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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의 자식
왕세자 이호는 피곤했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지만 사사건건 반대를 일삼는 윤원형 무리 때문이었다. 윤임은 더욱 강력하게 윤원형 일파를 쳐내야 한다며 열을 냈다. 그러나 이호는 그러기 힘들었다.
‘어마마마.’
문정왕후 때문이었다. 비록 계모이기는 하나 이호는 문정왕후를 어머니처럼 여기며 자랐다. 친모의 얼굴은 본 기억도 없었다. 이호에게 어머니 하면 문정왕후가 떠오를 뿐이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문정왕후가 자주 찾아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냐며 말할 땐 죄책감에 시달렸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음을 몇 번이고 알려줘도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이호는 윤원형 일파를 모질게 찍어내질 못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선 해야 하는 일이나 이를 행하는 것은 효에 어긋난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바마마.’
무엇보다 중종이 위독한 상태였다. 언제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허나, 왕이 된다고 해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왕이 되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은 부모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기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더구나 왕이 된 다음에는 또 다른 피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근심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이호는 근심을 잊기 위해서 잠시 다른 곳에 눈을 돌렸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밥을 먹어도 돌멩이를 삼키는 기분이니 힘들었다.
“저잣거리에서는 요즘 어떤 이야기가 나도는가?”
임금이 된다는 것은 곧 백성들의 삶을 살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수시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임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궁에서 보내니 백성들의 실상을 알기는 어려웠다. 오직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판단을 내려야 했는데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말만 들어선 알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가끔 변복을 하고 궁을 나가는 일도 있는 것이었다.
허나, 이호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저잣거리에 나갔다가 암살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니 무도한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었다.
이호의 마음을 읽은 내관은 최대한 즐거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최근 신동이 나타났다 하옵니다.”
“신동?”
“그러하옵니다. 아이가 사서삼경을 벌써 외우고 다닌다 합니다.”
“나이는 어찌 되는가?”
“4살이라 하옵니다.”
“그것이 참인가?”
이호는 깜짝 놀랐다. 이호도 꽤 총명하단 소릴 어릴 때부터 들었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서삼경을 외울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4살이라면 아직 엄마의 품을 벗어나지도 못할 나이였다.
이호는 호기심이 생겨 아이를 부르라 했다. 그렇게 신유성은 갑자기 궁으로 불려갔다.
‘세상에. 이 사람이 그럼 인종인가?’
궁에 불려가게 되자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윤원형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신유성은 조선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했던 유학 생활 때문이었다. 역사는 그저 남는 시간에 조금씩 들여다 본 정도였다.
그렇지만 윤원형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 봤던 사극 덕분이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이름만큼은 확실히 기억했다.
‘잠깐. 태정태세문단세.......’
어릴 때 배운 왕조의 이름 외우기를 복기한 신유성은 경악했다.
‘이, 이대로 늙으면 나중에 임진왜란이?’
오래 살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찍 자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신유성의 계획은 즐기면서 노후를 조금만 준비할 생각이었다.
‘행복할 수 없네?’
그렇다. 행복한 말년은 물 건너 간 것이었다. 만약 자식이라도 낳게 된다면 모두 임진왜란에 휩쓸려 어찌될지 모를 운명이었다.
몰랐으면 모르되 알게 된 이상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이 몇 년일까? 다음이 명종인데.’
어찌 보면 상당히 먼 훗날의 얘기 같지만 세월은 금방이었다.
신유성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계속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할 순 없었다. 이호는 질문을 했고 신유성은 답해야만 했다.
어린 아이의 몸으로 꼬물거리며 이호의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는 명을 기다렸다. 이호는 질문 몇 가지를 던졌고 신유성은 답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감탄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참으로 기특한지고. 앞으로 나라의 동량이 되어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후 신유성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하지만 처음 왕이 될 남자를 보게 된다고 품었던 흥분은 저 멀리 사라지고 걱정만이 가득했다.
