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140화
“내 차례야.”
갈리의 말에 남주나는 벌떡 일어섰다.
“아니! 아직 내 차례 안 끝났어! 아앗!”
옷에 붙은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 남주나는 울상을 지으며 바닥을 굴렀다.
“아니, 지났어. 낄낄낄!”
갈리는 크게 웃으며 남주나를 지나갔다.
남주나가 빠진 사이 태한이 킹메라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남주나만큼은 아니더라도 태한의 민첩한 움직임 또한 괴물 이상으로 빨랐다.
“여기다!”
태한은 코끼리 머리가 뿜는 불꽃을 피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킹메라의 주변은 푸른 불꽃과 H력의 검기, 그리고 광탄이 난무했다.
“킥킥킥킥!”
갈리는 그저 걷기만 했다. 운이 좋게도 킹메라는 태한과 김대팔에게 정신을 뺏겨서 그녀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갈리는 여유롭게 킹메라의 다리에 손을 댔다. 그러자 그녀가 만진 곳을 시작으로 킹메라의 앞발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괴사해 버려라! 낄낄낄!”
헉! 그럼 저 보라색이 지금 세포가 괴사한 거야? 정말 저주란 말이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킹메라는 중간 다리로 앞발을 보조하며, 그제야 갈리를 내려다봤다. 상어 머리가 입을 쩍 벌리며 갈리를 노렸다.
“흐흐흐!”
갈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백 개의 이빨을 즐겁게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냥 상어의 입안에 삼켜졌다.
“갈리가 또 그 짓을 하려는 모양이군.”
최마군의 입에서 푸념이 튀어나왔다.
그 짓?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상어 머리를 쳐다봤다. 갈리를 삼킨 녀석의 빛깔이 갑자기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설마, 식중독이냐!
상어 머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입을 벌릴 때마다 녀석의 입에서 이빨이 빠져서 떨어졌다. 유아치가 뽑힌 듯 뿌리까지 멀쩡한 상태였다.
불과 몇 분 만에 상어 머리의 입안에 있는 모든 이빨들이 빠졌다. 그 후에야 갈리가 튀어나왔다.
“훌륭해! 브라보! 언제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니까!”
우태훈은 박수를 치며 환호를 질렀다.
“나보다 튀어 보여도 용서해 주지!”
갈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킹메라의 체액으로 푹 젖어 있었다.
“이제 됐어. 교체.”
갈리는 일행에게 돌아와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큰 입에서 혀를 쭉 내밀었다.
“찝찝해! 큭큭큭!”
왜 웃는 거야, 도대체?
“그럼 다음은 이 남주나 님이 나가신다!”
“아니. 다음은 내 차례야.”
우태훈이 남주나를 뒤로 밀어내며 일행 앞으로 나섰다.
“잘 보고 있으라고! 시선을 사로잡는 나의 화려한 싸움을 말이야.”
“변태 자식.”
남주나는 구시렁거리며 우태훈을 노려봤다.
우태훈, 헌터 랭킹 12위의 실력자. 겉보기엔 그냥 흰 천 뒤집어쓰고 유령 흉내나 내는 나이 값 못하는 아저씨로 보일 것이다.
지금 나도 그렇게 보고 있다.
우태훈은 과감하게 흰 천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둔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보아라! 나의 몸, 나의 얼굴, 나의 퍼펙트한 외모!”
우태훈은 티팬티만 입고 있었다. 그렇다. 남자 주제에 감히 티팬티를 입고 있는 것이었다. 망할 자식.
거시기를 가리고 있는 천이 꼭 유부 초밥처럼 보였다. 아, 이제 유부 초밥 다 먹었잖아. 한동안 유부 초밥 보면 떠오를 것 같아. 젠장! 나 유부 초밥 좋아하는데! 돈가스만큼 좋아한단 말이야! 나쁜 새끼, 왜 티팬티 색깔이 주황이고 지랄이야. 안 빨았냐?
우태훈은 자기 팬티 색깔처럼 누리끼리한 머리칼을 휘날리며 킹메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보라색으로 변한 다리를 밟으며 수직으로 뛰어올랐다.
이번엔 단번에 상어 머리가 우태훈을 발견. 입을 크게 벌리며 불을 뿜었다.
“오예!”
