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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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충격파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VIP룸 바닥이 흔들렸다.
“으으으윽!”
천장까지 박살 나면서 전광판과 스피커까지 박살이 났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필드를 살펴봤다.
필드에 낀 자욱한 먼지구름. 그것을 해치며 루호가 걸어 나왔다.
전격의 영향인지 완전한 알몸이 된 루호는 숨을 헐떡이면서 간신히 서 있었다.
“루호 씨!”
기기래는 벌떡 일어서서 루호를 내려다봤다. 그녀를 따라 몇몇 여성들이 루호의 몸을 보기 위해 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럼 평화 씨는……?”
먼지가 걷히고, 손평화의 모습도 드러났다. 그녀는 기절했는지 떨어진 천장 파편 사이에 누워 있었다.
물론 손평화 역시 알몸이었다.
“젠장! 전광판은 왜 이럴 때 깨진 거야!”
남성들이 절규하는 사이, 난 H력을 발동해서 룸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빠르게 몸을 날려 손평화에게 다가갔다.
“평화 씨?”
손평화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다행히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로봇을 탄 덕인가?”
난 서둘러 내 옷을 벗어서 그녀에게 입혔다.
내가 손평화를 들고 필드를 나올 때쯤 박장이 직접 필드로 나와 육성으로 외쳤다.
“승자는 조, 루, 호!”
이렇게 15번에 걸친 랭킹전이 모두 끝났다.
루호는 당당히 한국지부 소속 2위의 로얄로 인정받았고, 더 이상 거기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싸움의 여파로 루호는 당분간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부르셨죠?”
또 디마와의 커피 타임. 녀석은 주말에 쉬고 있던 날 카페로 불러냈다.
“지난번에 못 드린 이야기를 하려고요. 괜찮으시죠?”
괜찮으니까 나왔겠지?
난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럼요. 그러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항상 하시던 대로요.”
“하하하. 그럼 그러죠.”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할 거면서 예의바른 척하긴…….
디마는 품속에서 문서 한 장을 꺼내 내게 보여 줬다.
“이게 뭐죠?”
한국지부의 헌터 랭킹 21위, 27위, 31위, 36위, 40위 등등.
여러 랭킹 헌터가 사고를 당해 반신 불구가 되거나, 사냥 구역에서 실종됐단 내용이었다.
“엥?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왜 뉴스가 나오지 않았죠?”
“지부에서 정보를 통제하고 있으니까요. 사냥업계에 관련된 일들은 지부에 절대적인 권한이 있죠.”
“지부에서 이런 일을 숨긴다고요?”
“정확히는 지부가 아니라 박장이에요.”
“예?”
그 안경 낀 소갈머리 아저씨가?
난 문서를 디마에게 돌려줬다.
“왜 이런 이야기를 알려 주시는 거죠?”
“혹시 상팔 씨도 사냥 구역에서 누군가에게 공격당한 적 없으신가요?”
공격당한 적?
그 순간 우태훈 일행이 공격당한 일이 떠올렸다.
“있어요!”
난 우태훈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디마에게 들려줬다.
“역시 그랬군요.”
디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요즘 들어 랭킹 헌터들이 공격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어요. 지부에선 이 일을 해결할 생각 없이 은폐하려고만 하고 있죠.”
“그래요?”
지부 이 새끼들!
“그래서 그 일로 상팔 씨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요?”
디마는 히죽 웃으며 검지를 까딱였다.
“다음 주에 랭킹 모임이 열려서 지부 문제를 의논할 거예요. 현재 루호 씨는 병원에 입원해 계시니까, 당연히 상팔 씨가 루호 씨의 대리를 하시겠죠?”
“뭐, 아마도요?”
대리? 그런 게 필요한가? 나도 엄연히 따지면 100위의 랭킹 헌터인데?
디마는 내 표정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모르시는 것 같으니까 설명 드리자면, 지부에서 안건을 정할 때 랭킹 헌터들의 표가 꼭 필요해요. 1인당 1표가 원칙이지만, 로얄들은 1인당 10표를 행사할 수 있죠.”
“예?”
1인당 10표? 그럼 로얄끼리 담합하면 나머지는 필요가 없네?
