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150화
“저 의원님은 작년에 은닉한 재산이 발각되어서 대대적인 조사를 받았어요. 별로 화제가 되진 않았지만 지금 아마 거의 빈털터리일 거예요. 추징금이 붙어서 여기서 돈을 따지 못하면 파산이에요. 그리고 그 옆에 사장님은 겉으로는 멀쩡해도 회사가 부도나기 일보 직전이죠. 다들 비슷비슷한 이유로 돈이 절박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기리래의 말마따나 다들 하나같이 표정이 심각했다. 긴장으로 땀을 흘리고 배시시 웃으며 서로를 적대하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돈에 절박하지 않은 사람은 랭킹 헌터들 정도인가 보네요.”
날 제외하고 참석한 랭킹 헌터들. 그들은 각각 랭킹 1위 김용, 랭킹 2위 이태한, 랭킹 8위 오이해였다. 다들 재산만 놓고 보면 웬 만한 대기업 사장급일 것이다.
“아참!”
기기래가 맨 구석에 있는 김익조를 가리켰다.
“저분도 마찬가지고요. 지부장인데, 지부에 빚을 지는 게 의미가 없죠.”
김익조. 그는 근엄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다만 예전과 달리 조금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제1경기를 시작합니다. 먼저 도전자 선정!”
이서현의 외침에 로얄인 이준을 제외한 나머지 9명의 얼굴이 스크린에 떴다. 그리고 룰렛처럼 얼굴이 번갈아 뜨더니 한 사람이 선택됐다.
“첫 번째 도전자는 바로 이경신 씨입니다!”
랭킹 30위, 슈퍼타이거 소속 이경신. 그녀를 제외한 다른 헌터들은 조용히 필드에서 물러나 따로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이서현은 이경신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럼 상대를 지목해 주세요!”
랭킹전은 자신보다 높은 랭킹의 상대와 싸워서 그 랭킹을 뺏는 것. 이경신은 큰소리로 외쳤다.
“김경진 씨와 싸우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김경진 씨 나와 주세요!”
호출된 김경진이 다시 필드로 올라왔다.
이서현은 필드에서 물러나 외곽에 설치된 심판석으로 올라갔다. 거기엔 그녀뿐만 아니라 지부의 다른 직원들도 있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맨손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 외엔 모든 게 허용됩니다. 물론 능력으로 무기 같은 걸 만드는 일도 허용합니다.”
[이경신 VS 김경진]
스크린에 이름이 떴다. 이서현은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배팅해 주세요! 배팅은 팔찌에 대고 음성으로 하셔도 되고, 아니면 방 안에 있는 직원에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다들 웅성거리며 어느 쪽에 돈을 걸지 고심했다.
기기래는 팔꿈치로 날 툭툭 치면서 속삭였다.
“어느 쪽에 걸 거예요?”
“기래 씨 생각은요?”
“일반적으론 랭킹이 더 높은 김경진이 이길 것 같지만, 요즘 상승세는 이경신이에요. 어금니의 헌터들은 실제 실력에 비해 랭킹이 좀 부풀려진 감이 있거든요.”
“그렇군요. 근데 다른 사람들도 아는 것 같은데요?”
내가 스크린을 가리키자 기기래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경신 9 VS 김경진 0]
날 제외한 모두가 선택을 마친 뒤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이경신이었다.
“다들 정보에 빠삭하네요?”
“흥!”
기기래는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날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래서 상팔 씨는 누구한테 거실 거죠?”
“저요?”
난 팔찌에 대고 ‘불참’이라 말했다.
“왜죠?”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어요.”
내가 불참하자 그것으로 배팅이 종료됐다.
이경신을 고른 9명 중 랜덤으로 선택된 4명이 김경진 쪽으로 옮겨졌다.
[이경신 5 VS 김경진 4]
“그럼 시합을 시작합니다!”
커다란 신호음과 함께 필드의 두 사람이 움직였다. 둘은 전신에서 H력을 뿜어내며 능력을 발동했다.
