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126화
사실 내가 터뜨린 물건은 수면 연막탄이 아니다.
아무리 정식 헌터라도 수면 연막탄 같은 걸 평소에 지니고 다닐 리가 없잖아. 그게 얼마나 비싼 줄 알아? 하하!
신형 바퀴벌레 퇴치용 연막 살충제 대용량. 가격대비, 연막 기능만큼은 탁월하다.
한돈 아저씨 노점상에서 산 건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미스터 터틀이 있던 지점에는 연막 살충제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처음 한 개를 써서 시야를 가린 후 지속적으로 다음 것을 투척해서 녀석이 질식할 때까지 시간을 번 것이었다.
방어막 해제, 그리고 미스터 터틀이 쓰러졌다.
“대단하세요!”
호규는 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이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러 가요.”
“넵!”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명확했다.
가장 치열하고, 가장 도움이 절실한 통로로 우리는 달려갔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3번 통로조와 치료술사인 한돈 아저씨, 그리고 운반책인 장마리와 기절한 최향기를 제외한 전원이 4번 통로에 집결했다.
원래 4번 통로조인 주아란, 주아라 자매와 5번 통로에서 지원으로 온 최향자, 한유화. 그렇게 네 사람이 버티는 동안 나와 호규, 그리고 1번 통로에서 온 루호가 동시에 도착했다.
각 통로의 상황은 내가 요약해서 중계했기에 다들 간략하게 알고 있었다.
“상황이…… 헉!”
상대는 양복남자, 블루스 김.
일단 우리 셋이 도착했을 때 통로는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원래 있던 주아란, 주아라 자매와 5번 통로에서 지원으로 온 최향자, 한유화.
주아란은 자기 것인지 상대 것인지 얼굴이 피범벅이었고, 주아라의 트레이닝복은 완전히 뜯겨져 형태만 겨우 있었다. 최향자의 손에 들린 진압봉은 기역자로 꺾인 채 분리되기 일보 직전, 한유화의 가죽갑옷은 능력으로 만든 것임에도 여기저기 파손되어서 넝마처럼 보였다.
뭐, 최소한 누가 중상이거나 죽지는 않았다.
“걱정한 것보다 상황이 좋은……건가?”
블루스는 우리와 거리를 벌린 채 양 주먹을 올렸다. 가벼운 권투 자세랄까?
그것만으로도 먼저 있던 네 사람은 몸을 움츠렸다. 뭐지?
“온다!”
최향자의 외침에 네 사람은 일렬로 섰다.
전방에는 최향자.
중간에는 한유화.
후방에는 주아란, 주아라 자매.
나, 호규, 루호는 맨 뒤에 서서 구경했다. 이해하기 힘든 포메이션이지만, 일단 지켜볼까?
맨 뒤의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몸에서 H력이 불타올랐다.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아지랑이를 뿜어내며 자세를 취했다.
블루스는 제자리 뛰기를 시작했다.
“또 동료 분들이 늘었군요. 부디 이번엔 제대로 버텨 주시기 바랍니다. 봐드리는 것도 힘든 일이에요.”
봐줬다고?
블루스는 경쾌한 리듬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가볍게 움직이는 다리는 발레리노의 그것처럼 마치 공기를 밟는 듯했다.
“하압!”
최향자는 짧게 기합을 넣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동시에 블루스를 향해 진압봉을 휘둘렀다.
“이제 당신의 움직임은 훤히 보입니다. 너무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게 위력은 좋을지 몰라도…….”
블루스는 가뿐히 진압봉을 피한 후 최향자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저한텐 안 통합니다. 맞지 않으면 그런 공격은 얼마든지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충격을 받은 최향자의 몸이 안으로 굽혀지며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최향자의 얼굴엔 조금의 변동도 없었다.
“앗?”
갑옷을 두른 한유화가 어느새 최향자의 등 뒤에 있었다. 한유화는 최향자를 뒤에서 끌어안는 자세로 블루스의 주먹을 막아 주고 있었다.
대단하다!
블루스도 나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다.
“대단하군요. 확실히 팀워크 하나는 훌륭합니다.”
“어쩌라고?”
