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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5화 (5/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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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의 자식

장일도는 원래 관노비였다. 하지만 추노꾼으로 활동하며 큰 공을 세웠고 덕분에 면천 받았다. 하지만 면천이 되었다고 천국이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여전했다. 다른 일을 알아보려고 해도 쉽지는 않았다. 살던 곳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결국 추노꾼으로 계속 활동하게 되었다.

“오늘부터 칼 쓰는 법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겸혁의 부탁으로 신유성을 가르치게 되었다. 일을 나가지 않고 쉴 때 틈틈이 봐주고 돈을 받기로 한 것이었다.

스승이니 제자니 하는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돈을 받고 하는 일일뿐.

장일도는 나이가 한참 어린 신유성에게 함부로 하대를 하기가 꺼려졌다. 신분상으로는 신유성이 아주 조금 위일 뿐이라 양반 대하듯 공손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허나, 신겸혁은 역관이었고 신유성은 장래가 기대되는 신동. 괜히 밉보일 필요가 없으니 공손하게 대했다.

“우선 싸움을 잘 하려면 대충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튼튼한 몸이고 두 번째는 독기고 마지막이 경험이죠.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마지막 경험 정도입니다.”

몸은 태어나면서 물려받는 것이니 어떻게 할 수 없고 독기는 스스로 품어야 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도울 수 있는 것은 경험뿐이었다.

“들어오시죠.”

준비한 목검을 든 장일도는 신유성이 공격하는 것을 받아주며 슬쩍슬쩍 엉덩이나 팔 부분을 건드렸다.

“이러면 또 죽은 겁니다.”

“아무래도 제가 불리한 거 같은데요?”

“막을 수 있는 정도로만 공격하는 겁니다.”

원래라면 사정없이 팼을 것이다. 독기를 품게 만들기 위해서. 허나, 신유성은 그렇게 팰 수 없었다. 그러니 그저 칼싸움 상대를 해주는 것이었다.

“자, 또 해보죠.”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이렇게 상대해주고 돈 받으니 얼마나 좋은가.’

너무 기분이 풀어졌을까?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한 대 때리려고 매의 눈을 하고 살피던 신유성의 눈에 미소가 잡혔다.

‘이 인간이?’

뭔지 몰라도 의도가 좀 보였다. 대충 놀아주고 돈 받겠다는 심리가.

‘그냥은 못 주지.’

뒤로 물러난 신유성은 차돌을 불렀다.

“제가 피곤하니까 오늘 시간 다 될 때까지 이 녀석도 같이 하죠.”

차돌을 쓱 본 장일도는 신음을 흘렸다.

‘만만치 않게 생겼는데?’

몸이 상당히 날렵해보였다. 추노꾼을 하겠다고 한다면 한 번 키워보고 싶을 정도로.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시키면 나중에 편해질 것 같은 인상이었다.

허나, 차돌의 주인은 신겸혁이었다. 마음대로 추노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르치고 싶지 않은데요.”

“왜죠?”

“저 놈 도망가면 저 같은 놈이 잡아와야 하는데요.”

즉, 도망치는 노비의 싸움 실력이 좋으면 잡는데 애먹으니까 못 가르치겠다는 거였다.

“도망 안칩니다.”

차돌은 욱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노비와 눈이 맞아 도망친 양반집 마님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나하고 놀아주다가 돈 받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돌려 말하지 않는 신유성. 그냥 급소를 푹 찌르고 들어가니 장일도는 찔끔했다.

“험험, 그야 아직 어리시니 살살 해서 그런 거지 노는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 쉬는 동안에 이 녀석 상대나 좀 해주라니까요. 그게 뭐 어렵다고.”

신유성은 차돌의 등을 툭 쳐주었다. 상전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고 장일도가 마음에 안드는 것도 있어 차돌은 이를 꽉 물고 앞으로 나섰다.

“아이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 녀석 다치면 나한테 물어내라고 하지 마십쇼.”

“알았습니다. 대신 살살 부탁합니다.”

편하게 놀긴 글렀다고 생각하며 장일도는 자세를 잡았다.

‘빨리 끝내버리자.’

빨리 끝내면 경험을 쌓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한 방에 끝나니까.

목검을 든 차돌은 몸을 날렸다. 무시무시한 기세. 치켜든 목검에는 죽이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허나, 차돌의 독한 공격은 장일도에게 닿지 않았다.

“컥!”

크게 몸을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공격을 막은 것도 아니었다. 차돌의 공격을 피해 그저 한 걸음 옆으로 움직이며 배를 찔렀다.

