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114화
“이기면 랭킹이 올라가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겠는데? 끌끌끌!”
아저씨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물론 속으로는 루호가 좀 얻어터지길 바라실 것이다.
“이건 ‘랭킹전’이 아니에요. 자기보다 높은 랭킹 헌터를 이겨도 직접적인 반영은 안 된다고요.”
기기래가 아저씨의 말을 받아치며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기자로서도 이번 시합이 그만큼 중요하단 의미였다.
루호와 최상길은 각자의 무기를 쥔 채 링 위에 서 있었다. 왼팔을 다친 최상길은 장칼만으로 싸움에 임했다. 깁스를 한 모습이 사뭇 루호에게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직접 싸우는 루호보다 보는 내가 더 긴장된다. 공이 울렸다. 일단,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양쪽 다 신중하다.
최상길은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업계로 돌아오자마자 헌터 랭킹 95위라니……. 역시 천재는 천잰가 봐?”
준비 자세를 취하면서 루호도 담담히 답했다.
“그럴 리가요. 전부 저희 팀장님 덕분이죠.”
흠칫. 순간적으로 날아드는 몇몇 시선이 따가웠다. 손평화가 나에게 손을 흔든 이후로 계속 뒤통수가 시린 터, 슬슬 유명세를 타는 걸까?
기기래는 수첩을 무릎에 내린 채 안경을 벗어서 닦았다. 덕분에 수갑이 채워진 내 오른손이 들썩였다.
“좀처럼 움직이질 않는데요?”
“두 사람 다 신중한 편이니까요.”
게다가 둘 다 민첩함과 기술이 좋다. 비슷하기에 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보통, 비슷한 사람끼리의 대결은 순식간에 끝나는 것이 인지상정. 아저씨도 웃음을 멈추고 진중하게 대결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군. 남은 것은 서로의 빈틈을 찾는 일인가?”
웃음기 없는 한돈 아저씨라니……엄청나게 낯설다.
시합을 시작하고 무려 15분 경과. 두 사람은 처음처럼 긴장이 가득하지만, 관중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전국 노려보기 자랑’하냐!”
“우린 싸움 구경을 하러 온 거야! 어서 싸워!”
“안 싸울 거면 내려와! 시간 아깝게 뭐하는 짓이야?”
나처럼 배팅을 한 사람들이 많은 건가? 다들 미쳐 날뛰고 있었다.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기세, 그야말로 경기장을 지배할 것 같은 전장의 화신이었다.
“싸워! 싸워! 싸워……!”
세상에나……. 두 사람이 호흡까지 가다듬으며 혼신의 집중을 하고 있는 와중에 객석에선 반대로 두 사람을 방해하는 소리를 질러 대고 있다.
참으로 품격이 넘치는 관객 문화다.
“앗!”
루호가 한 발 먼저 H력을 발동, 전신을 H력으로 덮으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에 맞춰 최상길도 거의 동시에 돌진, 역시 H력을 발동해 전신을 강화시켰다.
최상길은 상체를 숙이며 오른쪽으로 45도 비틀었다. 위로 올라간 왼쪽 팔은 루호가 휘두른 채찍에 맞아 깁스가 박살났고, 파편이 튀어서 최상길의 얼굴을 긁었다.
“하앗!”
최상길은 오른손에 든 장칼을 앞으로 뻗으며 그대로 루호의 복부를 찔렀다.
“크윽!”
루호는 칼끝에 배를 찔리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최상길도 과하게 몸을 숙인 탓에 루호의 바로 앞에서 고꾸라졌다.
“비슷비슷하군. 재미있어.”
아저씨의 말에 기기래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마치 학생과 선생님 같다.
“지금 건 누가 봐도 최상길 씨의 멋진 한 방 아닌가요?”
“아니. 루호도 칼에 눌리는 것을 느끼자마자 몸을 뒤로 뺐어. 거의 피해는 없을 거야.”
오호. 보는 눈이 남다르신데? 사실 나도 아저씨가 말씀하신 대로 보고 있었다.
바둑에는 ‘훈수꾼이 최고수.’라는 말이 있다. 이 뜻은 보는 사람은 대결의 전체 내용이 보이기에 실제 대결 중인 사람들보다 훨씬 냉정하고 대국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단 것이다.
