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하아아앗!”
아란은 루호의 방심을 파고들어 정면에서 날아차기로 공격했다. 그녀의 발끝이 빠르게 루호의 명치를 걷어찼다.
“커억!”
루호는 완전히 걷어차여서 뒤로 쭉 날아갔다.
아란은 루호가 서 있던 자리에 착지해서 유유히 날아가는 그를 쳐다봤다.
단번에 장외?
그러나 루호는 역시 루호였다.
“크으으윽!”
루호는 아란에게 차인 것과 동시에 능력을 발현했다. 그리고 재빨리 갑옷사슴으로 변신해 날아가는 속도를 줄였다.
거대한 갑옷사슴은 필드에 질질 끌리면서 겨우 가장자리에서 멈춰 섰다.
방금 전 일격은 분명 치명적이었다. 내가 아는 한 지금 루호는 사슴으로 변한 덕에 겨우겨우 충격을 버티는 중이었다.
아마 변신이 풀리는 순간…….
아란으로선 기선 제압을 잘한 것이다.
보통 이렇게 되면 정말로 시간을 끌며 버틸 것인데, 아란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한 층 더 성장해 있었다.
“더, 더, 더……더!”
아란의 왼쪽 다리는 빨갛게, 오른쪽 다리는 하얗게 변해 갔다.
“뜨겁게! 차갑게!”
양쪽의 다리에서 각각 열기와 냉기가 뿜어지면서 아란의 양옆 필드를 휩쓸었다.
갑옷사슴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면서 필드 가장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아아앗!”
아란은 높이 뛰어올라 먼저 갑옷사슴에게 덤벼들었다.
“받아라!”
왼쪽 발이 먼저 갑옷사슴의 머리를 노리며 내려찍기!
갑옷사슴은 가볍게 머리를 까딱여 뿔로 아란의 다리를 쳐냈다. 그러자 그녀는 왼쪽 다리를 대신해 오른쪽 다리로 갑옷사슴의 뿔 하나를 걷어찼다.
갑옷사슴의 왼쪽 뿔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아란은 뿔을 찬 반발력을 이용해 공중에서 방향을 바꿨다.
“지금이다!”
아란은 왼쪽 다리로 언 뿔을 찼다. 그러자 왼쪽 뿔이 유리처럼 쨍그랑 깨졌다.
“한 번 더!”
아란은 필드에 착지했다가 다시 한 번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녀가 완전히 위로 뜨기 전, 갑옷사슴이 한 발 앞서 그녀의 움직임을 막았다.
갑옷사슴은 머리를 그녀의 위로 움직인 다음, 빗자루로 쓸 듯이 오른쪽 뿔을 아래로 휘둘렀다.
“꺄아아악!”
아란은 뿔에 치여 필드 바깥으로 날아갔다.
이번엔 아란이 장외 위기.
그러나 너무 세게 날아간 덕인지 필드 바깥의 잔디밭 위를 가로질러 유리 돔으로 날아갔다.
“치이!”
아란은 몸을 수직으로 돌렸다. 그리고 외쳤다.
“더, 더, 더……더!”
다리에서 번쩍번쩍한 빛이 나면서, 유리 돔에 도착!
아란은 유리 돔을 발판 삼아 디뎠다. 그리고 힘차게 외치며 발로 찼다.
“가볍게!”
아란의 몸은 다시 되돌아온 방향으로 쭉 날아갔다. 그리고 단숨에 필드로 돌아갔다.
갑옷사슴은 돌아오는 아란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받아라!”
아란은 갑옷사슴 위를 지나 필드 위에 착지했다.
“간다! 빠르게!”
아란은 필드를 박차며 달렸다. 그리고 빠르게 갑옷사슴 바로 아래까지 와서 뛰어올랐다.
갑옷사슴이 된 상태로 루호가 아란의 속도를 따라잡을 방법은 없었다.
아란은 갑옷사슴의 배를 걷어찼다. 배에 둘러진 갑옷이 아란의 다리에 채여 굉음을 냈지만, 충격을 받았는지 갑옷사슴의 자세가 무너졌다.
“엥?”
갑옷사슴은 털썩 주저앉으며 그대로 아란을 깔아뭉갰다.
“으아아악!”
아란의 비명 소리가 필드를 가득 매웠다. 그녀는 전신이 깔리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지만, 왼쪽 다리가 제대로 깔리고 말았다.
그것으로 상황이 반전됐다.
갑옷사슴은 아란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아예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아란은 천천히 자신을 덮쳐 오는 갑옷사슴의 몸통을 보며 외쳤다.
“더, 더, 더……더 뜨겁게!”
아란의 두 다리가 활활 달궈지면서 강한 열기를 뿜어냈다.
아란의 다리를 깔아뭉개고 있던 갑옷사슴도 그 강렬함에 몸을 움찔거렸다.