달려들던 힘이 오히려 차돌에게 되돌아갔다.

배를 찔린 차돌은 충격에 쓰러졌다.

“이제 더 못 싸울 것 같은데요? 가봐도 됩니까?”

“네, 수고하셨습니다.”

장일도는 그렇게 돌아갔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놀았다.

차돌은 배를 바라보았다. 멍이 들어 있었다.

‘젠장.’

한 동안 움직이기 힘들었다. 신유성은 차돌을 보며 말했다.

“많이 아프지?”

“아닙니다.”

“미안하다.”

“그러지 마십시오. 제가 부족해서 당한 겁니다.”

“다음부턴 시키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라.”

“저.......”

차돌은 조심스럽게 신유성을 살폈다.

“왜?”

“다음에도 또 하면 안 됩니까?”

“또 맞을 텐데?”

“그래도 한 대 때려주고 싶습니다.”

차돌은 눈을 빛냈다. 한 대 맞았는데 이대로 물러서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상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신유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쩌면 더 잘 싸우는 놈으로 바꾸실 거야.’

지금 생활이 편하고 좋았다. 신유성의 옆에만 붙어있으면 먹을 것도 잘 먹고 몸도 편했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노비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는 차돌도 봐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유성의 밑에서 생활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도 잘 알았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한다.”

신유성이 다시 글공부를 위해 방으로 들어가자 차돌은 눈을 감고 싸웠던 순간을 되새겼다.

‘그 때 그 놈이 어떻게 움직였더라?’

차돌은 장일도의 움직임을 몇 번이고 떠올리며 대응 방법을 생각했다.

차돌은 매번 맞았다. 하지만 맞으면서 조금씩 공격의 방법을 달리했다.

‘좀 더 간결하게.’

동작이 큰 공격 방법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작이 큰 만큼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이 쉬웠다. 비슷한 속도로 움직인다면 좀 더 간결하게 움직이는 쪽이 더 빨랐다.

딱!

장일도는 처음으로 차돌의 공격을 막았다. 예전에는 그냥 반격을 꽂아 넣으면 됐는데 이제는 통하지 않았다. 간결한 동작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오니 막을 수밖에 없었다. 피하려고 해도 마지막까지 공격을 내지르지 않고 쫓아오다 거리가 좁혀진 순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퍽!

하지만 그 뿐이었다. 공격을 쳐내며 반격하니 차돌은 또 얻어맞았다.

‘잘 싸우네.’

신유성은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것도 공부가 되었다. 차돌의 공격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좀 더 효율적인지 깨달은 것이 컸다.

‘화려한 움직임은 오히려 독.’

정말 심심할 정도로 동작들이 간결했다. 그러나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장난이 아니라 정말 때리는 거니까.

무엇보다 장일도는 막싸움을 하는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뒤엉켜서 주먹으로 치고받고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역시 수준급 추노꾼.’

도망친 노비들은 잡히지 않기 위해 발악한다. 저항하다 살인을 벌이는 경우도 흔했다. 이런 이들을 잡으려면 추노꾼도 실력이 있어야했다. 여럿이서 달려들면 유리하긴 하다. 하지만 노비를 쫓는 상황에서 항상 여럿이 포위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장일도는 수없이 노비를 잡아들여 공을 쌓아 면천되었다. 계속 싸우고 하다 보니 실력이 늘어난 면도 있었다.

대련이 끝나자 장일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당분간 만나지 못할 겁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요즘 일이 들어와서 말이죠.”

추노꾼이 본업이었으니 당연히 도망친 노비를 잡는 일이라면 뛰어야 했다. 장일도는 신유성의 검술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편하게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기에 많이 아쉬웠다.

추노꾼의 일은 혼자서만 하는 건 아니었다. 동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일을 너무 가려가면서 하지 않다보면 일감이 아예 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일을 너무 가릴 순 없었다.

신유성을 가르치는 일이 편하고 좋긴 하지만 평생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바짝 벌어서 땅이라도 좀 사놔야 편해진다.

신유성을 가르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짭짤한 부업이었다.

“일이요?”

“요즘 좀 시끄러웠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그렇죠.”

시끄러웠다. 인종 서거 이후 명종이 즉위하며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조정을 꽉 쥐었다.

권력을 잡은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윤임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죽었다. 윤임 일파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불똥은 사림파에도 튀었다. 잡혀서 사형 당하거나 노비가 된 자들이 많아졌다.

장일도에게 들어온 일감은 도망친 자들을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잡아오면 현상금을 준다니 노비가 아니더라도 잡으러 가는 것이었다.