오예? 우태훈은 기꺼이 불꽃에 휩싸였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아 기어이 킹메라 위에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앗? 우태훈은 조금도 불에 타지 않았다. 신체가 아닌 티팬티가 조금도 그을리지 않은 걸 보면 불 자체에 면역이 있기보단 뭔가 능력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쇼타임!”
우태훈은 양손을 위로 치켜들며 H력을 모았다. 코끼리 머리가 코를 뻗어 그에게 불을 뿜었지만, 우태훈은 불에 휩싸인 채로 계속 H력을 증폭시켰다.
“더, 더! 더, 더, 더!”
손바닥 끝에서 형성된 H력 덩어리는 점점 커졌다. 그 모습은 완전히……!
태한은 H력을 모으는 우태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멀었나?”
“조금만 더!”
김대팔은 잽싸게 뒤로 빠져서 일행이 있는 쪽으로 도망쳤다.
“갑자기 왜 오셨어요?”
“이제 곧 큰 게 떨어질 겁니다.”
큰 거! 우태훈의 H력 덩어리는 지름 1m, 2m, 3m를 넘어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
앗! 코끼리 코가 태한을 후려쳐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태한은 고꾸라진 채 일어서지 못했다.
“태한!”
서둘러 태한에게로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어라 외쳤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괜찮아?”
몸을 낮춰 태한을 잡았다. 그 순간 태한이 날 잡아서 오히려 내 몸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엎드려!”
“뭐?”
“이제 곧 ‘광기옥’이 터진다고!”
그때 킹메라의 위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대기를 통해 엄청난 압력이 전해 왔고, 그것으로 폭발의 위력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킹메라는 폭발의 충격을 버텨 내려 했지만, 보라색 앞발이 부러지며 결국 육중한 몸뚱이가 주저앉았다.
“섹! 시!”
우태훈은 킹메라 앞으로 뛰어내려 멋지게 착지. 한껏 포즈를 취하며 자신의 멋에 취했다. 미친 자식.
“나의 통과 능력과 광기옥 앞에 적수는 없…….”
우태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 코끼리 코가 그를 힘껏 때렸다. 4번 타자의 홈런처럼 우태훈의 몸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
남주나는 멀어져 가는 우태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따라 손평화와 갈리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태한은 일어선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
“쳇!”
나도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비록 우태훈의 광기옥이 킹메라를 주저앉게 만들었을지라도 녀석의 전투 능력은 조금도 상실되지 않은 상태였다.
상어 머리와 코끼리 머리는 쉬지 않고 불을 내뿜었다. 상어 주둥이와 코끼리 코에서 나오는 푸른 불꽃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우리는 양쪽으로 갈라져 불을 피했다. 그리고 각자의 방향에서 킹메라에게 대적했다.
“하앗!”
태한은 검기를 쏘면서 상어 머리를 상대했다.
난 아직 꽤 멀쩡한 코끼리 머리와 싸웠다.
일단 리볼버를 쐈다. 하지만 리볼버는 어디까지나 견제용. 녀석에게는 모기가 무는 것 이하일 테다. 일부러 눈을 노리고 쐈는데도, 코끼리 머리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엔 순수한 파워! 한손으로 총을 쏘면서, 다른 손에 무광탄을 모았다.
“양질의 H력을 받아 둬서 다행이야.”
작정하고 빨아들인 것도 아닌데, H력이 가득이었다. 나중에 최마군에게 치료의 답례 겸 밥이라도 사 줘야할 것 같다.
“최강의 무광탄을 보여 주마!”
압축, 또 압축. H력을 응축시킬수록 나중에 터뜨렸을 때의 위력은 배가 된다.
코끼리 머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코를 휘둘렀다. 그리고 코끝에서 불을 뿜었다.
다리로는 불꽃을 피하고, 한손으로는 사격, 다른 손으로는 무광탄을 만든다. 한 번에 세 가지를 하려니 미칠 노릇이었다.
높이 뛰어올라 코끼리 코에 착지했다. 물론 계속 움직이는 코 위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몸을 엎드린 후 리볼버를 권총집에 넣었다. 그리고 빈손으로 코끼리 코 표면을 꽉 움켜쥐었다.
압축, 또 압축. 평소보다 더 작게 무광탄을 만들었다. 무광탄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폭발할 때의 위력은 배가 될 것이었다.
“상팔 씨!”
우태훈 다음 차례였던 손평화의 로봇이 킹메라 옆으로 다가왔다.
손평화는 로봇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를 냈다.
“도와드릴게요!”