신유성은 공식적으로 양반들 사이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제는 전국에 그 이름이 퍼져나갔다. 이호와 대면했으니 보통 인재가 아닌 것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어린 아이에 불과한데다 역관의 자식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봐야 역관의 자식이지. 크면서 그 부모가 하는 짓을 배우며 결국 탐욕스럽게 변할 것 아닌가?”
그냥 뛰어난 인재가 툭 튀어나와도 견제할 판이었다. 그런데 중인의 자식이었다. 양반들의 시기심은 견제로 이어졌다. 자신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미관말직의 자식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었다.
허나, 신유성에 대해 뭔가 더 얘기가 나돌기도 전에 더 큰 사건이 터졌다.
중종이 숨을 거둔 것이었다.
순간 한양은 그야말로 고요해졌다. 모두 궁에서 벌어지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역관의 자식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한양에 점점 먹구름이 밀려왔다.
한편, 신유성은 집에서 여전히 책을 읽는 중이었다. 이호가 나라의 동량이 되라며 엄청난 양의 책을 하사해주었다.
‘아, 이걸 다 읽어야 하나?’
심심해서 읽을 때는 어려운 책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엄청난 양의 책을 의무감에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읽기 싫어졌다.
하지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4살. 밖에 놀러 다니는 것은 힘들었다. 결국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정도였다. 다른 집 꼬맹이들은 흙장난을 하거나 단순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단순했다.
결국 신유성은 다시 책을 읽었다. 그러던 중 하나의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이호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있지만 그래도 왕은 왕.
유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신겸혁은 이제 윤원형 일파가 쓸려 나갈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으나 신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이제 왕이 된 이호, 인종은 얼마 안 가 죽게 된다. 그리고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권력을 쥐게 된다. 하지만 딱 하나 신겸혁이 한 말이 맞는 것이 있었다.
피바람이 불어온 다는 것.
윤임은 답답했다. 조카를 왕으로 만들어 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치 않았다.
‘허허, 독해져야 하거늘.’
인종이 무르게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정왕후를 비롯한 윤원형 일파를 빠르게 몰아내는 일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아이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인종은 병약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다. 여기에 아직도 아이가 없었다. 이리 되니 갈팡질팡하는 대신들이 있었다.
윤임의 편에 선 자들이 있긴 했지만 아직도 윤원형의 편에 선 자들은 많았다.
왕에게 후사가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왕이 몸이 약하다? 그렇다면 신하들은 다음 대를 생각하게 된다.
다음 왕으로 누구를 올릴까?
현재 가장 강력한 후보는 바로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었다.
‘참으로 답답하구나.’
인종에게 후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아이를 갖지 못했다. 더구나 인종은 이제 31살이었다. 30이 넘도록 여자를 품고도 아이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원대군만큼은 안 된다!’
해서 윤임은 윤원형을 찍어내기 위한 일에 박차를 가했다. 자신의 집안을 지키려면 상대를 죽여야만 했다.
이제 양측이 사이좋게 허허 웃으며 화해할 수 있는 때는 지났다.
죽고 죽이는 전쟁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윤임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즉위 1년 만에 인종이 숨을 거두었다.
이제 5살이 된 신유성은 인종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감흥은 별로 없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이제 좀 돌아다닐 수 있겠구나!’
드디어 빨빨거리고 돌아다닐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신유성은 그동안 공부를 하면서도 성장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5살임에도 7살짜리 비슷한 키였다.
말하는 것은 아이 수준은 오래 전에 벗어났다.
이쯤 되니 신겸혁은 새로이 종을 붙여주었다. 이제는 시중을 드는 여종뿐만 아니라 밖에 돌아다닐 때 지켜줄 종이 필요했다.
중인의 집안에서 이 정도로 하는 것은 무리하는 것이기도 했다. 먹여 살려야 하는 입이 하나 더 느는 것이니까.