“땅 많으면 노비 좀 사시는 것도 좋을 땝니다.”

장일도는 그렇게 말하며 떠났다.

잠시 생각하던 신유성은 신겸혁을 찾았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사정이 괜찮다면 땅하고 노비 좀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비가 된 자가 많으니 가격이 떨어진다는 소리였다. 신겸혁은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성이 말한 것처럼 주변에서 돈 있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신겸혁도 알고 있었다.

‘그래, 지금 벌어두지 않으면 또 언제 불려둘까?’

집에 여유가 없었다면 꿈도 못 꿀 투자였으나 신겸혁의 집은 아직 여유가 넘쳐났다. 하지만 사화로 인해 불어난 노비를 사는 일은 조심해야만 했다. 자칫하면 양반들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일은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글공부에 정진해라.”

다음 날, 신겸혁은 땅과 노비를 알아보기 위해 나섰다.

개인이 소유하는 사노비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집에 데리고 있는 솔거노비가 있는가 하면 집 밖에 기거하며 주인에게 일정 금액을 바치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윤임을 비롯한 양반들의 집에는 솔거노비 외에도 많은 외거노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소유권과 땅은 윤원형 일파가 갈라먹었다.

양반집 하나 집어 삼키며 부도 같이 삼켰다. 당연히 윤원형 일파는 더욱 큰 부자가 되었다. 자신들이 보기에 쓸모 있는 자들은 그냥 꿀꺽하고 별로 쓸모가 없는 이들은 내다 팔았다. 이런 이들이 새로 노비가 된 자들과 뒤섞여 있으니 신겸혁은 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저 남자는 애하고 같이 사야 합니다.”

노비가 대거 나오고 윤원형 일파에 속한 사람 중 하나가 쓸모없다 여긴 노비들을 다시 파는 역할을 맡았다.

노비도 입이기 때문에 오래 데리고 있으면 곡식을 많이 소모하게 되니 파는 입장에서는 오래 데리고 있으려 하질 않았다.

덕분에 가격은 조금 낮은 편이었다.

“그렇습니까? 뭔가 사연이 있습니까?”

“자식하고 죽어도 못 떨어지겠답니다.”

“그럼 확실히 양반하곤 상관없는 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행여 숨겨진 사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신겸혁은 왠지 남자에게 끌렸다.

“그럼 저 남자로 하지요.”

그렇게 신겸혁은 돌쇠와 그 딸을 샀다. 싸게 사려다가 오히려 돈을 조금 더 주게 되었지만 신겸혁은 개의치 않았다.

돌쇠는 빚을 졌다. 세금 때문에 공물을 사기 위한 쌀을 빌렸다가 갚지 못해 빚이 생겼다. 빚을 지게 되자 삶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도망쳤다. 하지만 도주 생활은 혹독했다.

아무 것도 없는 산중에서 먹고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다 아내를 잃었다. 아이만 남게 된 돌쇠는 결국 제 발로 산을 내려왔다. 딸까지 잃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렇게 신겸혁의 집으로 흘러들어가게 된 돌쇠는 홀로 땅을 일구는 신세가 되었다. 신겸혁이 사정을 듣고 외거노비로 해준 덕분이었다.

“딸은 나이가 너무 어리니 집에서 키우겠다. 나중에 돈을 벌어 면천도 받고 딸도 다시 사가라.”

“고맙습니다요! 참말로 고맙습니다요!”

신겸혁의 자비에 돌쇠는 감격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돌쇠의 딸은 신유성의 유모가 돌보게 되었다. 때문에 신유성도 돌쇠의 딸, 매화와 자주 마주쳤다.

노비이기에 유모는 매화에게도 노비의 예의를 가르쳤다. 신유성을 비롯해 주인의 말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

매화는 영민해서 이를 잘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돌쇠와 함께 하며 힘겹게 산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좋았다. 유모가 말 안 들으면 버려진다는 말에 겁을 집어먹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자주 얼굴을 보게 된 신유성이 몇 번 곶감을 쥐어주니 항상 신유성의 근처를 맴돌았다.

귀여운 강아지가 곁에 붙은 느낌에 신유성은 즐거웠다. 그렇잖아도 지겨운 삶에 잠시나마 즐거움이 생긴 것.

‘귀엽네.’

고개를 돌리면 항상 방실방실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매화였다. 신유성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더 좋아했다.

“배고프지?”

“네.”

“밥 먹자.”

같이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정은 더욱 깊어져갔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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