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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의 자식
어찌된 일인가?
알 수가 없다. 나는 죽었다. 사인은 교통사고. 빌어먹을 졸업 파티에서 너무 놀았던 것이 문제였다.
졸업 파티에서 술을 마셨고 친구의 차에 탔다. 친구도 취해있었지만 모두 취해있던 상태에서 우린 미쳐있었다. 졸업했다고 광란의 파티를 벌였으니까.
파티가 거의 끝나갈 때쯤 우린 집에 가야한다는 귀소본능을 발휘했다.
그렇게 취한 상태에서도 차에 탔고 달렸다. 그러다 사고가 났다. 취해있었으나 나의 정신은 또렷했다.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죽음이 느껴졌다.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일어나보니 아기가 되어 있었다.
젠장.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고 봐야겠다.
어찌 되었든 이 몸이 이제 나다.
* * *
신유성은 생후 10개월이 되었다. 아기의 삶은 참으로 지루했다. 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싸고. 멀쩡한 정신으로 아기의 몸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움직이고자 했고 의지로 일어나 걷게 되었다. 이를 보고 신유성의 엄마인 유씨는 흐뭇하게 웃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너무나 건강했기 때문이었다.
때는 조선시대. 의료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아기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때문에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장려되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죄인 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둘째를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더구나 둘째는 엄청나게 건강했다. 흐뭇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군감이네요.”
“그렇군.”
신유성의 아버지인 신겸혁은 의외로 담담했다.
‘무과라.......’
신겸혁은 역관이었다. 역관의 자식이라고 과거를 보지 못하란 법은 없었다. 신겸혁이 서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보는 것은 자유이나 뽑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양반의 자손이 아니면 상당히 힘들었다.
‘시켜볼까?’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양반들만이 뽑히는 문과라면 힘들지만 무과라면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아니야.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좀 더 크면 그때 가서 봐야지.’
신겸혁은 서두르지 않았다. 아직 아이가 다 자란 것도 아니었다. 이제 겨우 걸었을 뿐.
“너무 앞서나가는 건 좋지 않소.”
“네.”
유씨는 남편의 말에 장군 얘기는 더 꺼내지 않았다.
한편, 겨우 일어서서 걷는 것에 성공한 신유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선이라니.’
말귀는 이미 트였다. 아기로 태어난 것도 충격이 컸는데 여러 정보를 규합한 결과 조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어떻게 된 것일까?’
살겠다고 결심을 하긴 했다. 신유성이란 아기의 몸에 들어간 영혼은 스스로를 신유성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많이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기라면 가질 수 없는 기억 때문이었다.
미래에 대한 기억.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살았던 기억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미래를 예지한 것이거나 내 영혼이 과거로 왔거나.’
시간이 날 때마다 불쑥불쑥 치솟는 의문. 허나 신유성은 고개를 흔들어 의문을 털어냈다.
‘내가 고민한다고 나올 답이 아니다.’
더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플 뿐. 죽을 때까지 고민만 할 순 없었다.
‘덤이라고 생각하고 더 살아야지.’
무엇보다 죽음을 경험했는데도 새롭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신유성의 정신을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죽어도 끝이 아니게 되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미래를 본 것이라면 거기에 또한 무엇인가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조선이라는 것 외에는 많은 것을 알 수 없었다.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가족 구성원이나 사람들의 이름 집 구조 같은 것은 알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조선시대 평균 수명이 35세라고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몸이 약하면 더 빨리 죽을 수 있었다. 물론 건강하다고 무조건 더 오래 사는 세상은 아니다. 전염병에 걸리면 한 방에 훅 간다.
‘짧은 인생이 될 것 같다.’
오래 살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신유성은 장수하고 싶었다.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고 싶었다. 하지만 시대가 이를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병에 걸려도 죽는 거고. 전쟁이 나도 죽는 거고. 가난해지면 죽는 거고.’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시대.
그러나 무작정 공포를 느끼진 않았다.
신유성은 이미 한 번 죽었던 기억이 있었다. 죽음을 기억하면서도 새롭게 시작한 삶.