아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깔린 다리를 빼냈다. 그리고 절뚝이면서 갑옷사슴에게서 멀어졌다.
갑옷사슴은 아란이 빠진 것을 보고는 쓰러지려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후웁.”
아란은 비틀거리며 갑옷사슴에 맞섰다. 그러나 다리를 주로 사용하는 그녀의 전투 스타일에서 다리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제길…….”
갑옷사슴은 이제 본격적으로 아란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은 아란을 뿔로 찌르기 위해 고개를 팍 숙인 채 힘차게 돌진했다.
“하압!”
아란은 부딪치기 바로 직전에 옆으로 뛰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 순간 갑옷사슴은 머리를 가볍게 휘둘러 뿔로 그녀를 후려쳤다.
“으아아악!”
아란은 필드에 한 번 부딪쳐서 위로 튕겨 올랐다. 그러고는 신음하면서 필드를 나뒹굴었다.
갑옷사슴은 성큼성큼 걸어서 그런 아란에게 다가갔다.
그야말로 소녀와 괴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크윽!”
아란은 양손으로 필드를 기어서 겨우 움직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움직임은 갑옷사슴 입장에선 굼벵이가 기어가는 것이었다.
갑옷사슴은 어느새 아란을 따라잡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 입장에선 언제든 아란을 짓밟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서 밟아! 끝내! 어서!”
김용은 유리 돔을 두들기며 바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갑옷사슴을 고개를 돌려 그를 한 번 쓱 보다가 천천히 앞다리를 들었다.
아란은 뒤로 돌아누워 자신의 위에 떠 있는 사슴의 앞발을 쳐다봤다.
“더, 더, 더…….”
아란은 남은 H력을 모두 오른쪽 다리로 모았다. 그리고 사슴의 앞발이 천천히 자신에게로 내려오는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더, 더, 더…….”
다리 하나만 쓸 수 있는 상태에서 역전할 수 있을까?
뭔가 조언을 해 주고 싶었지만, 조언 따위로 역전될 만큼 로얄의 전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더, 더, 더…….”
아란은 앞발이 코앞까지 왔지만, 계속 H력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더, 더, 더……더 가볍게!”
아란은 한 발로 필드를 박차며 쓱 사슴의 뒤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서 다시 한 발로 점프해 높이 뛰어올랐다.
“더, 더, 더……!”
아란은 갑옷사슴의 머리 위로 날았다. 그리고 힘차게 외쳤다.
“더 무겁게!”
낙하.
아란의 발이 하나 남은 뿔과 충돌했다.
갑옷사슴의 뿔은 활대처럼 휙 휘어지다가 툭 부러졌다.
저게 부러지는 거였나?
갑옷사슴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비명이 미처 끝나기 전에 뿔을 부러뜨린 아란의 발이 사슴의 머리를 가격했다.
뿔 아래 직접적으로 사슴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투구가 아란의 발과 충돌.
투구가 쩍 갈라지면서 사슴의 머리가 필드에 처박혔다.
“크으으윽!”
아란은 힘없이 사슴 머리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방금 전 공격으로 인해 다리가 또 부러진 모양이었다.
갑옷사슴은 스르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루호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그렇게 루호와 아란, 둘 다 필드에 쓰러져 교착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승부가 어떻게 나지?
다들 심판석에 앉아 있는 이서현을 쳐다봤다.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두의 시선에 부담스럽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마이크를 들었다.
“두 선수 다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기에 먼저 일어서는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이를 악물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한쪽은 체력 소진에 치명상, 다른 쪽은 두 다리가 골절.
어느 쪽도 일어서는 게 쉽지 않았다.
“조루호, 조루호, 조루호……!”
“주아란, 주아란, 주아란……!”
관객들은 저마다 두 사람을 응원하며 대결의 결과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이서현이 말한 것처럼 몸을 일으키는 것까진 하지 못했다.
“하악, 하악…….”
아란은 무릎까지 세우며 몸을 일으켰다.
“쿨럭!”
루호도 그에 질세라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세웠다. 그러나 이내 무릎이 쓰러지면서 필드에 넘어졌다.
“야, 이 쓰레기야! 쓰레기야!”
김용은 유리 돔을 두들기며 절규했다. 그는 루호에게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분노했다.
결국 끝까지 몸을 일으킨 사람은 아란이었다.
“승자, 주아란!”
유리 돔이 열리고, 직원들이 들어와 두 사람을 들것에 실었다.
김용은 이를 갈면서 실려 나가는 루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머저리! 쓸모없는 놈! 조루 새끼! 쓰레기! 네 까짓 놈은 당장 팀에서 퇴출이야! 죽어 버려!”
왠지 지금 김용의 모습에서 천민일의 최후가 겹쳐 보였다.
교양, 기품, 지위, 재산…….
