생각하며 맛있게 썰어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굳이 아저씨의 진상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젠 다들 웬만큼 익숙해진 모양이다. 대신 장마리의 우승을 칭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정말 멋졌습니다.”
호규가 장마리의 잔에 와인을 따라 주며 말했다. 장마리는 취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역시 마리 씨의 달리기는 멋지군요. 저도 분발해야겠습니다.”
루호도 한마디. 장마리의 얼굴이 더욱 빨개진다.
화기애애하다. 이젠 다들 그냥 한 팀처럼 느껴진다. 주아란과 공미는 자신들의 종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주아라와 최향자는 그 와중에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한유화는 유정과 변해라 사이에 껴서 유정에게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중이었다.
“내일은…….”
수영과 검술이 순서대로 열린다. 호규는 수영, 루호는 검술에 참가한다.
“두 사람 다 열심히 해.”
“네!”
둘의 대답이 우렁찬 게 기대가 된다. 내일 시합은 볼만할 것이다.
흠, 두 사람한테 배팅이나 해 볼까? 전국 헌터 체전, 줄여서 헌터 체전에서의 배팅은 투괴와는 방식이 좀 다르다.
투괴의 경우 단순 승패를 맞추는 것이라면, 헌터 체전은 1, 2, 3등을 모두 맞추는 것이다. 하나라도 틀리면 그대로 꽝. 대신 모두 맞출 경우, 건 돈의 10배를 준다.
보통은 능력 수치가 공개되니, 그것을 토대로 배팅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변수란 것은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는 법. 당장 나만 봐도…… 결승에서…….
크윽, 내가 어쩌자고 직저형 놈 얼굴에다 무광탄을 쐈지? 후회가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참고로 내 초소형 무광탄을 맞은 적지형은 코뼈가 완전히 뭉개졌다고 한다. 다행히 폭발대제 쪽에도 실력 좋은 치료술사가 있어서 치료는 금방 끝난 모양지만…….
음, 전국적 망신과 코뼈 함몰이라면 목이 졸릴 만한 것 같다. 어쨌든 설욕은 충분히 한 셈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똥 마렵냐?”
아저씨가 더러운 질문을 물어 왔다.
“아저씨, 밥맛 떨어지는 질문은 삼가 주세요.”
“끌끌끌! 그래? 그럼 이거 한번 먹어 봐라.”
아저씨가 정체불명의 음식을 포크에 찍어 내 입에 내밀었다.
뭐지? 처음 보는 음식인데……. 생긴 것은 푸딩 같은데, 단면은 젤라틴이 과하게 풍부한 편육 같다.
“고기 젤리?”
일단 조심스레 입을 벌리고, 아저씨의 거친 포크질을 통해 받아먹었다.
은은한 고기 맛과 함께 멀컹멀컹한 식감이 독특하다.
“이게 뭐예요?”
“끌끌끌! 그건…….”
아저씨가 말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불쑥 우리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할라데츠. 러시아식 젤리 요리랍니다.”
디마였다! 디마는 손에 든 포크로 아저씨 접시 위의 할라데츠 조각을 찍어 입에 넣었다.
“오! 훌륭하네요. 비싼 만큼 값을 하는데요?”
아저씨는 멍하니 디마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손바닥을 ‘힘껏’ 휘둘렀다.
“우라, 깜짝이야!”
우라? 아저씨가 휘두른 손바닥은 정확히 디마의 뺨을 가격, 디마의 몸을 뒤로 쓰러뜨렸다.
“아저씨?”
어처구니가 없어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쓰러진 디마에게 말했다.
“아이고, 미안합디다. 뉘신지 모르겠습디다만, 제가 너무 놀라서 그랬습디다. 끌끌끌!”
깜짝 놀라기엔 타이밍이 좀 엇박인데요? 누가 봐도 고의인뎁쇼? 게다가 마지막엔 활짝 웃었어? 거기에 ‘디다’ 말투까지?
디마는 부운 뺨을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그걸 수도 있죠. 그런데 방금 말씀하신 건 사용이 잘못됐습니다. 일부러 그러신 거죠?”
