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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김상팔-116화 (116/250)

116화

116화

“그럼 연예인 일은……?”

“병행이에요! 일단 목표는 국내유일의 정식 헌터 연예인! 어때요? 희소하죠?”

하하하. 천연덕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간덩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해야 하나? 불과 몇 달 전에 쌍두 하피한테 죽을 뻔했을 텐데…….

역시 검은 곰의 동생답다.

“응원할게요. 힘내요.”

“네!”

카리와는 훈훈하게 악수를 나눴다. 옆에서 기기래가 그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으려 했지만, 장마리가 빠른 몸놀림으로 카메라를 가리는 묘기를 선보였다.

분위기 덕인지 갑자기 우리 주변 자리가 빈 것이 생각났다. 분명 아저씨 때문일 테지만…….

“같이 결승전 보러 갈래요?”

검은 과부들은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했다.

기기래는 옆에서 펄쩍 뛰면서 반대,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된 내가 더 이상 기기래를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럼 먼저 자리로 가서 계세요. 전 아저씨를 찾아서 같이 갈게요.”

기기래까지 떨쳐낸 후 혼자 매점구역을 서성였다. 갖가지 음식들의 향연에 코와 눈이 즐거워 식욕이 절로 샘솟았다.

“팝콘 엎지른 건 좀 아깝네.”

시합시간이 거의 다 돼서인지, 팝콘 가게의 줄은 훨씬 길어진 상태였다. 팝콘을 대신해 모두와 나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어?”

저 멀리 아저씨가 보였다. 아저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구지?”

흰색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상대. 덩치는 아저씨보다 조금 더 큰 정도. 아저씨를 끌어안은 팔로 보건대, 상당히 마른 체형이다.

“아저씨!”

내가 아저씨를 부르자, 아저씨의 어깨가 확 움츠러들었다.

“사, 상팔이냐?”

“예. 누구예요?”

아저씨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상대가 망토를 살짝 들어서 내게 얼굴을 보여 줬다.

“억!”

맙소사! 한백년?

잘못 볼 리가 없다. 수영복을 입고 뽐낸 곱디고운 자태와 고고한 분위기.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도, 아까의 감동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런데 어떻게 한백년이 여기에? 수상자는 검술 종목이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못 나올 텐데?

한백년은 내 시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증거로 내게 정체를 드러낸 후에도 여전히 아저씨를 끌어안고 있었다.

“둘이……설마……철컹철컹……?”

“아니야!”

아저씨는 양팔을 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그럼 무슨 사이…….”

잠깐만……‘한’돈……‘한’백년……? 그렇다면!

“혈연관계?”

차마 아저씨랑 부녀 사이라고는 못하겠다. 그건 단순히 한백년의 미모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인류란 종의 유전법칙에 대한 도전이다.

아무리 어머니 쪽 유전자가 우월해도 아저씨의 열성인자를 구원할 수는 없다.

“혈연도 아니야.”

아저씨가 의외로 대답을 빨리 해 주셨다. 반면에 한백년은 아까 수영을 할 때부터 조금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무슨 사이신데요?”

“우린…….”

아저씨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잠시 한백년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또 내가 모르는 비밀인가.

“이 아이는…….”

오오, 말씀하신다! 아저씨가 뭔가를 말하려는 이때! 제기랄, 하필 중요한 지금 이 순간!

“안녕하세요!”

디마가 나타났다. 디마, 이 자식! 어디서 나타난 거야?

디마는 지난날의 복수라도 하는 듯 냅다 아저씨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둔기로 내려치는 소리가 나며 아저씨가 디마의 주먹에 맞아 쓰러졌다. 아저씨와 붙어 있던 한백년은 잽싸게 아저씨에게서 떨어지며 디마를 경계했다.

“디마 씨?”

디마는 내 말 따윈 가볍게 무시하면서 한백년에게 외국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한백년의 입에서 비슷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뭐, 뭐야? 이 녀석들……혹시 지금 러시아어로 대화하는 거야?

“두, 두 유 노우 코리안?”

아놔, 이놈의 외국인 울렁증. 또 나도 모르게 콩글리쉬가 튀어나왔다.

디마와 한백년은 둘이서만 한참을 떠들었다. 표정으로 봐선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닌 듯했다.

디마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채 줄곧 쾌활한 목소리였고, 한백년은 짧고 간결하게 말했다.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대화는 끝이 났다.