허나, 신유성이 너무나 귀했다. 보물 같아서 그냥 내버려두면 누군가 훔쳐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결국 신겸혁은 무리를 하고 말았다.
차돌은 그렇게 신유성의 종이 되었다.
“가자 차돌아.”
단단한 체구의 차돌은 신유성의 뒤에 서서 걸었다.
차돌은 앞에 걸어가는 자신의 주인을 보며 생각했다.
‘신동이라더니.’
이제 겨우 5살. 하지만 키는 7살 쯤 되어 보였다. 하는 행동을 보면 아이 같지도 않았다.
‘설마 사고 치지는 않겠지?’
차돌이 할 일은 신유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만약 신유성이 어디서 조금이라도 다쳐서 집에 들어간다? 그럼 차돌의 미래는 매우 어두워질 뿐이었다.
‘제발. 엉뚱한 짓은 하지 말길.’
뒤를 따르는 차돌은 간절히 염원할 뿐이었다.
신유성은 나들이를 나갔다. 왕이 바뀌었다. 한양의 거리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함부로 웃고 떠드는 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유성이 향한 곳은 바로 대장간이었다.
‘왜란을 피하면 돼.’
지난 1년 간, 신유성은 책을 읽으면서도 임진왜란을 피할 방법을 무수히 많이 생각해보았다.
우선 선조가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역관의 자식인 신유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양반의 자식이었다면 입신한 뒤 영향력을 발휘해볼 수도 있었으나 중인의 자식이기에 이 마저도 힘들었다.
‘오죽하면 이 몸의 아버지가 유학 보낼 생각을 했겠냐고.’
나이가 좀 더 들면 명나라로 유학을 보내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고 명나라 말을 익히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하란 소리도 들었다.
명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왔어도 조선에서 양반들이 반대하면 벼슬을 하긴 어렵다. 즉, 신겸혁은 아직 밝히지 않았지만 뜻은 하나였다.
‘나보고 명나라 사람이 되라는 건가.’
명나라에서 공부한 뒤, 명나라 여자와 혼인하고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오른다. 이것이 신겸혁의 계획이었다.
허나, 신유성은 이 방법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내가 선비가 되려고 공부한 것도 아니고.’
공부한 이유는 단 하나,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사람이 된다면 왜란은 피하겠지만 명나라도 별로 사정이 좋은 건 아니지.’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고생한다면 명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신유성이 입수한 정보는 명나라의 황제가 기행을 일삼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명나라도 얼마 안 가 망하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나라가 망할 정도로 약해졌다면 내부 사정이 그리 좋다고만 할 순 없었다.
‘임진왜란이 문제라면 전쟁이 벌어져도 버틸 수 있도록 만들면 되겠지.’
그리고 전쟁에서 버티기 위해선 좋은 무기로 무장하는 것은 필수였다. 해서 신유성은 대장간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일단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아야 해.’
뭔가 바꾸려면 일단 사정을 잘 알아야 했다. 권력이 있었다면 남들에게 시키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도 있지만 신유성은 역관의 자식. 스스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처지였다.
대장간 김씨는 갑자기 찾아온 꼬마를 보고 놀랐다.
“아니, 우리 신동께서 여긴 어쩐 일인가?”
신유성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김씨는 이를 막았다. 대장간은 위험한 작업 공간이었다. 잘못해서 신유성이 다치기라도 하면 김씨가 덤탱이를 쓰게 된다. 그러니 신유성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해서요.”
“위험하니까 안 된다. 그리고 글공부나 할 것이지 쇠 만지는 걸 봐서 뭐하려고.”
김씨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신유성은 발길을 돌려야했다.
‘처음부터 실패라니.’
계획이 엇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다.’
신유성은 직접 보는 것을 포기하고 다음 목표를 설정했다.
그것은 바로 김씨의 아들 종수였다.
“종수 형, 놀자.”
신유성은 일단 김씨의 아들 종수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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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