“끌끌끌!”
“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지독하게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왠지 이 둘 사이에 꼈다간 시공의 폭풍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도대체 사방이 차단된 이 룸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의문과 함께 밤도 깊어졌다.
다음 날.
헌팅페스티발 3일째가 밝았다.
“끙, 머리야.”
우리는 점심때가 되어서야 호텔을 나올 수 있었다. 어제 너무 늦게까지 마신 후유증이었다.
“이러다가 유흥비로 다 탕진하겠네.”
역시 돈이란 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나 보다. 있을 때 잘하자.
루호와 호규는 먼저 일어나 우리보다 한발 앞서 경기장으로 갔다.
“아이고, 머리야.”
맥주에다가 양주 타서 마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경기장 관람석 맨 위에 앉아 필드를 내려다봤다. 투기장과는 달리 VIP룸이 없기에 일반관객들에 섞여 경기를 관람해야만 했다.
“배팅이나 할까?”
그냥 구경하면 재미없으니까……. 다른 팀원들에게 자리를 부탁하고는 혼자 매표소로 향했다.
21세기, 이젠 배팅도 최신식 기계에서 자동 발급하는 시대다.
도박에 꿈을 안고 줄을 선 사람들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왠지 처량한 기분이 든다.
물론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도박 중독자는 아니다. 더러는 재미로, 더러는 용돈 낭비로 하는 사람도 있다.
“어디 보자.”
예선은 벌써 끝난 뒤라 본선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능력 수치 총합이 자동 발매기 화면에 떴다.
수영과 검술.
수영 본선 진출자는 모두 12명. 그중 호규의 등수는 5등이었다.
호규의 능력 수치는 270.
호규의 이름 위로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2등은 손평화, 능력 수치 450.
4등은…….
“한유화?”
능력 수치는 290.
와, 얘가 호규보다 높네. 4등과 2등 사이에 어마어마한 수치 차이가 있어 보이는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니다.
문제는 헌터 랭킹 60위인 손평화보다도 능력 수치 총합이 높은 한백년!
도대체 누굴까? 적지형 수준의 실력자? 오늘 경기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10배니까…….”
1등부터 3등까지 정한 후 금액을 입력했다.
지금 내게 가진 2억1천 중…… 2천만을 걸었다. 수수료로 2백만이 빠져나가는 것이 화면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였다.
피 같은 2백만. 그렇지만 성공할 경우 1억 8천만을 벌 것이다.
“왠지 언제부터인가…… 헌터가 아니라 도박사가 된 것 같네. 하하하.”
살짝 비참한 기분이 든다. 뭐, 팀원들이 활약하면 장기적으로 팀의 명성이 높아지는 거니까…….
다음으로 검술. 본선 진출자는 16명.
씨름처럼 토너먼트 방식이다.
루호의 순위는 3위!
나쁘지 않은 순위다. 이 정도라면 수상은 따 놓은 당상. 그러나 변수를 조심해야 한다.
일단 위의 두 사람을 제외하고, 밑의 순위에서 조심해야 할 사람은 4위 이이와 5위 이삼, 그리고 8위 이사, 9위 이오 형제. 이이라면 헌터 자격시험에서 만난 인연이 있다.
10형제 중 무려 4명이나 본선에 오르다니……. 이이와 그 동생들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맏형 이일도 지금은 퇴물이지만, 왕년에 랭킹 헌터였단 것을 감안하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엥?”
10위에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이름이 있다.
나존귀.
이 인절미 같은 놈! 이 자식은 실력으로 본선에 오른 건지 살짝 의심스럽다.
“등수라…….”
호규와 루호의 실력,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격차, 예상할 수 없는 변수.
확실히 도박은 정신 건강에 해롭다. 특히나 나처럼 돈 벌 생각으로 하는 거라면…….
배팅 티켓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팀원들이 배팅에 대해 물었지만,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묻지 마, 다쳐!
수영에 진출한 12명이 수영복 차림으로 필드에 섰다.
