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117화
“뭐, 3등이면 나쁘진 않네. 어쨌든 실격해 버린 놈보단 나으니까……. 끌끌끌!”
크윽……굴욕이다! 예상을 뛰어넘은 이변은 3, 4위전에서도 나타났다.
사실상 노 데미지였던 블루스와 부상이 심각한 최상길의 대결. 거기서 부담을 느낀 최상길이 기권을 하고 말았다.
이변의 이변을 넘은 검술 종목의 결말. 최상길의 기권을 발표한 심판에게로 객석에서 쓰레기가 날아왔다.
“꺼져라! 모래반지 빵야빵야!”
“야! 식빵 무지 달다, 팬케이크 아니야?”
“요시 그란도 시즌! 족구하라 그래!”
심판은 관객의 분노를 피해 링 옆으로 몸을 숙였다.
블루스가 우승, 최상길이 준우승, 루호와 이삼이 공동 3등. 아이러니하게도 순위가 딱 능력수치 순이다.
될 놈은 역시 되나보다. 하하하, 내가 돈을 날렸단 사실은 변함없지만…….
내 2천만!
도박은 나쁜 거예요, 여러분…….
협회 직원들과 심판이 부랴부랴 관객들을 달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고, 상품권도 뿌리고……. 그러나 한 번 눈이 뒤집힌 도박꾼들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만!”
그 한마디에 경기장이 고요해졌다. 분노한 관중을 한 번에 침몰시킨 그것은 바로 지부장과 치어리더 팀이었다.
“여자다! 예쁘다!”
도박꾼 중 상당수가 남성이어서 그런지, 몸을 흔드는 치어리더들의 모습에 분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 내일 하게 생긴 천민일은 그런 치어리더들 사이를 거닐며 마음껏, 그녀들의 몸을 더듬었다.
그것도 대놓고……!
“헌터 협회 한국지부장은 발기부전이다, 끌끌끌!”
아저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러자 모두가 그 말을 유행어처럼, 월드컵 응원 구호처럼 외치기 시작했다.
안 돼! 그만 돼! 더 이상 하지 마!
망했다.
지부장 천민일의 표정이 사뭇 살벌해졌다.
천민일은 뒤에 대기 중이던 김익조를 불러 무어라 화를 내고는 필드에서 나갔다.
“또냐?”
김익조와 박장은 엄청 고단해 보이는 얼굴로 지부장을 대신해 수상을 진행했다.
수영 단거리.
1등 한백년
2등 손평화
3등 김선달
수영 장거리.
1등 한백년
2등 한유화
3등 호규
검술.
1등 블루스 김
2등 최상길
3등 이삼, 조루호
수상자들은 준비된 단상에 올라 상을 받았다. 김익조에게 상을 받는 한백년과 블루스 김의 얼굴은 왠지 썩 답답한 눈치였다.
지부장한테 직접 받고 싶었나?
“흐음…….”
한백년과 블루스가 내 기억 속에서 본 원피스소녀와 양복남자라면…….
아까 한백년과 만났을 때 기억을 읽지 않은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됐다.
“김상팔 씨?”
어떻게 해야 하지? 협회에 알려야 하나? 하지만 내 말을 어떻게 증명하지? 과연 내 말을 믿을까?
“김, 상팔 씨?”
그냥 협회의 보안을 믿고 안일하게 생각해? 하지만…….
“김상팔?”
협회의 보안 따위에 플레잉이 물러설 리 없잖아! 크윽, 어째서 나에게 이런 시련이……!
“김상팔!”
“네?”
기기래의 고함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학교 때 날 끔찍이도 싫어하던 수학 선생님이 떠올랐다.
“제가 지금 몇 번을 불렀는지 아세요?”
“죄, 죄송합니다.”
몇 번씩이나 부르게 해서 참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한 세 번만 더 부르게 했다간 치시겠는데요?
주변에서 날 보고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단상 위에 있는 김익조도 내가 있는 쪽을 보고 있었다.
얼굴을 붉히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심각한 와중에 이게 웬 창피야?
“왜 부르셨죠?”
일단 이유나 압시다.
“독점 인터뷰, 잊은 건 아니죠?”
기기래는 다급함 때문인지 살짝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하하하. 이런 영어식으로 기래, 기!
