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119화
내가 알고 있는 다섯을 넘긴다. 한국지부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는 건가? 썅!
“저기요!”
응? 우리 쪽으로 여자 둘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한 명은 기기래, 다른 한명은…….
“앗!”
한국지부 전략수습부장, 이서현. 그런 이서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투피스 정장은 칼날 같은 것에 갈가리 찢겨 속옷이 훤히 드러난 상태. 그냥 속옷 위에 넝마를 걸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죠?”
아니, 그나저나 우리 여기 있는 건 어떻게……? 기기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씩 웃으며 손에 든 기계를 보여 줬다.
“추적기예요. 상팔 씨 상의에 미리 붙여 둔 거예요.”
와, 이 사람……. 기자가 아니라 범죄자였네.
“지금 그런 표정 지을 때가 아니에요!”
기기래는 내 표정을 읽고는 얼른 이서현을 내 앞으로 떠밀었다.
“도와주세요!”
엥? 뭐라굽쇼!
이서현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이게 무슨…….
“1분 1초가 급해요! 지부장님이 위험하다고요!”
“예?”
모두가 놀랐다. 분명 지부장, 천민일은 김익조와 박장이 데려갔을 텐데?
“지부장님이 돌아가시는 건 단순히 사람 하나 죽는 게 아니에요! 한국지부 전체의 혼란이라고요!”
“어…….”
뭔가 위험한 냄새가…….
“제발요. 지금 사람이 없어요, 직원들은 모두 사람들을 통제하느라 여유가 없고, 통신도 모두 두절됐어요. 페스티벌 첫날부터 중간, 중간 끊기긴 했는데……지금은 완전 두절이에요!”
정식 자격시험 때랑 똑같잖아!
“도와주세요, 김상팔 씨.”
“끄응…….”
“헌한발!”
“크윽…….”
도와주고 싶다. 공명심이나 보상 때문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터의 한 사람으로서 지부장의 죽음만큼은 막고 싶다.
“형!”
루호가 굳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러자 다들 뜨거워진 톤으로 외쳤다.
“팀장님!”
아……다들……. 마지막으로 아저씨를 바라봤다.
아저씨는 히쭉 웃더니, 이서현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손을 들어보였다.
“얼마 줄 건데? 우리 비싸. 알지?”
이서현은 조금 밝아진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많이 드릴게요. 많이, 많이…….”
모두 의견을 통합. 심지어 검은 과부들까지 동참해 주었다.
“하지만 무기가…….”
최향기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 되어 이서현을 바라봤다.
“무기라면 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설명할게요.”
“끌끌끌! 마음에 들어! 그럼 이렇게 하지!”
아저씨는 날름 오른팔에 기기래, 왼팔에 이서현의 허리를 감아서 어깨에 들쳐 멨다.
“어딜 만져요!”
기기래가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러나 아저씨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이서현에게 물었다.
“방향 지시 똑바로 해!”
“네. 저희가 이용한 지하통로로 안내할게요.”
아저씨를 따라 우리는 모두 있는 힘껏 달렸다.
“지부장님은 공격당한 후 지하에 있는 대피소로 가셨어요. 거긴 핵폭발에도 견딜 수 있도록 모든 설비가 갖춰졌거든요.”
“의료설비도요?”
내 말에 이서현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게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
“페스티벌 첫날에 문제를 일으킨 괴물보호 운동가들을 김익조 팀장님이 거기에 가둬 두셨거든요. 무슨 심문을 하신다고요.”
고문이라도 할 생각이었나?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도 플레잉이었다고?
“그래서요?”
“그 사람들이 돌연 능력을 써 대면서 대피소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김 팀장님과 박장 씨가 지부장님을 지하 5층으로 대피시키셨는데…….”
지하에 5층이나 있어?
“지하 4층에 있는 제어실을 장악당하면 대피소의 모든 보안에 손을 댈 수 있어요. 거기만큼은 지켜야 해요!”
사람들이 몰린 출입구가 아닌 건물 구석에 있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문. 아저씨는 문을 발로 차서 부쉈다.
“끌끌끌! 속이 다 시원하군.”
우리는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은 지하에 있는 통로로 곧장 통했고, 통로는 무려 보안실로 연결되었다.
“여기예요.”