“왜 걸지 않은 거예요? 이러면 다음엔 무조건 걸어야 하잖아요?”
기기래의 질문에 난 손에 찬 팔찌를 가리켰다.
“돈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승부하면 돼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그러다가 2경기 때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면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요.”
모두의 예상대로 1경기는 싱겁게 결판이 났다. 이경신은 액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관절기를 써서 빠르게 김경진을 제압했다.
[승자 이경신]
“랭킹 상승을 축하드립니다! 이 시간부로 랭킹 20위는 이경신 씨입니다.”
승자인 이경신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여기 있는 열 명 중 넷은 확실하게 돈을 잃은 상황. 경기가 끝나면 팔찌에 달린 액정화면을 통해 배팅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난 조용히 방 안에 대기 중인 직원에게 가서 물었다.
“빌릴 수 있는 액수에 제한이 있나요?”
직원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알려줬다.
“김상팔 님 같은 경우엔 최대 200억까지 빌리실 수 있습니다.”
“정말요?”
“그럼요.”
상당히 후한데? 덕분에 난 살았다.
활짝 웃으며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2경기의 도전자인 장마리가 필드로 올라와 있었다.
“전 조루호 씨와 싸우겠습니다.”
흠칫. 장마리의 선언에 루호가 필드로 올라왔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섰고, 방 안은 다시 배팅으로 소란스러웠다.
[장마리 2 VS 조루호 2]
먼저 배팅한 넷의 선택이 반반으로 갈렸다. 날 포함한 나머지 여섯은 꽤나 신중하게 고르고 있었다.
“마리 씨, 미안해요.”
난 팔찌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조루호에 200억.”
[장마리 4 VS 조루호 6]
근소하게 루호에 대한 배팅이 앞섰다. 그리고 날 제외한 다섯 사람 중 한 명의 배팅이 강제로 장마리에게 옮겨졌다.
“누가 이길까요?”
기기래가 내 팔에 팔짱을 끼며 방 가장자리로 당겼다. 난 그녀를 따라 벽 대신 붙은 유리 앞에 서서 루호와 장마리를 내려다봤다.
“전 루호를 믿어요.”
“둘이 꽤 친한가 봐요?”
“친하고, 안 친하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난 진지한 목소리로 기기래와 눈을 마주쳤다.
“루호는 믿을 수 있어요.”
“시작!”
루호는 능력발동만 한 채 장마리를 경계했다.
장마리는 능력발동 후 능력발현까지 했다. 그녀의 머리에 불이 붙으며 활활 H력을 태웠다.
장마리는 빠르게 필드를 박차고 달렸다. 그리고 질풍 같은 속도로 루호의 주변을 돌았다.
“아무리 조루호 씨라도 저 속도에는 반응하기 힘들 거예요. 무기라도 있다면 모를까, 어떻게 방어를 하겠어요?”
기기래의 질문에 난 유리 벽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녀의 말처럼 장마리는 빠른 속도를 살려 루호의 사각에서 한 방, 한 방 공격을 가해 왔다.
“오”
내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장마리의 공격은 바람이 불어 땅을 쓸 듯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다.
“실력이 더 좋아졌네.”
루호는 장마리의 주먹과 발차기가 몸에 닿을 때마다 몸을 움직였지만 계속해서 한 발 늦었다.
“왜 조루호 씨는 능력발현을 안 하죠?”
기기래가 의아스레 물었다. 난 검지를 펴서 입술에 댔다.
“비장의 무기니까요.”
장마리의 계속된 공격에 루호의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흐름대로라면 이제 슬슬 결정타를 날릴 때였다.
장마리는 속도를 더 높여 쥐불놀이의 불꽃처럼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러다 급하게 방향을 꺾어 루호에게 돌진. 두 사람이 맞부딪쳤다.
“어?”
기기래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났다.
장마리는 루호를 날려 버리려는 의도와 다르게 루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녀가 내지른 양 주먹이 루호의 복부를 찌르고 있었지만, 루호는 그것을 견뎌내며 그녀를 꽉 붙잡았다.