“알고 있어요. 이따가 같이 저녁 식사나 하시죠? 수상 축하도 할 겸……. 어때요?”
“후후후, 좋아요.”
기기래는 안도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음, 웃으니까……예쁘네.
수상이 끝나고, 블루스 김과 한백년은 자취를 감췄다. 분명 단상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쫓기까지 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그 자리에서 증발한 것 같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일까?
의문만을 남긴 채 또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때 검은 과부들, 기기래, 우리 팀이 얽혀서 수준급의 개판을 만든 일은 이제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다.
플레잉에 대해선 까맣게 잊은 채, 우리의 본래 의도대로 그저 즐겁고 활기차게. 다들 즐거운 마무리였다.
문제는 그 다음날 터졌다. 썅!
헌팅 페스티벌 나흘 째.
우리 팀의 주아란과 유정이 각각 격파와 양궁에 참가한 상태였다. 오늘부터는 배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야 순수한 마음으로 팀원들을 응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다 같이 우르르 앉은 후 전광판을 보는데, 격파와 양궁에 참가한 인물 목록 중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최향자, 장만사, 구지태, 남돌진.
‘검은 곰’, 헌터 랭킹 91위 최향자.
헌터 랭킹 61위 장만사.
헌터계의 이단아, 구지태.
헌터 랭킹 68위 남돌진.
최향자와 장만사는 격파에 참가해 아란과 붙고, 구지태와 남돌진은 양궁에 참가해 유정과 붙게 되었다. 그래도 저 네 명 외엔 특별히…….
“엥?”
격파 종목, 조짹짹.
양궁 종목, 곽영욱.
두 사람의 능력수치 총합이 심상치 않다. 둘의 수치 총합은 각각 400과 300.
주아란이 235, 유정이 260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위협적인 상대다.
조짹짹은 긴 실눈에 웃는 얼굴, 곽영욱은 앳되고 안경을 쓰고 있다.
둘 다 평범한 수준의 외모. 너무 평범해서 더 위화감이 든다.
예선 결과 당연히 아란과 유정은 통과. 우선 아란이 참가한 격파부터 시작됐다.
본선 진출자는 아란을 포함해 겨우 4명. 능력수치 총합으로는 아란이 꼴찌였다.
“한 명만 제쳐도 수상인데…….”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어떤 종목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경쟁이 치열한 반면, 어떤 종목은 이렇게 부족하다.
“아란 양, 힘내요!”
루호와 호규가 힘껏 소리쳤다. 아란은 우리가 있는 쪽을 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상팔이 때리듯이 하면 1등 할 거다! 끌끌끌!”
아저씨도 한마디. 그 와중에 기기래가 나타나 어젯밤에 실패한 루호와의 인터뷰를 시도했다.
“조루호 씨! 제발 대답 좀 해 주세요. 왜 은퇴를 번복하셨죠? 김상팔 씨와 어떤 관계죠? 유독 두 사람 사이가 가까운 이유는요? 수많은 유명 헌터 팀의 제의를 거절하시고 헌한발에 들어온 이유가 뭐죠? 혹시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요? 아니면…….”
무시무시한 질문 공세.
루호는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훗!’, ‘흠…….’, ‘노 코멘트하겠습니다.’, ‘글쎄요?’를 돌려 가며 기기래의 질문을 피했다.
물고 늘어지는 기기래나, 그걸 다 쳐내는 루호나 참 찐득찐득하다. 격파 본선에 진출한 4명은 다음과 같다.
1번 장만사
2번 조짹짹
3번 최향자
4번 주아란
격파 순서는 능력수치 총합대로 정해졌다.
격파 기회는 총 3번. 격파물은 인공적으로 뭉쳐서 만든 블록 송판이 쓰인다. 물론 여기서 나오는 송판은 일반 도장에서 시범용으로 쓰이는 플라스틱이 아니다.
무려 합금이다.
장만사의 차례.
역삼각형 몸매의 거구가 아무것도 없는 필드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관중의 반응은 뜨겁다. 아무래도 장만사는 제법 인기가 좋은 편인 것 같다.
“장만사! 스트레스 좀 풀게 시원하게 부숴 버려!”
“장만사! 로얄가드맨의 명예를 지켜라!”
“장만사! 네가 능력수치 1등이야! 꼭 우승해!”