아저씨는 기기래와 이서현을 내려놨다. 기기래는 아저씨의 손길에 의해 구겨진 옷매를 가다듬으며 아저씨와 거리를 벌렸다.
보안실. 이름처럼 보안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다.
컴퓨터와 직통 유선전화, 그리고 무기가 든 진열장. 무기 진열장은 급하게 따려다가 포기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냥 부수마. 끌끌끌!”
아저씨는 의자를 들어서 그냥 진열장의 유리를 깼다. ‘와장창!’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졌다.
“끌끌끌! 다급한데 열쇠로 따려는 놈이 이상한 거지.”
아저씨는 몸소 무기를 꺼내 우리에게 나눠 주셨다.
진압용 산탄총과 고무탄, 그리고 접이식 금속 진압봉, 그리고 진짜 실탄이 장전된 리볼버.
플레잉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무장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전부였다.
“자동 화기는 기대도 안 하지만…….”
능력에 의존해서 싸울 수밖에 없다.
“하아…….”
이서현은 보안실 벽에 달린 철판을 가리켰다.
“저걸 열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루호가 H력으로 능력발동, 신체를 강화시켜 단숨에 철판을 뜯어냈다.
활짝 벌려진 철판 안엔 무슨 구멍 같은 것이 있었다.
“여긴 대피소, 그것도 4층의 제어실로 연결된 환풍구예요. 여기로 내려가면 곧장 제어실로 갈 수 있어요. 좀 좁지만, 지금은 이 길뿐이에요.”
완력으로 벽을 밀면서 조심스럽게 내려가지 않으면 그대로 지하 4층으로 추락, 능력발동을 써도 즉사할 높이다.
이서현은 내 손을 꼭 잡으며 한 번 더 애걸했다.
“부탁드려요. 어떻게든 버텨 주세요. 제가 사람을 불러올게요.”
기기래는 이서현을 부축하며 루호에게 윙크를 날렸다.
“아직, 독점 인터뷰 못 받았어요. 알죠?”
루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지독하시네요. 하하하.”
쓴웃음. 루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끝나면 생각해 보죠.”
우리는 차례차례 환풍구로 들어갔다. 그리고 딱 몸통만 한 너비의 공간을 팔과 다리로 밀면서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보호 장비 따윈 없다. 미끄러지면 그대로 추락. 무기를 걸친 채 내려가려니,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맨 위에서 흘린 땀이 모이고 모여서 가장 아래에 있는 나에게 떨어졌다. 와, 꼭 비 맞는 것 같다. 문제는 빗방울에서 지린내가……!
“끌끌끌!”
바로 위, 아저씨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살짝 짜증이 섞여서 아저씨에게 물었다.
“지금, 누가 오줌 지린 것 같은데? 이 냄새는 땀내가 아니야! 끌끌끌!”
썅! 이를 갈면서 후회했다. 왜 내가 맨 아래를 자처했을까.
푹푹 찌는 것 같은 공기는 아래에서 올라와 온몸을 휘감고, 위에서는 온갖 찝찝한 물방울이 떨어진다.
이놈의 쓸데없는 책임감!
우리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가장 먼저 바닥에 내려온 내 눈앞엔 철조망, 그리고 철조망을 통해 제어실 풍경이 들어왔다.
제어실에 있는 20여 개의 모니터는 전부 빨간 띠가 띄워져 있었다.
[비상]
제어실의 요원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마이크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리느라 내가 철조망을 발로 차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철조망을 뜯어내고 제어실로 들어와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 부장님이 보내신 분들이군요?”
요원은 두 팔 벌려 우리를 환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환풍구에서 빠져나와 모두 나처럼 숨을 크게 쉬었다.
흠, 아저씨가 환풍구에 끼지 않은 게 참 신기하네.
땀에 젖은 몸이 미끄러진 덕일까?
“지금 상황이 어떻죠?”
요원은 가장 큰 모니터에 지하 4층의 지도를 띄웠다.
“놈들은 지하 1층에서부터 시작해 현재 4층까지 도달했습니다. 만약 제어실까지 뚫릴 경우 녀석들은 여길 통해 5층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요원은 방 안쪽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일반적인 문과 달리 거대한 두 개의 철문이 서로 엇갈린 형태였다.
“요원들이 얼마나 죽어 나갔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은 녀석들도 꽤 힘을 소진했단 겁니다.”