속도를 잃고 힘으로 겨루게 된 이상 그녀에게 승산은 없었다. 루호는 박치기 한 번으로 장마리를 기절시켰다.
[승자 조루호]
내 팔찌의 화면으로 무려 46억을 벌었다는 글자가 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3경기. 도전자는 랭킹 79위의 박산이었다. 그는 필드로 나와 크게 소리쳤다.
“조루호 나와라!”
또 루호를 지목했다. 둘의 랭킹은 고작 4위 차이였으나 루호는 장마리와의 대결로 엉망진창이었다.
[박산 5 VS 조루호]
배팅을 시작하자마자 박산에게 벌써 절반의 인원이 몰렸다.
“조루호 씨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무리를 해서라도 박산에게 배팅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기기래가 염려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난 그녀와 함께 방 안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다들 박산에게 배팅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박산 9 VS 조루호 0]
“와!”
기기래가 숫자를 보며 깜짝 놀랐다. 이건 거의 일방적인 수치였다.
“상팔 씨만 남았는데요?”
“그러게요.”
난 유리 벽 앞으로 돌아와 필드에 선 루호를 바라봤다.
루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꼿꼿이 서 있었다.
“조루호에 256억.”
루호를 믿을 수밖에 없다. 동료를 믿지 않고서야 지금 당장 살아남아도 앞으로 다가올 큰 싸움에선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니 난 루호를 믿는다.
[박산 9 VS 조루호 1]
네 사람의 배팅이 루호에게로 옮겨 갔고, 시합이 시작됐다.
“큰일이네요. 박산은 꽤나 강한데요.”
기기래의 우려대로 박산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멀리 떨어진 우리 눈에 증기처럼 보일 정도로 진했다.
“핫핫핫!”
박산이 기합을 넣자 그의 아지랑이가 구름처럼 몽실몽실해졌다. 그리고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점차 형체를 갖춰 갔다. 그것은 바로 박산의 모습이었다.
“분신?”
내 혼잣말에 기기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산은 H력으로 자신과 똑같은 분신 셋을 만들어 냈다.
“이러면 4대1이잖아?”
루호는 조금 전 장마리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던 것처럼 네 명의 박산에게 구타당했다. 나름 방어를 하며 공격을 최소화했지만 워낙 공격이 거칠어 다 막아 내질 못했다.
“핫핫핫!”
네 명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움직였다. 각자 동서남북으로 루호를 둘러싸서 타이밍을 맞춰 공격했다. 루호가 양팔을 휘둘러 둘을 공격하면 나머지 둘이 그것을 막아서 밀쳤다.
결국 루호도 전신에서 H력을 뿜어냈다. 루호의 몸에서 나오는 아지랑이는 박산의 것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뿜어져 필드 전체로 퍼졌다.
“뭐지?”
네 명의 박산은 루호의 능력을 경계하며 루호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의 패인이었다.
그가 그랬듯이 루호도 H력에 둘러싸였고, 능력발현을 통해 흰 사슴의 모습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거대한 괴물이 필드에 등장하자 방 안은 크게 술렁였다.
“핫핫핫!”
네 명의 박산은 사방에서 루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괴물이 된 루호는 그냥 정면에 오는 박산을 뿔로 받아 버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사슴뿔에 채인 박산은 ‘퐁’소리와 함께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루호는 필드 끝까지 달려가 뒤돌아섰다.
세 명의 박산은 나란히 서서 자신들과 마주한 괴물을 경계했다.
루호가 그들을 향해 돌진. 세 박산도 H력을 뿜어내며 능력발동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신체 능력을 올려도 이미 체급에서 차원이 달라진 루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세 명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라 허무하게 추락했다.
펑 펑 퍽. 두 개의 분신은 사라지고, 본체는 바닥에 떨어졌다.
[승자 조루호]
“됐어요!”
나와 기기래는 서로 끌어안고 좋아라,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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