“또한 일반 랭킹 헌터와 달리 로얄은 직접 안건을 낼 수 있어요.”
“안건이 통과되면 지부가 들어주나요?”
“원칙적으로는 그래요.”
쩐다! 그래서 다들 로얄이 되려고 혈안이 됐던 거구나!
난 그냥 랭킹 높은 게 멋지니까, 1위가 되려던 거였는데…….
“어쨌든 랭킹 모임 때 지금 제가 보여 드린 일을 꼭 언급해 주세요. 어쩌면 상팔 씨가 하지 않으셔도 다른 랭킹 헌터가 할지도 모르겠지만요.”
“예. 꼭 그럴게요!”
난 디마에게 약속하면서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런데 왜 디마 씨는 이런 걸 저한테 알려 주시는 거죠?”
도대체 정체가 뭐냐?
디마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제 정체보다 핸드폰에 더 집중하시는 게 어떨까요?”
“예?”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울리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난 허겁지겁 휴대전화를 꺼내 받았다.
“여보세요?”
―상팔 씨!
손평화였다.
“평화 씨?”
디마는 날 보며 윙크하더니 먼저 카페를 나섰다.
하여간 치고 빠지는 일에는 무서울 정도로 정밀한 놈이다.
―상팔 씨, 저 도넛이 먹고 싶은데 사다 주실래요?
“지금이요?”
―네! 한가하시죠?
“한가하긴 한데…….”
손평화까지 너무 확고하게 한가하냐고 물으니까 좀 씁쓸하다.
“알겠어요. 지금 갈게요.”
어차피 손평화가 입원한 병원에 루호도 입원해 있다.
간 김에 디마가 알려 준 대리 자격인지, 뭔지도 상의해 봐야겠다.
난 카페를 나서서 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부 휘하 헌터 전문 병원.
나도 예전에 이곳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이곳의 설비와 치료 수준은 가히 국내 최고라고 불릴 만했다.
“평화 씨, 도넛 사 왔어요.”
난 1인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상팔 씨!”
손평화는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날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잡지를 내려놨다.
“잘 먹을게요.”
손평화는 내가 사온 도넛 세트를 혼자서 다 먹어 치웠다.
“자, 잘 드시네요.”
“네! 어라? 상팔 씨는 왜 안 드세요?”
“하하……하……. 그, 그럼 전 이만……!”
황급히 손평화의 병실을 나와 이번엔 루호의 병실로 갔다.
“앗!”
병실 문 앞까지 가셔야 루호에게 줄 도넛까지 손평화가 다 먹어 치웠단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하지?”
루호라면 화를 내진 않겠지만…….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앗!”
안에는 먼저 온 기기래가 루호와 아주 가까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난 삼강오륜의 정신을 본받아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 젠장…….”
기기래가 눈을 흘기며 날 째려봤다.
난 혀를 쭉 내밀며 응수했다.
“형, 오셨어요?”
“응.”
난 예비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마침 기기래 씨도 계시니, 잘됐네요. 두 사람하고 상의할 일이 있어요.”
기기래를 팔짱을 끼며 눈썹을 찡그렸다.
“흥미롭네요. 말해 보세요.”
***
일주일 후, 랭킹 모임.
우리 팀은 전원 한국지부의 35층에 도착했다.
“드디어 왔다!”
이이는 환호를 지르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난 서둘러 그를 말렸다.
“쉿! 여기서부턴 조용히 해 주세요.”
물론 이이의 기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도 여기 처음 왔을 땐 정말 기분이 설렜다.
“다른 팀은 어떨까?”
사전에 조사한 대로 35층에 모인 랭킹 헌터들을 훑어봤다.
어금니는 로얄 2명에 랭킹 헌터 10명. 다해서 30표.
슈퍼타이거는 로얄 2명에 랭킹 헌터 5명. 다해서 25표.
공포특급은 로얄 2명에 랭킹 헌터 5명. 다해서 25표.
로얄가드맨은 로얄 1명에 랭킹 헌터 7명. 다해서 17표. 거기에 휘하에 거느린 연맹 팀들의 랭킹 헌터 6명. 다해서 23표.
확실히 빅4의 표만 합쳐도 103표. 과반수가 넘는다.
다음은 그 아래.