실제 나와 루호 사이에도 꽤 실력 차가 있다. 그럼에도 지금 내 눈엔 루호와 최상길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만약 내가 직접 둘 중 하나와 싸운다면, 이렇게까지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바닥에 엎어진 두 사람은 금방 일어섰다. 그리고 이번엔 근거리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와아!”
객석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일제히, 똑같이, 놀랐다.
채찍이란 게 저렇게 민첩하게 다룰 수 있는 물건이었나?
장칼이란 게 저렇게 가볍게 다룰 수 있는 물건이었나?
루호는 채찍으로 최상길의 장칼을 감아서 제압하려 했지만, 좀처럼 틈이 나질 않았다.
최상길은 언제나 루호보다 한 발 앞서서 칼을 휘둘렀다.
싸움은 일방적으로 루호가 최상길의 공격을 막기 급급한 상황이었다.
“아까 이이랑 싸울 때 같은데요?”
슬쩍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래.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차원이 다르지. 아깐 그냥 제 잘난 맛에 휘두르는 놈이라면, 최상길은 훨씬 냉정해. 지금도 아주 깔끔하게 공격하고 있어.”
하긴, 최상길이 부상만 당하지 않았더라도 루호가 훨씬 불리했을 것이다.
사실상 최상길은 절반의 실력만 발휘하고 있다.
“응?”
가만히 보니, 어느 새인가 루호는 또 H력을 해제한 채 싸우고 있었다.
최상길은 루호의 좌우를 번갈아 가면서 칼을 휘둘렀다. 거기에 루호는 채찍을 양손으로 팽팽하게 당겨 그 탄력으로 칼을 튕겨냈다.
최상길이 아무리 H력으로 힘을 강화시켜도 팔 하나만으로는 결정타를 날릴 수 없었다.
설사 순수 완력에서 루호보다 우위여도 루호 정도의 실력자면 그 공격을 흘리거나, 아예 피하는 방법을 쓰면 된다.
지금 같은 상황이 쭉 이어질 경우, 최상길이 먼저 지칠 것이다.
“최상길 녀석, 노림수가 있어!”
아저씨가 대뜸 소리를 쳤다.
“조루, 호! 녀석의 왼팔을 조심해!”
기기래는 어리둥절해하며 아저씨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나도 슬쩍 얹어 간다.
“그래요. 설명해 주세요.”
갑자기 개그캐에서 설명캐로 전직하신 아저씨, 어서 설명이나 하세요!
“최상길의 왼팔을 잘 봐!”
“왼팔?”
아저씨의 말을 듣고 최상길의 다친 왼팔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왼팔이……움직여……?”
기기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요? 제 눈엔 그냥 다친 것처럼 보이는데요?”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걸까. 깁스가 박살나고, 왼팔이 자유로워진 후 최상길은 은밀하게 팔을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그리 엄청난 일이 아니다. 다친 팔이야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으니까……. 문제는 ‘손’이다.
아무도 왼팔에 관심을 갖지 않는 동안 왼손은 뭔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작은 공을 쥐고 있는 형상. 왠지 알 것 같은데?
기기래는 나와 아저씨를 번갈아보다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아저씨가 아무리 외쳐도 루호에겐 전달되지 않았다.
최상길은 루호의 채찍이 크게 휘둘러진 동안 빠르게 왼팔을 루호의 얼굴에 뻗었다.
부상당한 팔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른 동작이었다. 그리고 왼손이 활짝 펴지면서 손바닥 안에 작게 감춰 놨던 ‘광탄’이 빛을 뿜어냈다.
“루호야!”
나도 모르게 루호를 불렀다.
최상길의 광탄은 빛을 내는 것까지만 하고 소멸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루호의 시력을 손상시키기엔 충분했다.
“이런……!”
아저씨도 신음에 가까운 탄식을 뱉었다.
광탄의 충격으로 루호는 눈을 감은 채 움찔거렸다. 눈을 뜨는 것은 물론이고, 지독한 눈부심에 고통스러워 보였다.
단번에 전세를 역전한 최상길은 아까보다 훨씬 여유로운 표정으로 루호에게 칼을 휘둘렀다.
루호는 거의 본능에 가깝게 몸을 굴렸다. 덕분에 최상길의 칼은 피했지만, 코너의 로프에 기댄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최상길은 루호를 바라보며 잠시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한 거야. 상대가 나빴다고 생각해.”