‘어쩌면 또 다른 삶이 나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무작정 또 다른 삶이 기다릴 거라고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신유성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결국 소극적이 된다.’
죽지 않기 위한 노력만을 할 뿐이었다. 허나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 신유성은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을 위해 원하는 대로 살다 가는 편이 더 나아보였다.
‘후회가 남지 않게.’
미래의 기억 속에선 제대로 뭔가 해보기도 전에 죽었다.
‘하지만 뭘 하지?’
문제는 많았다. 조선시대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어보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기거하고 있는 집만 해도 그랬다. 나름 풍족한 집안 같은데 신유성의 기준에서 보면 누추했다.
‘발명? 하지만 특허권 따위 알아주지도 않는 세상인데?’
발명을 해봐야 이름이나 남기면 다행이었다. 어쩌면 양반에게 이름을 남기는 영광마저 빼앗길 수도 있었다.
미래의 지식을 이용하려고 해도 단편적인 기억들만 있을 뿐이었다. 역사를 아주 자세하게 공부했다면 모를까 신유성은 역사가 전문이 아니었다.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영어는 미국에서 공부했기에 배웠다. 일본어는 어릴 때 일본 만화에 빠져 배웠다. 스페인어는 미국에 와서 스페인 출신 여자친구와 사귀면서 배웠다.
그 외에는 그다지 특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내 능력이라면. 외국으로 돌아다니지 않는 이상 힘드네.’
결론은 역관 내지는 상인이었다.
하지만 역관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중인으로 살 바에야 차라리 힘들어도 외국으로 돌아다니지 뭐.’
역관이 된다면 많은 돈을 벌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중인이었다. 돈이 많아도 양반 앞에서 기를 펴기 어렵다는 것이 신유성의 생각이었다.
신분의 제한에 갇히느니 그냥 외국으로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하지만 외국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힘든 세상이고.’
해적이 아닌 이상 힘들었다.
‘힘을 가져야 하네. 어찌 되었든.’
결론은 하나였다.
과거든 미래든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1달 뒤, 신유성은 책을 앞에 두고 읽고 있었다. 신유성의 앞에는 신겸혁이 앉아 책을 읽으며 책장을 넘겨주었다.
읽어주는 것은 훈몽자회였다.
‘이 녀석이.’
책을 읽어주면서도 신겸혁은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어나 걷게 된 이후 신유성이 갑자기 책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책을 놓고 읽으려 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말에 신겸혁이 읽어주었다. 그랬더니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열심히 따라하는 것이 아닌가!
‘내 아들이 신동이라니!’
훈몽자회를 읽어주며 신겸혁은 문득 문과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신겸혁에게는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최세진을 떠올린 탓이었다.
훈몽자회의 저자이기도 한 최세진은 중인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양반들로부터 상당히 공격당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신겸혁은 상당히 분했었다.
‘아니야. 문과로 가봐야 양반들이 괴롭힐 거야.’
출신 성분이 좋지 않다며 차별할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신유성이 벼슬을 하게 되면 신유성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조심해야 한다. 가족이 잘못하면 그것이 곧 신유성에게 영향을 미쳐 파직 당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신겸혁의 얼굴은 밝으면서도 어두웠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표정은 요상하기 그지없었다.
슬픈데 웃음이 나왔다. 웃는데 슬펐다.
‘그냥 역관으로 사는 게 오히려 더 낫지 않을까?’
처세만 조심하면 먹고 살 걱정을 할 필요는 별로 없었다. 역관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리고 역관이 되면 큰돈을 만질 기회가 많았다. 역관이 아니더라도 기술을 배우면 먹고 살 길은 있었다. 현재 중인들이 모여살고 있는 청계천에는 많은 전문인들이 있었다.
의원, 역관, 그리고 그 외 여러 방면에서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들이었다.
‘애가 똑똑하면 뭘 하든 잘 먹고 잘 살 거고 못났으면 과거는 어림도 없지.’
하지만 그래도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는 쉬이 꺼지질 않았다.
요상한 표정을 지은 신겸혁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계속 훈몽자회를 읽어주었다.