“이런, 이런…….”

디마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한국말로 말하기 시작했다.

“굉장한 친구를 두셨네요?”

아저씨는 후다닥 달려들어 디마의 멱살을 잡았다.

“너 인마! 진짜로 나랑 해보자는 거야? 계속 거슬리게 할 거냐?”

“하하하! 이러지 마세요.”

“스, 스톱! 스톱 플리즈.”

내 주둥이는 아직도 영어를 뱉어 낸다. 한백년은 아저씨와 디마가 정신없는 틈을 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간 걸까?

“이런, 이런……. 놓쳐 버렸네요. 그나저나 굉장했어요. 러시아어를 쓰는 영국인이라니…….”

디마는 아저씨의 멱살잡이에 잡힌 채 한백년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엥? 지금 뭐라고 했어요?”

“네? 러시아어 하는 영국인이요?”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에나!

한국말 하는 러시아인.

영어 하는 한국인. 그리고…….

러시아어 하는 영국인!

완성됐다. 인생의 트라이앵글! 제기랄, 설마 하니 진짜 있을 줄이야!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천장을 우러러봤다. 우주의 진리를 본 기분이다.

“디마! 너 이 자식, 너무 캐물어! 계속 그런 식으로 굴면 나중에 너희 부모님 칠순 잔치 때 찾아가서 테이블에 똥 싼다!”

아저씨는 살짝 애매한 수준의 협박을 하고 있었다. 물론 디마에게는 효과 만점. 하도 한심해서 시선을 내렸더니, 디마의 뒷목으로 땀이 흥건한 것이 보였다.

“며, 명심하죠. 정말 상상도 하기 싫군요.”

흐음……응? 잠깐만, 한백년이 영국인이라고? 벌떡 일어서서 아저씨와 디마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아저씨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한백년하고 도대체 어떤 관계세요?”

“후우…….”

아저씨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디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식 없는 데서 말하면 안 될까? 저 녀석은 왠지 구역질 나거든.”

뭐, 그 정도야……. 디마를 돌아보니, 디마는 알아서 물러났다.

우리는 디마에게서 떨어져 나초 가게로 갔다. 줄을 서는 동안, 아저씨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슬슬 눈치챘겠지만, 그 아이 이름은 한백년이 아니야. 그건 그냥 국내에서 위장 신분 같은 거지.”

그 가명으로 협회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참가해서 상까지 타려고 한단 말씀이죠? 한백년의 수완이 좋은 건지, 한국지부가 개판인 건지…….

“본명은 말해 줄 수 없다.”

“이해해요.”

“영국인인 건 사실이야. 정확히는 영국에서 내가 주워서 데리고 다녔지.”

복잡한 관계란 건가.

“그러다가 내가 더 이상 저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됐고, 아는 사람에게 맡겼어. 난 저 아이가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길 바랐거든.”

“그런데요?”

“몇 년 후에 맡겼던 사람으로부터 아이가 실종됐단 소식을 들었지. 하지만 그 당시 난……다른 누군가를 신경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만 말해 두마.”

흐음…….

“그래서요?”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내가 알기론 저 아이는 지금 플레잉에 입단했어.”

뭐라고요?

“프, 플레…….”

하도 기가 막혀서 말문이 탁 막혔다. 아저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쟤네가 뭘 할 수 있겠냐? 여긴 지금 보안이 철통같다고?”

그래요,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있는데, 보안이 참 촘촘하겠네요. 미아나 안 생기면 다행이지…….

“휴우, 아이고…….”

지난번 미스터 버드에게서 훔쳐 본 기억이 떠올렸다. 한데 모인 미스터 타이거, 미스터 터틀, 미스터 버드……그리고 양복남자와 원피스소녀. 내가 본 모든 것을 아저씨에게 이야기했다.

“그, 그럴 수가!”

아저씨는 다리를 동동 구르며 눈동자를 떨었다.

“한백년이 제가 본 원피스소녀인 걸까요?”

그렇다면 벌써 작전이 진행 중일 것이다.

“알게 된 이상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 문제는 녀석들이 누굴 죽이려고 하는지 모른단 거야.”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앞에 선 사람들이 많이 줄어 우리가 나초를 살 차례가 되었다.

아저씨는 당당하게 외쳤다.

“종합 세트 하나!”

점원이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런 건 없는데요?”

