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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의 자식
김종수는 대장장이의 아들이었다. 그것도 보통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곧 있으면 군기시 소속이 될지도 모를 대장장이였다.
군기시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때문에 실력 없는 자는 받아주지도 않았다. 허나, 김종수는 이러한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반면 은근히 김종수에게 접근한 신유성만이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뭐하고 놀게?”
“자치기!”
자치기는 보편적인 놀이였다. 나무 막대기와 공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저렴한 놀이이기도 했다.
“둘이서만?”
“다른 사람도 불러야지.”
김종수는 신유성과 함께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하나둘 불어났고 적당한 숫자가 모이자 놀이가 시작되었다.
“야! 야! 잘 좀 던져!”
“그것도 못하냐? 비켜봐!”
“싫어 내 차례야!”
단순한 놀이였지만 놀이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 중요했다.
아이들이 어울려 투닥거리는 와중에 신유성은 계속 김종수를 챙겼다.
“종수 형 차례야! 비켜!”
“종수 형 잘한다!”
노골적인 편들기였으나 이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아이는 없었다. 한쪽에 묵묵히 서서 아이들을 지켜보는 차돌 때문이었다. 아이들도 신유성이 신동이라는 것은 아주 잘 안다. 아이들에게 신유성이 바로 엄마친구아들, 즉 엄친아였던 탓이었다.
애증의 대상이었다. 엄청나서 경외하면서도 은근히 싫은 그런 느낌. 그리고 이런 감정은 살짝 뒤틀린 상태로 김종수에게 향했다. 바로 질투란 형태로.
신동인 신유성이 김종수를 엄청나게 따르는 모습을 보이니 질투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신유성이 의도적으로 아부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신유성의 목적은 오직 하나, 바로 김종수의 환심이었다.
“하하, 봤지? 유성아!”
김종수는 훌륭하게 낚였다.
며칠 후, 노을이 질 무렵.
“형 먹으라고 가져왔어.”
김종수는 신유성이 쥐어준 곶감을 먹으며 히죽 웃었다. 행복했다. 곶감의 달달함이 혀에 퍼지니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신유성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를 발견한 것은 곶감을 다 먹은 뒤였다.
“왜 그래?”
“나 이제 형하고 놀기 힘들 거 같아.”
“왜?”
“공부해야지.”
김종수는 바로 이해했다. 그래서 몹시 아쉬웠다.
“그럼 이제 못 만나?”
“가끔 나올 수는 있을지도 모르는데. 형이 찾아와야 할 걸.”
“그래?”
김종수는 별 거 아닌 거라고 생각했다.
“아, 대장간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대장간? 거긴 왜?”
“멋있잖아. 뭔가 만든다는 게.”
“정말?”
“응. 나도 대장장이 하고 싶은데 집에서 못하게 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장장이보다 역관이 훨씬 대접받고 돈도 잘 벌었다.
“역관이 더 좋은 거야.”
김종수는 나름 조언을 해주었다.
“알았어. 난 조선 최고의 역관이 될 게.”
“그래? 그럼 난 조선 최고의 대장장이가 될 게.”
“약속?”
“약속.”
치기어린 약속. 김종수는 홀라당 신유성의 술수에 넘어갔다.
“그래도 가끔 나한테 얘기도 해줘. 궁금하거든.”
“뭐가 궁금한데?”
“무기 만드는 거 같은거.”
“알았어. 내가 알아봐줄게.”
뭘 모르는 김종수는 그렇게 약속했다.
김종수의 아버지인 김구훈은 갑자기 변한 아들의 모습에 놀랐다.
“아버지, 저 오늘부터 일 배우겠습니다."
“갑자기 왜?”
“배우게요.”
진지한 모습으로 대장장이의 일을 배우겠다고 한 것이었다.
“야장으로 살고 싶냐?”
“조선 최고의 야장이 되고 싶은데.”
뭔가 어설픈 각오로 보였으나 김구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기야 어떻든 기술을 배우겠다는 것을 내칠 이유는 없었다.
“일이 많이 힘들다. 중간에 그만 두면 안 된다.”
“할 수 있어요.”
결국 그렇게 김종수는 어린 나이에 대장장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신유성을 찾아 배운 것들을 알려주었다.
신유성은 그렇게 대장간에 대한 일을 조금씩 배웠다.
‘이걸론 부족해.’
가끔 김종수가 찾아와 가르쳐주는 지식만으로는 부족했다. 조선을 뒤바꿀만한 혁명적인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느 세월에?’
회의적인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임진왜란 전에 내가 죽는다면?’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당장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은 재미없었다.
‘유치해.’
자치기 같은 걸 하고 놀 틈이 없었다. 흥미 없었다.
관심사라면 힘을 가지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에 대비하는 것은 곁가지에 가까웠다.
‘힘을 얻으려면 결국 내가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해.’
하지만 조선에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혈통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조선 최고의 혈통은 왕실의 혈통이었다.
아무리 잘났어도 결국은 왕 아래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이율곡이 천재지만 결국 임진왜란은 못 막았지.’
선조 때문이었다. 이율곡은 천재였으나 나라를 움직이는 선택은 결국 왕이 했다. 왕의 선택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 아무리 똑똑해도 왕을 넘어서는 것은 어려웠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을 제외하고.