빅4에 근접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폭발대제가 로얄 1명에 랭킹 헌터가 9명. 다해서 19표.
다음은 우리, 헌한발!
현재 헌한발의 랭킹은 이렇다.
[조루호 2위]
[변해라 83위]
[노건 89위]
[호규 92위]
[주아란 93위]
[유정 94위]
[이이 95위]
[김상팔 100위]
랭킹 헌터 100명에 주어진 총 190개의 표 중에 우리 팀이 소유한 표는 모두 17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유일한 솔로 로얄. 오이해가 10표.
그리고 나머지 랭킹 헌터 41명이 각각 1표씩 갖고 있는 상황이다.
“아라는 안 보이네?”
주아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결석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 아마 이것이 오늘 투표에서 변수가 될 것이다.
“언니는 오늘 휴가 갔어요.”
아란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어휴! 이럴 때야말로 아라가 필요한데……!”
박장이 단상으로 올라와 마이크로 말했다.
“자자, 주목해 주십시오. 오늘 랭킹 모임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단상 위 천장에서 스크린이 내려오고, 프로젝터가 거기에 영상을 띄웠다.
스크린에 비춰진 것은 바로 그래프였다. 박장은 그래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오늘 랭킹 모임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단 한 분, 휴가를 떠나신 분을 제외하면 기적적으로 거의 모든 랭킹 헌터께서 참가해 주셨군요.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표에는 각 팀별 참석한 랭킹 헌터 숫자와 그 명단이 쓰여 있었다.
“언니!”
아란은 창피해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럼 오늘 랭킹 모임의 주제인 안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장의 말이 끝나자, 프로젝터가 다른 영상을 띄웠다.
“우선 물가 상승에 따른 사냥 수수료 인상 및 지부 예산 절감으로 인한 지원 혜택 축소입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저기에 찬성투표를 해? 헌터라면 당연히 반대해야 하는 거 아니야?
영상에 띄워진 지부의 재정 상황 가운데 정체불명의 이유로 수천억의 손해가 발생한 점이 묘하게 눈에 띄었다.
거기에 맨 아래 작은 글씨로 ‘종교적 기금’이란 항목으로 수억에서 수백억이 지출되고 있는 점도 상당히 거슬렸다.
“그럼 지금부터 투표용지를 나눠 드리겠습니다.”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랭킹 헌터에게 투표용지를 나눠 줬다.
난 루호의 대리인 자격도 갖고 있기에 투표용지를 무려 11장이나 받았다.
“후후후.”
11장 모두 반대! 당연히 우리 팀 전원은 반대를 했다.
잠시 후 직원들이 표를 걷어 가고 모두가 보는 단상 위에서 박장이 표를 확인했다.
“반대, 반대, 반대…….”
박장이 표를 부를 때마다 스크린에 찬성, 반대 표수가 개재됐다.
“역시 예상대로 쭉 반대가…….”
그때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찬성, 찬성, 찬성…….”
찬, 성? 뭐지? 왜? 어째서? 자기 혜택이 줄어드는데 찬성을 했다고?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헌터라면 여기서 다소 이기적이더라도 반대를 할 것이다.
“엄청나게 지부에 충성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난 슬쩍 어금니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쳐다봤다.
“뭔가 뒷거래가 있었단 뜻이겠지?”
투표 결과.
[찬성 : 108]
[반대 : 81]
“그럼 해당 안건은 통과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찬성이 108표씩이나?
나뿐만 아니라 여러 테이블에서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그럼 혹시 여기 계신 로얄 분들 중에 안건을 제안하실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손을 든 사람은 셋.
나, 김용, 그리고 신진부였다.
박장은 우리 셋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그럼 랭킹 순서대로 듣겠습니다. 우선 김용 씨부터 발언해 주십시오.”
김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 위로 걸어갔다. 그리고 박장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모두에게 말했다.
“전 이번 기회에 헌터 자격시험의 합격 기준을 낮추고자 합니다. 많은 이들이 정식 헌터가 되기를 원하고, 지부에서도 인력 부족을 실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당장 내가 시험 볼 때만 하더라도 정말 안타깝게 떨어진 사람이 꽤 있었다.
김용은 준비한 자료를 프로젝터로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