장만사는 보디빌딩 선수처럼 몇 가지 포즈를 취하며 자신의 근육을 뽐냈다. 포즈 한 번, 한 번에 관객의 반응은 점점 뜨거워졌다.
“몇 장을 놓을까요?”
직원이 다가와 장만사에게 물었다.
장만사는 양쪽 주먹으로 옆구리를 짚으며 가슴을 쫙 폈다. 그러자 팽창한 근육에 상의가 찢어지며 맨살이 우람하게 드러났다.
“일단 50장으로 해 볼까? 가볍게 말이야…….”
직원은 격파대와 발받침을 준비한 후 격파대 위에 송판을 차곡차곡 쌓았다.
50장의 합금판은 장만사의 허리까지 올라왔다.
장만사는 양팔을 들어 올리며 관중의 호응을 유도했다. 높게 든 양손에는 강자로서의 여유가 묻어 있었다.
합금판 50장이라…….
헌터 자격시험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장만사는 H력으로 오른팔을 강화, 심판의 신호만 기다렸다.
“준비, 격파!”
심판이 깃발을 내리자, 장만사는 주먹을 내리쳐서 합금판 더미를 때렸다.
정신 집중이나, 기합도 없는 단순한 내려치기. 그럼에도 위력은 확실했다.
장만사의 주먹은 합금판을 박살내며, 격파대 아래까지 도달했다.
“1차 성공!”
심판은 깃발을 올리며 힘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장만사에게 물었다.
“2차 시도는?”
장만사는 어깨를 돌리며 대답했다.
“몸이 좀 풀렸으니, 산뜻하게 60장!”
심판은 입을 벌리며 외쳤다.
“60장?”
심판은 깜짝 놀라며 서둘러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직원들은 부랴부랴 합금 조각을 치우고, 새로이 60장의 합금판을 쌓았다.
심판은 장만사와 격파대 모두 준비가 된 것을 보고는 깃발을 높이 올렸다.
“준비…….”
장만사는 또 오른팔 하나만 들었다. 1차 시도처럼 장만사의 오른손엔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왔다.
“시작!”
또 한 번의 강력한 일격. 깃발과 함께 60장이 박살났다. 객석은 감동의 환호성이 넘쳤다.
심판은 신이 나서 장만사에게 물었다.
“3차 시도는 몇 장?”
“마지막이니까, 화려하게 가지.”
장만사는 열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100장!”
그 말에 장만사를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100장? 이런 미친……!”
“지금까지 기록이 몇 장이지?”
“99장. 그것도 로얄의 기록이야!”
로얄. 그것은 랭킹 헌터 중 10위권 안에 드는 최강자를 가리키는 칭호다. 확실히 10위권 내와 나머지의 실력 차이는 월등하다.
참고로 로얄에 들지 못한 11위부터 20위까지는 ‘2군’이라고 불린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들 역시 엄청난 실력자이지만, 단지 로얄에 비해 부족하단 이유로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역시 상대적이다.
더러운 세상!
“장만사! 장만사! 장만사……!”
모두가 하나 되어 장만사의 이름을 외쳤다. 그만큼 새로운 기록이 탄생하는 순간을 원하는 것이었다.
장만사는 H력을 양팔에 모았다. 이번엔 양손을 사용해 격파하려고 했다.
“보여 주지! 나의 파워! 나의 포스! 나의 스트렝스!”
그냥 힘을 영어로 한 것뿐이잖아.
“준비.”
심판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깃발을 올렸다.
장만사도 거기에 따라 양 주먹을 올렸다.
“시작!”
“으랏차차, 차!”
장만사는 힘차게 기합을 지르며 주먹을 내리쳤다. 주먹은 천둥과 같은 소리를 내며 합금 탑을 찢었고, 단 한순간에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어?”
전부 다 격파하는 데에는 실패.
합금판 더미가 무너지며 조각과 합금판이 뒤섞였다.
심판은 합금판 조각을 치우며 수를 헤아렸다. 그리고 매우 아쉬운 얼굴로 외쳤다.
“100장 중 85장 성공. 3차 시도 실패!”
전부 다 격파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격파를 했어도 실패. 즉, 최종결과는 2차 시도에서 성공한 60장이 된다.
60장에서 갑자기 100장으로 올린 의도는 100장 깨기에 실패해도 60장으로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단 계산이 깔려있던 것 같다.
다음은 조짹짹의 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