오호! 그렇다면 해 볼 만한데? 플레잉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지휘 계급인 스페이드와 하트. 물론 능력자인 다이아몬드도 강력한 놈들이다.
졸병인 클럽은 그나마 수월한 편.
내 기억에서의 내용으로 추측하면 양복남자인 블루스 김이 스페이드. 한백년과 미스터 타이거, 그리고 미스터 터틀은 하트일 것이다.
하트 4명 중 하나인 미스터 버드는 현재 필드에서 다른 요원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
아마 꽤 오랫동안은 지원을 받기 힘들다고 봐야 한다.
“놈들은 현재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통로는 모두 5곳입니다.”
“그 통로들의 상황을 볼 수 있을까요?”
전략을 세우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요원은 울상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이 다섯 통로의 감시카메라가 모두 파괴됐습니다. 하지만 각 통로에 몇 명이 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후우, 최악은 아니지만……그렇다고 최선도 아니네.
1번, 2번, 4번 통로는 한 명씩.
3번과 5번 통로는 세 명씩.
분명 1, 2, 4번 통로에 있는 사람은 강자일 것이다.
“일단 저희가 갈 때까지 각 통로에 있는 요원들에게 시간을 끌어 달라고 해 주세요.”
요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마이크에 대고 각 통로에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 난 팀원들과 검은 과부들을 보며 씁쓸히 말했다.
“다른 때도 위험했지만, 이번엔 정말 위험해요. 녀석들은 흉악한 범죄자고……또…….”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다. 분명 모두들 자기 의지로 여기 왔지만……팀원들을 내 손으로 사지에 떠미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딱 이것만 말하자.
“죽지 마요. 알았죠?”
여차하면 도망쳐요, 제발……! 다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각자 어떤 통로에 갈지 빠르게 의견을 나눴다.
1번 통로는 루호.
2번 통로는 호규.
3번 통로는 변해라, 공미, 유정.
4번 통로는 아란, 아라 자매.
5번 통로는 검은 과부들.
나와 아저씨는 제어실에 남기로 했다.
“전 여기 남을게요. 대신…….”
이것만큼은……최후의 최후까지 쓰고 싶지 않았는데…….
“다들 지금부터 잘 들어요.”
지금은 비상시기. 일일이 따질 때가 아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 능력으로 모두를 연결할 거예요. 지금 여기서 무선 통신은 기대할 수 없어요. 요원분의 마이크도 무선 장비가 아니라 내부에 설치된 스피커로 지시하는 거예요.”
이 능력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나이트윙과의 싸움 후 갑자기 깨달은 것이다.
“다들 내 손을 잡아요.”
영문을 모른 채 다들 손을 모았다. 난 그 손들 위에 내 손을 올린 후 힘껏 모두로부터 H력을 흡수했다.
“뭐하는 거냐?”
아저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놀라실 거예요.”
난 입을 굳게 다문 채 모두에게 생각만으로 말을 걸었다.
‘다들 들리죠?’
충격. 모두의 얼굴이 쫙 펴졌다.
‘H력을 흡수한 상대와 정신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어요. 제가 그 사람의 H력을 전부 소비하기 전까진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과도 절 통해서 언제든 대화할 수도 있죠.’
정보만 있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우리도, 플레잉도 같은 능력자!
‘전 여러분을 믿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절 믿어 주세요. 전 여러분에게서 받은 H력을 이용해 여러분의 정신을 엿볼 수 있어요.’
즉, 기억뿐만 아니라 감각까지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난 H력을 준 상대의 기억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H력을 갖고 있는 동안은 그 상대의 감각을 내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다들 힘내요. 제가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 줄게요.’
날 바라보는 12개의 시선. 12개의 다른 각도로 나 자신을 보는 것이 썩 괴상하다.
이제부터 난 우리 팀의 헤드로서 지시를 내린다.
진정한 헤드헌터의 시작이다.
“화이팅!”
내 응원을 들으며 모두들 제어실을 나갔다. 아저씨는 내 등을 두드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능력이 변질되는 것 같구나. 돌연변이나 부작용일지도 모르지.”
“괜찮아요. 그 정돈……각오했어요.”
아저씨는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못 말리겠군. 넌 정말……물건이야.”
“저도 알아요.”
우리는 서로 마주하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