“메뉴판에 있는 거 하나씩 다 달란 소리야!”

“네?”

점원은 처음 1초 정도 놀라다가 이내 아저씨의 외모를 보고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아……예.”

‘네?’와 ‘아……예.’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감이 있다. 곧 아저씨와 내 손에 거대한 쟁반이 들려졌다. 당연히 쟁반에는 메뉴판에 있는 모든 메뉴가 놓여 있었다.

“우선, 다른 팀원들에게도 알려 줄게요.”

“그래.”

우리는 나초를 들고 함께 객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팀원들에게 나초를 나눠 주면서 내가 본 기억을 말해 주었다.

검은 과부들은 덤, 기기래는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저씨가 헛소리로 붙잡아 두었다.

다들 걱정 반, 기대 반. 뭐랄까, 뚜껑을 따기 전의 탄산음료 같은 얼굴들이다.

그동안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환자 대 환자로군. 끌끌끌! 저런 경우에는 결국 정신력 대결로 가지. 이번 종목에서 좀 이변이 많이 일어났지만, 어쨌든 우리 루호가 이길 거야! 왜냐하면 녀석은 잘생겼기 때문이지. 잘생긴 사람은 언제나 승리해! 예를 들어 첫인상이란 게…….”

아저씨는 쉴 새 없이 떠들며 기기래를 괴롭혔다. 시합은 참 볼품없었다. 루호와 이삼 모두 너덜너덜한 몸 상태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견제하고, 방어만 할 뿐이었다.

“한 방만 잘못 맞아도 끝장이야. 그러니까 우리 잘생긴 루호가 이길 거야. 왜냐하면 드라마 같은 데서도 항상 잘생긴 놈이 이기거든. 그 이유는 주연 배우 몸값이 엑스트라 몸값보다…….”

“그만!”

기기래는 참다못해 수첩으로 아저씨 입을 때렸다.

“좀 닥쳐 주세요! 제발……!”

와, 짱이다. 기자를 빡치게 하다니……. 루호와 이삼의 대결은 무기를 버린 주먹다짐으로 변했다.

서로에게 남은 시간은 공평하게 1분. 두 사람은 각자 상대의 멱살을 잡은 채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렸다. 싸우는 폼이 무슨 동네 술집에서 싸우는 주정뱅이들 같다.

“하하하. 결승이 다 그렇지, 뭐…….”

루호와 이삼 모두 반드시 우승하겠단 각오가 눈에 서려 있었다. 고작 60초 동안 둘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뽑아내서 상대를 때렸다.

지금 링 위에는 화려한 기술이나 확고한 무도보단, 그저 이기고 싶다는 소망만이 가득했다.

루호의 양쪽 원투 펀치에 이삼의 얼굴이 뒤틀렸다. 그러나 충격이 적었기에 이삼도 맞으면서 루호의 배에 깊게 주먹을 꽂았다.

“멍청이들! 뎀프시롤을 써!”

아저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민폐를 끼쳤다.

“권투 종목은 모레거든요? 좀 응원에 집중 좀 하세요!”

뭐, 벌써 검술하고는 너무 멀어져 버린 시합이지만……. 더 이상 링 위에 방어나 회피란 개념은 없다. 그저 자신의 육체와 자신의 주먹만을 믿고 무자비하게 앞으로 뻗을 뿐이었다.

땀과 피가 뒤섞여 뭔지 모를 색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두 사람이 흘린 투지가 링 바닥을 잔뜩 적시고, 그걸 본 관객들의 마음마저 물들인다.

이삼은 주먹으로 루호의 심장 부근을 때렸다. 그러자 루호도 아래에서 위로 팔을 크게 휘두르며 이삼의 턱을 날렸다.

둘 다 동시에 쓰러지고, 제한시간마저 경과. 아마 지금 가장 난처한 사람은 심판일 것이다.

전광판엔 심판의 얼굴이 대놓고 잡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심판의 입 모양을 보면 ‘식빵’이나 ‘빵야빵야’라고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규칙대로 한다면, 둘 다 실격패. 사실상 3, 4위전으로 우승자를 가려야 했다.

“아깝게 됐네요. 하지만 분명 시합은 멋졌어요.”

심판의 판단을 기다리며 기기래가 한마디 던졌다.

“그렇죠.”

놀랍게도 심판은 두 사람을 공동3위로 결정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3, 4위전을 결승전으로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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