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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의 자식
유학을 보내기 전에 알아볼 것은 많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로 보내느냐 하는 것. 그래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거나 혹은 명으로 떠나는 역관들에게 부탁을 했다. 아들을 명나라에서 공부 시키고 싶다고 알아봐 달라고 한 것이었다.
동료들은 유난이라고 하면서도 흔쾌히 들어주었다. 술도 사고 기생도 불러주니 들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에서는 조선의 유학생에 의해 명의 기밀이 유출될까 우려했다. 때문에 자주 들락거리는 것 자체를 좋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허락이 떨어진다면 유학을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신겸혁의 동료들은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명나라에 갔다 온 동료 역관들이 하나 같이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말을 했다.
‘전대 황제에 이어 이번 황제도 기행을 벌이고 있다니.’
대놓고 떠들고 다니진 못하지만 소문은 돌았다. 특히 임인궁변 이야기는 숨기기 어려웠다. 황제의 위엄을 위해 단속을 단단히 하고 있지만 은밀히 소문이 도는 것은 막기 힘들었다. 어쨌거나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말을 꺼내는 것도 조심스러워서 힘들었다.
‘대체 어찌 되려고.’
안 좋은 소식을 들으니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조선의 상황도 그리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왕세자 이호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종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
‘어지럽구나.’
중전과 왕세자 사이의 알력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윤씨들을 중심으로 뭉친 파벌 간의 싸움이었다.
왕세자를 지지하는 윤임 일파와 문정왕후를 지지하는 윤원형 일파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승기는 윤임 일파가 잡은 것으로 보였다. 왕세자가 무사히 대리청정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는 중종이 승하하는 날, 왕세자가 임금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정의 분위기가 매우 나빴다.
‘곧 피바람이 불겠구나.’
신겸혁은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그 다음에는 윤원형 일파의 숙청이 이어지리라 여겼다. 그만큼 두 파벌 사이에 대립은 극심했다.
‘불길하구나.’
안 좋은 일이 나라안팎으로 벌어지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심해야지.’
신겸혁은 당분간 신유성의 유학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계속 주목받게 되면 뭔 꼴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미치겠다.’
이제는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신유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름 잘 사는 집이라는 것은 이제 신유성도 알 수 있었다. 집에 노비도 부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식사는 신유성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피자가 먹고 싶다.’
유학 생활을 하면서 질리도록 먹은 피자가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유학 당시에는 피자보다 라면을 먹는 게 오히려 더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였었다.
‘라면도 먹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어린 몸. 더구나 밀가루 같은 건 구경해보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질린다.’
지루함은 공부로 어떻게든 극복을 했지만 식생활은 점점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아, 내가 크면 세계를 돌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음식을 마구 먹어주지. 그래 돌아다니는 김에 여자도 팍팍 안고. 술도 팍팍 마시고!’
신유성은 다시금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 광란의 파티를 떠올렸다.
‘그래! 미치겠다! 세상이 날 미치게 한다면 그래 미쳐주마! 난 미칠 것이다! 그러다 죽을 것이다!’
그렇게 죽는다면 또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있었다.
광란 속에 살다 죽는 것이 어쩌면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유성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어차피 죽음은 이제 별로 두렵지 않았다. 죽어도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즐기자! 자! 난 무엇을 즐길 수 있는가?’
밥을 먹다 말고 신유성은 매의 눈을 하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 따윈 보이지 않았다.
‘젠장.’
밥상을 걷어찼다. 발만 아팠다.
“끄응.”
다리에 실린 힘이 크지 않아 크게 다치진 않았다.
“아이구. 우리 유성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시나? 그래도 밥상은 차면 안 돼. 알았지?”
옆에서 보고 있던 유씨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이 답지 않아서 신기하긴 했었다. 어쩔 때는 아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기 같은 행동을 보이니 안심했다.
아기가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모르니까 그렇게 행동할 수 있고 예의를 가르치는 것이 바로 부모의 역할 중 하나였다.
신유성에겐 매를 들 필요가 없었다. 말로만 해도 척척 알아들었으니까.
“네.”
대답한 신유성은 다시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젠장. 뭔가 미칠 것이 필요해.’
심심해서 미치고 밥이 맛없어서 더 미치고 있는 신유성이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었다.
‘빨리 먹고 얼른 커서 자유를!’