최향자는 고개를 힘껏 뒤로 젖혔다가 바로 앞의 블루스에게 박치기를 날렸다. 그러나 블루스는 주먹을 빼면서 최향자의 박치기를 피했다.
직후, 후방에 있던 두 사람이 앞으로 튀어나와 블루스의 뒤를 막았다.
블루스를 중심으로 앞에는 최향자와 한유화, 뒤에는 주아란, 주아라 자매가 있었다.
“이렇게 하면 빠져나갈 수 없겠죠?”
주아라가 다리에 H력을 모으며 말했다. 그 말에 블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하지만 그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행동반경을 제한하기 위해선 여러분도 지금의 위치를 함부로 이탈할 수 없겠죠?”
“아하!”
아라야, 왜 거기서 ‘아하!’가 나오니?
자매는 각각 주먹과 다리에서 H력을 뿜어내며 블루스에게 돌진했다. 주아란은 진압봉으로 머리를, 주아라는 낮은 발차기로 다리를 노렸다.
블루스는 몸을 돌려 자매를 마주했다.
‘엥?’
블루스의 몸이 출렁이더니, 머리와 다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정확히 머리는 오른쪽으로 90도, 다리는 양쪽 정강이뼈가 바깥으로 이탈해 네모 모양이 되었다.
사람 몸으로 저런 동작이 가능한 건가?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블루스의 양팔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그리고 주먹이 각각 주아란과 주아라에게 날아갔다.
“고무인간?”
두 사람은 간발의 차이로 주먹을 피했다. 그리고 오히려 늘어난 블루스의 팔을 꽉 붙들었다.
“지금이야!”
“지금이에요!”
자매의 구속에 블루스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완전히 뒤로 돌려서 최향자와 한유화에게 말했다.
“맞는 말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회죠. 어서 공격하십시오.”
“망할 자식!”
최향자는 한유화를 뒤에 단 채로 블루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블루스가 뻔히 보고 있는 가운데 최대한으로 H력을 모아 진압봉으로 내리쳤다.
앗!
블루스의 두개골이 함몰되며 진압봉이 마치 자국을 찍듯 움푹 들어갔다. 그러나 출혈과 상처가 전무해 찰흙으로 보일 정도였다.
“소용없습니다.”
블루스는 팔이 잡힌 상태에서 손가락을 늘려 진압봉을 잡았다. 그리고 무려 힘을 주고 있는 최향자의 진압봉을 자신의 머리에서 떼어 냈다!
“시시하군요. 이제 슬슬 뒤에 계신 분들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요?”
뜨끔.
내가 살짝 망설이는 사이, 루호와 호규가 먼저 달려 나갔다.
둘은 블루스의 양옆에 섰다.
오른쪽은 호규, 왼쪽은 루호.
루호가 유성추를 꺼내서 최대속도로 돌리는 동안 호규는 산탄총을 난사했다. 바로 앞에서 대고 쏘는 수준이었기에 빗나가거나, 다른 누군가가 맞을 걱정은 없었다.
고무탄 하나하나가 블루스의 복부에 박혔다. 그러나 블루스는 그러든 말든 진압봉을 완전히 떼어 낸 후 늘어난 손가락으로 주아란, 주아라 자매의 손을 떨쳐 냈다.
고무줄 같은 손가락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자매를 때리더니, 팔까지 자유로워지자 최향자와 한유화까지 때렸다.
단 한 번의 휘둘림에 최향자와 한유화가 분리되었고, 한 번 더 휘두르니 최향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사이 루호의 유성추는 최대속도에 이르렀다.
“하앗!”
고무 재질의 유성추가 루호의 손목을 튕기는 동작에 따라 벽과 천장을 자유롭게 오갔다. 고무공 뒤에 달린 실은 고무공을 따라 블루스를 에워싸며, 거미줄처럼 녀석의 몸을 감아 갔다.
“이번 건 재미있군요.”
블루스는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순순히 유성추의 포박을 받았다.
“당신 능력이 뭔지 모르겠지만,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순순히 잡혀 주시죠.”
침착한 두 사람, 루호와 블루스는 예의 바르게 대화를 나눴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어?’
블루스의 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위아래로 쭉 잡아당긴 것처럼 몸이 늘어났다. 포박이 느슨해지고, 녀석은 그 틈을 타 늘어난 몸을 뱀처럼 움직여 빠져나왔다.