‘표정이 왜 저래?’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를 표정. 신유성은 신겸혁의 표정을 살피면서 책을 읽었다. 한자는 어려웠다. 외우는 건 그래도 어렵지 않았다. 원래 영혼이 언어에 소질이 있었는데 그게 그대로 이어진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할 것이 없고 심심했다. 아기의 몸이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힘들었다. 계속 방안에서 빙글빙글 맴돌다보면 미칠 것 같았다.
‘독방에 갇히면 이런 기분일까?’
가족이 있었지만 아기의 몸은 족쇄가 되었다. 자유로운 영혼이 방에 계속 박혀 있는 꼴이었다.
그러다보니 결국 공부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심심해서라도 공부를 해야 했다.
‘미치겠네.’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을 세우고자 해도 정보가 그다지 없으니 힘들었다. 그래서 더욱 공부에 열중했고 결국 신동 타이틀을 따기에 이르렀다. 그러는 와중에 신유성은 요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명나라 황제가 요상하다는 소식이었다.
‘명나라 황제? 누구지?’
이야기를 들으며 신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중국 역사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는 요상하긴 했다.
명나라 황제가 약을 한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바로 가정제 얘기였다.
불로불사를 위해 엽기적인 행위를 한 황제. 신유성은 알지 못하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부나 하자.’
신유성은 곧 관심을 접고 공부에 집중했다. 이제는 스스로 책을 읽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한문은 역시 힘들었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옥편이 없었다면 혼자 공부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신유성은 엎드려서 옥편을 살피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무조건 외웠다.
이러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니 신겸혁의 고민은 더욱 더 깊어만 갔다.
‘허어. 이를 어쩔꼬. 저런 아이를.’
신겸혁의 눈에는 아들이 세상에 찾아보기 힘든 신동으로 보였다. 그런데 중인이란 신분 때문에 조정에 나가도 대접받기 힘들 거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아니, 어쩌면 조정에 발을 붙이지 못할지도 몰랐다.
최세진 이후 중인들에 대한 견제가 한층 높아진 탓이었다.
미묘한 분위기 변화였지만 못 느낄 이유가 없었다. 언제나 양반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았기 때문에 생긴 능력.
‘차라리 명으로 갈까?’
명나라는 능력만 있다면 더 위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다. 신겸혁이 알기로 조선보다는 더 나았다. 허나 명나라로 이민을 가는 것은 어려웠다.
타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다. 잠시 앞뒤를 재본 신겸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가족이 전부 가긴 어려워.’
신겸혁도 자신이 없었다. 신겸혁이 명나라 말을 배우기도 했지만 더 잘하는 것은 일본 말이었다.
‘나중에 저 녀석만 보낼까?’
가능성은 있어보였다.
“그래, 결정했다.”
신겸혁은 유학을 보내기로 했다.
‘만약 유학을 가는 것에 실패한다면 하늘이 뜻이겠지.’
신유성도 모르는 사이에 미래가 정해졌다.
세월이 흘렀다. 3살이 된 신유성은 도성에 천재로 소문이 났다.
“아니 이제 3살인데 벌써 사서삼경을 다 외웠다고?”
신유성으로서는 공부가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미칠 것 같았기 때문에 죽어라 책만 읽고 외웠다. 운동 겸해서 집안을 돌아다니긴 했으나 집 밖 구경은 하기도 힘들었다. 미치도록 책만 읽고 외우니 외워졌다. 이해하고 응용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제 3살에 불과한 신유성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허허, 신동이로구만.”
“그런데 역관의 자식이라니. 쯧쯧.”
허나, 신유성의 소문이 모두 찬양일색인 것은 아니었다. 남의 집 자식이 더 잘났다고 하니 배알이 꼴린 양반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역관의 아들이니 트집 잡기 딱 좋았다.
이런 와중에도 신겸혁은 물밑 작업을 펼쳤다.
신유성을 명나라로 유학 보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 작품 후기 ============================
제왕의 유희 후속작은 아닙니다.
원래는 제왕의 유희를 리메이크 할까 하고 생각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 쓰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