자유를 위해 더 빨리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밥을 먹은 신유성은 곧바로 누웠다.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자극적인 영화를 보며 쾌감을 느낀 일. 친구들과 운동을 하며 느꼈던 경쾌함. 여자친구와 보냈던 뼈가 흐물흐물 녹을 것 같았던 뜨거운 시간들.
미래의 기억을 더듬으며 제발 꿈이라도 꾸길 바라며 신유성은 잠들었다.
매일 전쟁이었다. 지루함과의 전쟁. 그래서 신유성은 더욱 학문에 정진했다. 몸을 움직이기 힘드니 책이라도 읽었다. 이 때문에 신겸혁의 지출이 늘어났다. 책은 비싼 물건이었다. 하지만 자식의 학문을 위한 책이라 신겸혁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역관이기 때문에 돈은 꽤 잘 벌었다. 최근 들어 일본과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황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 바짝 벌어둔 것도 있고 집안이 역관으로 지내며 모아둔 재산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아, 읽는 건 지겹다.’
계속 책을 읽던 신유성은 결국 방밖으로 나갔다.
“작대기.”
여종이 작대기를 가져다주었다. 신동으로 알려진 귀한 몸인지라 유씨는 만약을 대비해 여종을 붙여 놓았다.
작대기를 든 신유성은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젠장.’
먹고 싶은 치킨을 그려보았다. 그리웠다.
그리운 피자를 그려보았다. 먹고 싶었다.
이어서 빌딩도 그리고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을 그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여종은 이해가 안 가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하는 일이 모두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것저것 그리나보다 했다.
‘이것도 재미없구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잠깐이었다. 집중해서 그릴 때는 괜찮았지만 다 그리고 나면 밀려오는 허무함은 감추기 어려웠다.
“에잇!”
성질나서 작대기를 던졌다.
‘하늘은 저리도 푸른데.’
정말 청정한 하늘이었다. 맑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매일 본 하늘은 지겨울 뿐이었다. 아름다운 하늘 감상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하면 지겨울 뿐이었다.
‘역시 같이 놀 녀석이 필요해.’
혼자 놀기 위한 장비들이 너무나 부족한 조선시대였다. 결국 신유성은 사람을 찾았다. 가장 만만한 것은 바로 피붙이. 허나, 피붙이인 형은 신유성과 놀아주지 않았다.
“바쁘다.”
동생이 신동이었다. 그렇다면 신동을 동생으로 둔 형은 무슨 소릴 들을까?
아직 어렸지만 주변의 관심이 모두 신유성에게 향하니 신유성의 형, 신주성은 이를 악물고 공부를 시작했다. 허나, 글공부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서 역관이 되기 위한 공부에 매진했다. 신유성에게 쏠린 관심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때문에 신유성과 놀아줄 마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신주성에게 퇴짜를 맞고 나니 다음 목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 유씨는 신유성의 동생을 돌보며 집안일을 챙기느라 정신없었다.
“에잉!”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운동이나 해야지.’
생각이 많아지면 더 힘들어질 뿐이었다. 결국 신유성은 공부를 하다 지겨워지면 작대기를 들고 검술이랍시고 마구 휘둘렀다.
활발한 신유성의 행동에 신겸혁의 고민은 더더욱 깊어졌다. 나이에 비해 총명한데다 성장도 빨랐다. 또래의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을 계속 보여주니 어떻게 키워야할지 고민이 되기 마련이었다. 유학을 보내기로 했지만 아직 유학을 보내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러니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가르쳐야 하는데 아이가 너무 뛰어나다보니 문제였다.
여기에 장남이 최근 들어 신유성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니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 잘난 동생을 두어 괴롭겠지.’
신겸혁도 이해했다. 신겸혁 또한 어릴 때 자신보다 어린 녀석이 유창하게 명나라 말을 하는 것을 보고 패배감을 맛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경쟁하듯 명나라 말을 배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늘 하던 대로 집에서 가르쳐주는 일본어를 배웠다.
‘너무 작은 애만 신경 썼구나.’
신겸혁은 자신을 자책했다. 하지만 그래도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 같은 신유성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3살에 사서삼경을 달달달 외운 신동이 바로 신유성이었다. 이런 신동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유명한 유학자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자로 들어가면 동문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신분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결국 신겸혁은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일단 명나라 말이라도 배우게 해야겠다.’