“징그러워! 저거 이젠 사람도 아니잖아?”
한유화가 경악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여태까지 싸워 왔던 네 사람 입장에서도 지금 블루스가 보여 준 것은 파격적인 모양이었다.
블루스는 본모습을 되찾은 다음, 천천히 우리를 둘러봤다.
“생각보다 적게 왔군요.”
생각보다? 적어? 묘하게 짜증이 난다.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어. 플레잉끼리 서로 연락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블루스 하나만 남겨 놓고 모두 처리했잖아?
아직 외부에 미스터 버드가 남아 있지만, 녀석 하나로 지금의 판도가 뒤집히지 않는다. 설사 블루스를 쓰러뜨리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계속 시간을 끌다 보면 외부에서 어떻게든 지원이 올 것이다.
결국엔 시간 싸움, 아저씨까지 합류하게 되면 장기전에서도 절대…….
앗!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저씨를 생각한 순간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내 머리가 멍해진 사이, 자신만만한 호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항복하시지? 남은 건 너뿐이야!”
“그럴 리가요. 아직 ‘미즈 드래곤’께서 남으셨습니다.”
미즈 드래곤?
“소용없어. 우리 쪽도 아직 동료들이 남았거든! 보스인 당신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떻게든…….”
그, 그렇지 않아! 하트급의 상대는 정말 강하다고! 지금 제어실에 있는 인원으로는……! 작전 실수다.
엎친 데, 덮친 격. 블루스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몸까지 떨면서 웃는 모습에 분함보단 위압감까지 들었다.
“후후후. 여러분은 뭔가 엄청난 걸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뭐라고? 다급함 때문인지 내 입에서 고함이 튀어나왔다.
“무슨 착각?”
“플레잉 한국 조직의 보스는 제가 아닙니다.”
뭐? 서, 설마……!
“그분께선 제가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동안 제어실로 가고 계실 겁니다. 저흰 여러분의 개입을 알고 있었으며, 거기에 맞게 적당히 상대해 드렸습니다. 다른 분들이 당한 건 의외였지만, 아직까진 저희의 계획대로입니다.”
한백년이 보스?
충격을 받아서 머리가 어지러운데, 제어실에 있던 유정과 변해라한테서 말이 들려왔다.
‘팀장님! 지금 누군가가 제어실로……!’
‘상팔아! 미스터 빅이 지금……!’
직후 유정, 변해라, 공미의 연결이 끊겼다. 즉, 정신을 잃었단 뜻이다.
바로 아저씨와 장마리를 불렀다. 아저씨는 묵묵부답, 장마리는 제어실을 떠나서 우리 쪽으로 오는 중이었다.
‘마리 씨. 제어실로 가서 어떤 상황인지 알려 주세요. 조심하세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예요.’
나도 아는 게 없다. 한백년, 미즈 드래곤의 능력을 본 것은 직접 관람한 수영뿐이다. 그나저나 아저씨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지?
“두려우십니까?”
흠칫.
블루스가 날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요.”
일단 잡아뗀다. 싸움에선 신체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심리적 요인도 중요하다.
“거짓말이군요. 당신들 모두 두려워하면서 인정하질 않고 있습니다.”
블루스는 순간적으로 팔을 늘려서 주아라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주아라는 미처 반응하지도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지며 기절했다.
“이 자식!”
주아란은 통로 벽 파편을 집어서 달려들었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눈동자는 동생의 복수로 활활 타올랐다. 주아란은 파편으로 힘껏 블루스를 찍어 버렸다.
“젠장!”
블루스의 몸은 펑퍼짐하게 찌그러지며 파편을 받아 냈다. 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쿠션처럼 충격까지 흘려보내고 있었다.
“말도 안……!”
블루스는 다시 몸을 펴면서 그 힘으로 파편을 도로 주아란에게 날렸다. 파편에 안면을 정통으로 맞은 주아란은 뒤로 튕기듯 날아가 쓰러졌다.
블루스는 원래대로 돌아온 후 몸에 묻은 부스러기를 툭툭 털어 냈다.
“이제 다섯 분 남으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