로봇은 와이어를 발사해 코끼리 머리를 감았다. 그러자 코끼리 머리는 안간힘을 쓰며 목 힘만으로 와이어에 버텼다.
킹메라의 크기와 비교하면 인간이나 로봇이나 오십보백보. 그럼에도 로봇의 출력은 거대한 킹메라와 힘겨루기를 할 정도였다.
코끼리 머리의 주의는 나에게서 로봇에게로 옮겨 갔다.
“좋았어!”
드디어 무광탄의 압축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앗!”
코끼리 코에서 나온 불꽃이 로봇에 불을 붙였다. 역시 사람에 비해 민첩성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손평화 씨, 도망쳐요!”
내 고함에 손평화는 스피커로 답했다.
“전 괜찮아요. 상팔 씨, 어서 이 틈에 녀석을 공격하세요!”
젠장. 이게 먹힌단 보장도 없는데……! 서둘러 코끼리 머리에 근접. 무광탄이 든 손바닥을 녀석에게 댔다. 이 상태로 폭발시키면 내 팔뿐만 아니라 내가 통째로 날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
새로이 얻은 광권으로 손을 감쌌다. 이렇게 하면 영거리 무광탄을 써도 내 손에 전달되는 충격이 최소화될 것이다.
“받아라!”
코끼리 머리 바로 옆에서 무광탄을 쐈다. 거대한 충격이 녀석을 강타. 코끼리의 뺨이 일그러지며, 상아가 쪼개졌다. 뺨에서부터 시작된 붕괴는 머리 전체로 확산. 코끼리 머리가 너덜너덜해졌다. 무섭게 불을 뿜던 코끼리 코도 풍선처럼 부풀다가 펑하고 터졌다.
단번에 코끼리가 멧돼지처럼 변했다. 그러나 녀석은 완전히 죽진 않았다. 반쯤 튀어나온 두 눈에는 아직 살기가 등등했다.
한편, 손평화가 탄 로봇은 불꽃에 휩싸여 완전히 휩싸였다. 자잘한 폭발과 함께 로봇에 붙은 화마가 점점 커졌다.
“손평화 씨!”
펄쩍 킹메라 위에서 뛰어내려 로봇에게로 향했다. 내가 내려가자 킹메라의 머리들은 모든 신경을 태한에게로 집중했다.
“괜찮아요?”
광권으로 양손을 강화시킨 다음 불에 타고 있는 로봇의 표면을 뜯어냈다. 그리고 안에서 질식으로 인해 정신을 잃은 손평화를 조심스레 들었다.
내가 막 손평화를 꺼내자마자 로봇 내부에서 스파크가 터졌다. 그리고 큰 폭발이 일어나며 로봇이 펑 하고 굉음을 냈다.
“젠장!”
손평화를 안고 미친 듯이 달렸다. 뒤에서 몇 번의 폭발이 더 일어나더니,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때 로봇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꽤 좋은 로봇이었는데, 아깝다.
“마군 씨!”
최마군 앞에 손평화를 내려놨다.
“전 다시 갈게요!”
태한을 지원하기 위해 또 달리려는 찰나, 킹메라의 상어 머리가 비명을 질렀다.
“앗!”
태한이 쏜 검기가 기어이 상어 머리를 벴다. 그냥 생채기가 아니라 몸통에서 통째로 떼어 낸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반쯤 죽여 놓은 코끼리 머리는 김대팔의 광탄 연사를 맞아 완전히 눈을 감았다.
킹메라, 3개의 머리 전멸!
“해냈다!”
환호를 지르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생각해 보면 다소 싱거운 결말이었지만, 꽤 위험한 상대이긴…….
엥? 태한이 김대팔을 향해 소리쳤다.
“떨어져!”
김대팔은 군말 없이 태한의 지시에 따라 일행 쪽으로 달렸다.
태한은 바닥에 착지한 후 킹메라를 경계했다.
앗! 킹메라의 몸통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안에서 뭔가 다른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몸통 여기저기가 삐죽빼죽 튀어나오다가 들어가는 것을 반복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태한은 H력을 끌어 모아 킹메라에게 검기를 날렸다. 이번엔 여태까지의 것과 달리 어마어마한 크기의 칼날이었다.
“하앗!”
검기는 킹메라의 몸통을 양단했다. 두 갈래로 베인 몸통은 좌우로 갈라지며 무너졌다. 그리고…….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