‘건국.’
혹은 역모. 나라를 뒤집고 왕이 되면 된다.
그러나 왕이 된다는 것은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한 일이다.’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경우라면 함께 개척에 동참하는 이들이 있어야 했고 나라를 뒤집으려면 거사를 함께 치를 부하들이 필요했다.
어느 쪽이든 사람을 많이 모아 단단한 세력을 만들어야 했다.
‘힘이 필요해.’
사람이 곧 힘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모으는 방법은 다양했다.
종교, 지위, 물질, 의리, 기타 등등.
‘이 땅에서는 힘든데.’
땅바닥에 지도가 그려졌다. 한반도와 명나라 그리고 일본이 그러졌다.
‘미국. 기회의 땅.’
신유성의 눈은 미국으로 향했다. 대한민국 역사는 잘 몰라도 미국 역사는 꽤 알았다. 미국에서 유학한 탓이었다.
‘지금가면 딱인데.’
스페인이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압도적인 지배력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몸으로 갈 수도 없고.’
문제는 역시 신분과 나이였다.
너무 어리기에 먼 곳으로 여행을 갈 수 없었다. 부적합했다. 신겸혁이 바로 명나라로 유학을 보내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도 결국 나이였다. 너무 어리니 여행을 버티지 못하고 탈이 날까 싶어서였다.
‘이 시대의 여행은 가혹한 거니까.’
하늘은 푸르렀다. 꿈은 한 없이 높았다. 그러나 출구가 아직 보이질 않았다.
답답한 마음은 신유성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압!”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선택한 것은 예전부터 해오던 검술 연습이었다. 물론 체계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막검이었다.
“합! 합! 합!”
딱! 딱! 딱!
마당에 세워둔 나무 기둥을 마구 두들겼다.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아무도 말리는 이가 없었다.
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차돌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이 되고 싶은 건가?’
신유성은 종잡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너무 영악했다. 가끔은 어른 같았다. 어쩔 땐 유치했다. 뭐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차돌이 이런 고민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 맞춰줄 텐데.’
종으로 살아온 차돌이 하는 고민은 이런 수준이었다. 상전에게 잘 보여 좀 더 편해지는 것. 다행스럽게도 신유성은 차돌을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다. 욕도 하지 않았고 엉뚱한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차돌은 신유성이 좋았다. 이 시대에 까다롭지 않은 주인을 만나는 것은 노비에겐 행운이었다. 그래서 차돌은 신유성이 무럭무럭 자라서 계속 상전으로 남아주길 원했다. 그래야 앞날이 편안해질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웬만하면 신유성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런데 신유성은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차돌은 답답했다.
‘물어보기도 뭐하고.’
괜히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이러한 호기심을 풀어줄 존재가 등장했다.
“유성아.”
“예, 형님.”
“시끄럽다.”
“예, 형님.”
그림을 그리던 신주성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넌 뭐가 되려고 그러냐?”
“모르겠습니다.”
“왜?”
“모르니까요.”
무의미한 문답이 오갔다.
“무관이 되고 싶은 거냐?”
“아뇨.”
“그럼 벼슬은?”
“별로.”
“상인?”
“그다지.”
신유성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당당하게 왕이 되고 싶다고 말할 순 없었다. 이와 같은 말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멸문지화였다. 그러니 만사에 무관심한 척 대충 얼버무릴 뿐이었다.
“실없는 녀석. 넌 싫어도 명나라에 가야 해.”
“압니다.”
“그럼 막대기는 그만 휘두르고 그림이라도 그려라. 명나라 가서 고관들하고 어울리려면 그림 실력도 필요할 테니.”
“됐습니다.”
신유성은 붓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기합 없이 허공에 막대기를 휘둘렀다.
“녀석.”
나무를 두드리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 신주성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차돌은 조용히 물러났다.
‘칼질에 관심이 있으시구나. 알아봐야겠다.’
집을 나선 차돌은 조용히 한양에서 칼 좀 쓴다는 사람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신겸혁은 차돌이 자주 밖으로 돌아다니자 의문을 품었다. 차돌이 밖으로 나갈 땐 신유성이 항상 집에만 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으나 집에서 부리는 노비가 자주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호기심을 불렀다.
“무슨 일로 자꾸 밖으로 나돌아 다니느냐?”
“저기 작은 도련님이 검술에 관심 있는 것 같아서요.”
“어찌 그리 생각했느냐?”
차돌은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말했다. 그러자 신겸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에 관심을 갖다니.’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사내아이들이 무술에 관심을 갖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신유성도 칼싸움하며 놀 나이가 되었다고 신겸혁은 판단했다.
‘무관이 되려는 걸지도 모르지만 무관은 힘들지.’
칼만 잘 써선 무관이 될 수 없었다. 학식을 갖춰야 함은 물론 활도 쏴야하고 말도 탈 줄 알아야 했다.
이 두 가지를 못하면 무관이 되는 방법은 누군가 천거해야만 가능했다.
“넌 됐으니 이제 그만 돌아다니고. 알겠지?”
이후 신겸혁은 검술을 잘 아는 이를 수소문했다.
얼마 후, 신유성은 검술을 가르쳐 줄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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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