글쎄올시다? 우리 루호도 체질만 아니면 진작 댁 같은 부상자한테 이겼을 걸요?
루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구겨진 얼굴을 최상길에게 향하고는 최대한 최상길의 움직임을 감지하려고 애썼다.
“이번 시합은 최상길 씨의 승리네요.”
기기래는 열심히 수첩에 글자를 적어 갔다. 그러자 옆에 앉은 아저씨가 손을 뻗어서 기기래의 펜을 붙잡았다.
“왜요?”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어.”
아저씨는 검지를 쭉 뻗어서 링을 가리켰다.
“그래 봐야…….”
기기래는 짧은 한숨을 쉬며 잠시 펜을 멈췄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다물었다.
“루호가 완전히 사활을 걸었네요.”
내 말에 아저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루호는 사슴으로 변해 있었다. 링 위에 선 사슴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코와 얼굴의 털들은 민감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단하군. 동물의 감각으로 승부하겠다고?”
최상길도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그는 과감히 정면 승부를 택하며 사슴에게 돌진했다.
분명 둘 다 무모한 행동이다. 시각 없이 동물의 육감에 의지하는 쪽이나, 자신보다 훨씬 큰 사슴을 향해 정면으로 뛰어든 쪽이나…….
루호는 고개를 숙이며 뿔로 최상길의 칼에 맞섰다.
최상길은 무슨 잡초 걷듯이 칼을 크게 휘둘러 루호의 뿔을 때렸다. 날이 서지 않은 칼이라 뿔에는 끄떡없었지만, 최상길은 계속해서 공격했다.
루호는 최상길의 칼이 부딪치는 박자에 맞춰 뿔을 휘둘렀다. 작은 고갯짓에도 뿔은 크게 움직였다.
두 개의 뿔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최상길을 압박했다.
그것은 고수가 휘두르는 쌍검. 빗처럼 갈라진 갈래는 마치 수십 자루의 창처럼 최상길의 공격을 받아쳤다. 오히려 가까이 접근한 최상길이 뿔에 찔리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움직임을 줄였다.
“무섭군. 하지만……!”
최상길은 몸을 최대한 낮게 숙여서 루호의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루호가 몸을 돌리기 전에 장칼로 루호의 몸통 옆을 때렸다.
위, 아래, 위, 아래. 한손을 휘둘러 할 수 있는 가장 짧고 효과적인 궤도. 연속된 공격을 맞으면서도 루호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사슴 특유의 질긴 가죽과 튼튼한 체격 덕분일까. 계속된 공격에도 루호는 꿋꿋이 버텼다.
“왜 맞고만 있는 거죠?”
기기래가 아저씨에게 물었지만, 아저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끙’소리만 내며 입을 열지 않았다.
기기래는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맞고만 있는 거죠?”
내가 아저씨 대타냐?
“눈을 봐요.”
“눈이요? 눈은 아직도 감고 있잖아요?”
이 사람, 감이 나쁜 건가.
“제 생각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루호는 아마…….”
“아마……?”
“아마……눈을 회복하려고, 시간을 버는 중일 거예요.”
사슴으로 변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3분이 훨씬 넘은 건 확실한데…….
사슴 상태에서 싸우기에는 장소가 너무 좁다. 링에서는 몇 걸음 움직이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덕분에 최상길만 신났다. 장칼은 쉴 새 없이 사슴의 몸통을 때렸다.
변신한 지, 약 10분에 다다를 무렵. 드디어 사슴이 눈을 떴다!
사슴은 눈을 뜨고 딱 두 번 움직였다.
하나는 몸을 돌린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뿔을 들이밀어 결과 결 사이에 최상길의 칼날을 붙든 것.
방심한 탓에 최상길의 반응은 느렸다. 사실상 기습에 당한 것이었다.
결국 양쪽 뿔 모두에 칼날이 걸리며 최상길이 손에서 칼을 놓쳤다. 정확히는 뺏은 것이다!
이제 제한시간 1분.
최상길은 맨손이 된 자신의 오른손을 보더니, 이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미치겠군.”
루호는 즉시 사람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눈으로 한손에 채찍, 다른 손에 장칼을 들었다.
최상길은 양손을 들며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