사람은 한 꺼풀만 벗겨 놓으면 다 똑같은 게 아닐까?
김용의 눈은 순식간에 퀭해졌고, 눈 아래 짙은 다크 서클이 깔렸다.
그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디마와 싸울 때를 보면, 로얄이나 2군은 고사하고 랭킹 헌터에 들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실력.
거기에 갖고 있던 재산과 영향력은 모두 소실.
아마 그가 이번 랭킹전에 응한 이유는 돈을 벌기보다도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5판 3선승제 랭킹전.
마지막 5판 3선승제 시합.
헌한발에선 랭킹 23위 이천두.
현한발에선 랭킹 88위 나존귀.
설마하니, 나존귀한테 모든 운명을 걸게 될 줄이야…….
나존귀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되자 다리를 벌벌 떨고 있었다.
“후, 후, 후……드, 드디어……이, 이 나존귀 님에게……기, 기회가 왔군!”
나존귀는 개다리 춤을 추면서 필드로 올라갔다.
한편 상대로 올라온 이천두는 팔짱을 끼면서 느긋하게 나존귀를 구경했다.
“완전 허접인데?”
나존귀는 그 말에 벌벌 떨면서도 맞받아쳤다.
“이, 이 몸은……처, 천상천하……유, 유아독존……나, 나존귀 님이시다!”
“보아하니 돈 많은 부잣집 도련님인가 본데, 이번 기회에 인생 공부 좀 하라고!”
이천두는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저었다.
“시작!”
유리 돔이 닫히고, 두 사람은 H력을 끌어내며 바로 능력발현을 했다.
이천두는 아까 보여 준 근육강화. 그의 근육이 과도할 정도로 부풀며 전신이 빵빵하게 비대해졌다.
반면에 나존귀는 손에 작은 공 하나를 들고 있었다.
“엉?”
이천두는 그것을 보고 폭소했다.
“그게 뭐야? 공놀이라도 하려고? 조금은 기대했는데, 실망이다! 하하하!”
나존귀는 심지어 이천두의 비웃음을 받는 와중에 공을 정말로 필드에 통통 튕기기까지 했다.
“하하하!”
이천두뿐만 아니라 보고 있던 관객까지 다 함께 나존귀를 비웃었다.
심지어 김용마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떨며 웃었다.
“무슨 탱탱볼이냐? 엉!”
이천두는 마음 놓고 웃다가 버럭 화를 내면서 나존귀에게 덤벼들었다.
“하앗!”
나존귀는 튀기던 공을 잡아서 이천두를 향해 던졌다.
날아간 공은 이천두를 가볍게 빗나가 그대로 쭉 필드 바깥으로 날아갔다.
“뭐 하는 거야? 그게 전력…….”
이천두는 비웃으며 주먹을 들다가 갑자기 뒤에서 날아온 공격에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뭐, 뭐지? 분명히 빗나갔을 텐데?”
이천두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번엔 왼쪽에서 공격이 날아와 그의 옆구리를 때렸다.
“윽?”
이천두는 비틀거리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때린 물체가 이번엔 정면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게 됐다.
“공?”
이천두는 이를 갈면서 한손을 뻗어 공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공은 그의 손안에서도 계속 탄력을 잃지 않고 계속 튀었다.
“아니?”
이천두는 악력으로 공을 짜부라뜨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공의 탄력에 밀려 그의 손이 점점 펴졌다.
“으아아아!”
공은 이천두의 손에서 빠져나와 필드에 한 번 튀긴 후, 그의 턱을 후려쳤다.
“컥!”
이천두는 턱과 목젖 사이 움푹한 곳을 정통으로 맞고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그것으로 끝.
이천두는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스, 승자 나존귀!”
이서현은 필드로 올라와 나존귀의 손을 들었다.
나존귀의 능력은 탱탱볼.
그가 만든 저 공은 한 번 튕길 때마다 위력이 증가하는 특이한 능력이었다.
확 트인 곳에서는 각도 계산을 잘했단 조건 하에 끽해야 2배에서 4배. 그러나 유리 돔처럼 사방이 막힌 곳에선 수십, 수백까지 증대할 수 있었다.
다만 이번 시합의 경우 결정적으로 공의 위력을 증대시킨 것은 이천두의 손바닥 안이었다.
“안 돼! 으아아악!”
김용은 입에 거품을 물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잔디밭 위에 누워 마구 몸부림쳤다.
“어서 옮겨!”
직원들이 들것을 가져와 김용을 싣고 갔다.
다른 헌한발 팀원들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이서현은 홀로 필드 위에 서서 관중을 향해 말했다.
“오늘의 랭킹전! 승자는 현한발입니다! 따라서 현한발의 리더 주아란 양이 새로운 랭킹 1위! 김용 씨가 51위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감사합니다!”
관객들은 새로운 1위의 탄생에 기뻐하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