일반적인 수영과 달리 영법별로 하지 않고 ‘무제한 자유형’으로 단거리, 장거리 두 개로 나뉘었다.
참고로 처음은 단거리인 100m. 수영장의 길이가 50m이기에 왕복 한 번이면 끝나는 경기다.
분명 어제는 씨름판과 트랙이 깔려 있던 필드가 이번엔 수영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무슨 조립식인가? 필드가 뚝딱뚝딱 바뀌네.”
멀리 떨어진 선수들을 자세히 보기 위해 설치한 거대한 전광판에는 선수들의 모습이 확대되어 있었다.
호규의 레인은 5번.
예선 등수대로 선 모양이다.
“화이팅!”
팀원들과 함께 목청이 터져라 호규를 응원했다. 평소에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호규는 얼굴만 간신히 드러난 전신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제주도 해녀냐? 눈에 쓴 수경까지 합치면 후드 티셔츠보다 노출도가 낮다.
“호규는 호규구나.”
호규의 맨얼굴을 완전하게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완벽하게 깨졌다.
바로 옆. 4번 레인, 한유화.
검은색 프릴이 주렁주렁 달린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요망한 트윈테일은 하나도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저러면 수영할 때 저항이 심할 텐데?
“헤헤헤!”
한유화는 촬영카메라의 관심을 받으려 별별 포즈를 다 취했다. 애처롭다 못해 눈꼴 시리다.
“와, 저기 좀 봐!”
한유화의 노력이 무색하게 관객과 촬영 팀의 관심은 다른 데로 향해 있었다.
2번 레인과 1번 레인.
나란히 두 미녀가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1번 레인, 한백년.
도대체 어떤 부모가 자식 이름을, 그것도 여자애 이름에 ‘년’을 붙일까.
한백년은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였다.
겉보기엔 나이가 대략 15~18세. 키는 한유화와 비슷하지만, 확실히 얼굴에서 나이가 드러난다.
이름과는 달리 한백년의 얼굴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신비로웠다. 어린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분위기와 자태가 녹아 있다.
뭐랄까.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은 느낌이랄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칼은 노인의 그것과는 달리 윤기가 흘러 흡사 ‘별빛’과 같았다.
이성적으로 매혹하기보다는 차원이 다른 고귀함으로 사람을 경배하게 만드는 힘.
머리카락처럼 흰 원피스 수영복은 소녀의 몸을 도자기로 만든다.
예술 작품을 보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보통은 왜 수명모를 쓰지 않았는지를 지적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감상에 빠지고 싶다.
“쩐다!”
간만에 빠져든 감상이 옆자리 한돈 아저씨의 감탄으로 모두 깨져 버렸다. 그러나 아저씨의 감탄은 정당했다.
몰랐다.
손평화가 어떤 몸매인지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다.
분명 가까이서 대화도 나눴고, 함께 사냥도 했는데……. 참 절묘하게 숨기고 있었구나, 저런 폭탄을?
원피스 수영복의 섬유인 스판덱스의 위력.
고무처럼 몸에 착 달라붙기에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손평화는 과연 수영이 가능할까 싶은 굴곡을 갖고 있었다. 저런 몸매는 처음 본다. 멀리서 흐릿하게 보면 머리가 3개 달린 걸로 보인다.
하나는 진짜 머리, 둘은 가슴에 달린 머리.
“브라보!”
흠칫.
아랫자리에 앉은 디마가 기립 박수를 쳤다. 이 사람,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조금 전까지는 없었는데?
디마는 박수를 친 후 고개를 돌려 내게 윙크를 했다.
“안녕하세요, 상팔 씨.”
“아…… 네.”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저씨랑은 다른 의미에서 두려움이 느껴진다.
“팀장님!”
주아란이 내 명치에 주먹을 꽂으며 외쳤다. 쿨럭, 얜 주특기가 발차기일 텐데? 어째서?
깔끔한 명치 가격에 허리가 절로 90도로 접혀지며 양팔이 명치를 감쌌다.
토할 것 같다. 근데 너무 아파서 토할 여유도 없다.
역시 그 언니에 그 동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