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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1547년, 명종 2년.
왜관이 부산포에 다시 열렸다. 이로 인해 신겸혁은 부산포로 내려가게 되었다. 일본어를 전문으로 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너도?”
신유성은 기회다 싶었다.
‘한양에서는 백날 있어봐야 공부만 해야 한다.’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성장할 때까지 곱게 공부하다가 명나라로 가게 될 뿐이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그런 삶이 싫었다.
‘돈을 벌수도 있어.’
무엇보다 왜관을 들락거릴 수 있다면 돈을 벌 수 있었다. 역관이 중간에 끼어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알기 때문에 신유성은 꼭 끼어들고 싶었다.
‘일본인들이 원하는 물건을 슬쩍 구해주기만 해도 돈을 벌 수 있다. 그것만 잘 이용하면 아무도 모르게 거금을 쥘 수 있어.’
재력은 곧 권력이었다. 물론 반대로 권력이 곧 재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유성은 힘을 원하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양은 양반들이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윤원형의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고 밑바닥에서 굴러야 할 뿐이었다.
“왜인들과 얘기도 해보고 싶고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신겸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어렸다면 어려웠겠지만 이제 7살이나 된 신유성이었다. 아니, 10살 같은 7살이라고 할까? 신유성은 부쩍 자라서 또래보다는 항상 컸다.
결국 신유성도 부산포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혹이 하나 붙었다.
신유성이 떠난다는 말에 매화는 충격을 받았다.
‘헤어져?’
이제 5살인 매화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과 같았다. 항상 주인으로 여기던 신유성이 떠난다니 마치 사별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흐윽!”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러면서도 크게 울지 않았다. 울음을 참으려고 하다 보니 딸꾹질을 했다. 그러면서도 신유성의 옷깃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울기만 하던 매화는 울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부터 매화는 매일 같이 울었다. 큰소리도 내지 않고 매일 신유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대니 유씨는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돌쇠를 불러 상의했다.
“저렇게 울다 큰일이 날 것 같은데 어쩌면 좋겠는가?”
“마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돌쇠는 딸을 맡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일을 하느라 바빠 딸을 돌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허락도 없이 아무나 짝으로 들여 딸을 맡길 수도 없었다. 어찌되었든 돌쇠는 노비였다. 주인이 짝을 지어주지 않으면 짝 없이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그럼 부산포로 같이 보내도록 하겠네. 그리 아시게.”
아이에겐 험난한 여정이었으나 매일 같이 울어대는 아이가 행여 잘못 될까 싶어 돌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야. 도련님 잘 모셔야 한다.”
“네에.”
같이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눈물이 뚝 그쳤다. 그리고 행복해하는 표정에 돌쇠는 살짝 서운하기도 했다.
향통사. 이것이 바로 신겸혁의 지위였다.
부산포에 도착한 신겸혁은 부산포 근처에 집을 얻었다. 허나 문제가 생겼다.
‘으음, 방을 어떻게 써야 하나.’
그리 큰 집을 얻지는 못했다. 갑자기 사려니 주변에서 집값을 다들 올려 부른 탓이었다.
‘외지 사람이라고 바가지를 씌우다니.’
허나 어쩔 수 없었다. 너무 먼 곳에 집을 얻으면 일을 하기가 불편해진다. 향통사로서 왜관에서 실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집이 멀면 그만큼 고생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방이 부족하다.”
“그럼 제가 매화와 함께 쓰죠. 다른 방은 유모와 차돌이 쓰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흠, 그래도 일단 물어보기라도 하자.”
남녀가 유별했다. 유모는 여자. 차돌은 남자.
다 큰 성인 남녀가 한 방에서 잔다?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더구나 차돌은 혈기왕성한 젊은이. 유모는 차돌에 비해 나이가 좀 있었으나 충분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였다.
“너희 둘의 생각을 듣고 싶구나.”
신겸혁은 억지로 짝을 지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노비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재산이 불어나는 것과 같으니 짝짓는 것을 장려해야 했지만 억지로 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요.”
“저도요.”
유모는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젊은 차돌이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특히 검술 대련을 할 때 보였던 모습은 유모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합방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쓰는 방에는 조용한 열풍이 몰아닥쳤다. 한편, 반대편에 있는 신유성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젠장.’
유모와 차돌이 소리를 죽인다고 했지만 한밤중에 나는 소리였다. 더구나 처음에는 미미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숨소리는 거칠어졌고 환희에 젖은 두 사람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제길.’
아이의 몸만 아니었어도 어디서 부인을 구해 지금쯤 신나게 폭풍정사를 벌였을 텐데.
신유성은 한숨을 내쉬며 뒤척였다.