조금 서두르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무엇보다 장남인 신주성이 받을 충격도 예상이 되었다. 그러나 자식의 마음도 중하지만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욕망은 멈출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신유성에게 한 남자가 찾아오더니 명나라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신겸혁의 동료 역관이기도 했다.
‘역관으로 만들 생각인가?’
신유성은 그리 생각했다. 반항심이 무럭무럭 샘솟았지만 명나라 말은 배웠다.
‘외국에 나가려면 배워두는 게 좋겠지.’
언어에 대한 감각은 탁월한 신유성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 나라의 말을 배우지도 못했다.
“허허허.”
역관은 역시 신동이라며 웃었다. 배우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남자가 가르칠 것도 많이 남지 않았다.
“이제부턴 명나라 사람들과 얘기하며 더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최고네.”
동료의 말에 신겸혁은 흐뭇하게 웃었다.
자식이 뛰어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반대로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장남이 걱정되기도 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신주성은 괴성을 질렀다. 잘난 동생은 결국 모든 면에서 앞서는 것이었다.
‘이대로 역관이 된다고 해도 이기지 못하겠구나.’
동생을 시기하는 것은 못난 짓이라고 주의를 들었었다. 이해는 했다. 하지만 이해했다고 가슴이 납득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 쓸모없어진 것 같은 느낌에 김주성은 조금씩 삐뚤어졌다. 그리고 공부를 멀리하고 놀기 시작했다.
원래 놀 나이이기도 했지만 더 열심히 놀았다. 격렬하게 놀았다. 허나 아무리 놀아도 가슴이 허전했다.
놀이는 그저 한 순간의 괴로움을 잊기 위한 위로에 불과했다. 놀이가 끝나면 괴로움은 다시 밀려올 뿐이었다.
문제의 해결 방법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을 아는 것과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방법을 알아도 할 수 없었다.
해결 방법은 단순했다. 뭐든 하나라도 신유성보다 잘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열등감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허나, 아이인 신주성의 생각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결국 삐뚤어진 신주성은 매일 같이 동네 애들과 놀았다. 그러다 어느 날, 춘화를 그리는 화공을 보았다.
중인들이 모여 사는 청계천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있었다. 대장장이도 있었고 악기를 다루는 악공도 있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화공도 있었다.
신주성은 화공의 자식과 놀다 재미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에 따라갔다. 화공의 자식은 나이가 좀 있었다. 그래서 여자에 대한 흥미가 점점 치솟는 나이.
그러다 자신의 아버지가 여자의 몸을 그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거시기가 불끈 솟게 만드는 풍경.
이를 본 화공의 자식은 우쭐한 마음을 가졌다. 자랑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좋은 구경을 시켜준다며 친구들을 끌고 갔다. 신주성은 얼결에 따라갔다. 그리고 다 같이 숨어서 보았다.
여자의 몸을.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는 화공을.
섬세한 손길에 여자가 화폭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신주성은 넋이 나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옷을 벗은 여자와 그림을 그리던 화공을 뇌리에서 지우지 못했다.
이 순간만큼은 잘난 동생이 떠오르지 않았다.
‘좋아! 그림을 그리자!’
신주성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은 뒤에야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한편, 신주성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 신유성은 그림을 그려보려다가 말았다.
‘이것까지 내가 더 잘하면 더 삐뚤어지겠지.’
신주성의 질투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 옆에서 ‘내가 더 잘하지?’하고 약 올리는 행동을 할 순 없었다. 애초에 뭐든 이겨야 하는 적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그림이라니.’
신유성은 사정을 알고 싶었다. 그러다 화공의 집에 가서 그림 그리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가. 그랬던 것인가?’
신주성이 스스로 즐거움을 찾았다니 신유성 또한 동네를 한 바퀴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꼭 돌아보리라!’
아기의 몸이기에 참고 참았지만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신겸혁에게 뜻을 전하자 손쉽게 동의를 구할 수 있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질 법도 했으니 가끔 바깥 구경을 시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다음 날, 심겸혁은 신유성과 함께 청계천을 돌아다니며 본의 아니게 자식 자랑을 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신유성이 공손히 인사하니 어린 아이가 신통하다며 사람들이 칭찬했다.
그리고 이 일은 지나가던 양반이 보게 되었고 양반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더니 왕세자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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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