날이 밝자 신겸혁은 일을 하기 위해 나섰다. 한 편, 집에 남게 된 신유성은 차돌과 함께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신겸혁과 함께 왜관 안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신겸혁도 첫날이었다. 적응하지도 못했는데 애를 데리고 다닐 순 없었다.
‘휑하구나.’
왜관 주변에 놀고 있는 땅이 참 많았다. 과거 삼포왜란이 벌어졌을 때 왜관의 일본인들이 행패를 부렸던 것이 소문난 탓에 다시 들어와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신유성은 계속 걸었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곳은 부산포에 정박한 배들이 있는 곳이었다.
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부산포 왜관이 열린 것이 얼마 되지 않은 탓이었다.
‘저들이 다 돈인데.’
신유성의 눈에는 그저 돈으로 보였다. 허나, 신유성이 일본인들에게 제공할만한 것이 없었다. 돈도 없었다.
“돌아가자.”
그러나 포기할 순 없는 법. 신유성은 집으로 돌아와 고민하다가 답을 찾았다.
‘술이다.’
주변에 술을 팔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먼저 하는 쪽이 이득이었다.
‘뱃사람이라면 술과 음식을 찾는 법이지.’
하지만 술장사를 마음대로 할 순 없었다. 일단 집안의 어른인 신겸혁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신겸혁은 신유성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주막을 열면 돈을 벌기 쉬워질 거라는 얘기는 공감했지만 신유성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하지만 글공부만 시킬 생각이었다면 한양에 두고 와야 했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봐라.”
신겸혁은 가지고 온 돈 중 일부를 내주었다. 나이 7살이면 양반집에서는 슬슬 집안일을 하며 아랫사람을 다루도록 했다. 집안의 대소사에 관여해 일을 배우게 하는 것이었다. 신겸혁도 그런 의미에서 돈을 떼어주었다.
다음 날, 신유성은 바로 근처의 집 하나를 빌렸다.
“뭐? 주막을 하겠다고?”
“네.”
“왜인들 상대로 장사는 힘들 텐데?”
“그건 알아서 할 겁니다.”
어린 신유성이 직접 거래에 나섰지만 헛수작을 부리는 이는 없었다. 신유성의 아버지가 향통사이기 때문이었다. 양반의 입장에서 보면 보잘 것 없는 직위였으나 왜관 근처에서는 힘 좀 쓸 수 있는 자리였다.
다만 현재로선 언제 또 왜관이 닫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들 왜관 주변으로 모이길 기피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왜관 근처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은 항상 있어왔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왜관을 모두 폐쇄하고 오직 부산포 왜관 하나만 다시 열었을 뿐이니 얼마 안 가 다시 닫힐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유성은 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돈을 보게 되면 다들 달려들 거야. 그때가서 시작하려면 늦어.’
집을 빌려 주막으로 만들기 위해 개조했다. 원래라면 평상이나 하나 놓고 문 입구에 주막이라는 표시나 달면 그만이었으나 신유성은 차별화를 시도했다.
돈을 들여서 평상 주변에 기둥을 세우고 나무로 지붕을 단 것이었다. 다들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신유성은 달리 생각했다.
‘비와도 장사는 해야지.’
다음으로 한 준비는 바로 인력 공급. 여기에는 늙은 여자 노비를 한 명 구해 찬모로 삼았다. 유모가 있었지만 주막에서 찬모로 쓸 순 없었다. 차돌의 짝을 주막에서 굴리다 엉뚱한 놈하고 배가 맞으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었다.
주막이 뚝딱 완성이 되자 신겸혁은 아들의 부탁을 듣고 일본 상인에게 슬쩍 얘기를 흘렸다.
“왜관 밖에 주막을 하나 냈는데 술 생각나면 한 번 들려보시오.”
“여자도 있습니까?”
“여자는 기대하지 말고. 그냥 술만 파니까.”
상인은 입맛을 다시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왜관 안에도 아직 술을 파는 곳이 없었다. 문을 다시 연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자 신겸혁의 이야기를 들은 상인은 선원을 데리고 주막으로 향했다. 당분간 술은 마실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실 수 있다니 따라 나선 이들이 많았다.
“어서 옵쇼.”
주막의 입구에는 신유성이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했다. 그러자 상인은 깜짝 놀랐다.
“우리 사람인가?”
“아버지가 역관이십니다.”
“아!”
상인은 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감탄했다. 신유성의 일본어가 상당히 능숙했기 때문이었다.
총명해 보이는 소년이 자신과 같은 말을 능숙하게 한다니 상인은 기분이 좋아졌다.
“여긴 뭘 파는가?”
“아직 연지 얼마 안 돼서 많은 것은 없고 술과 생선 구이가 있습니다.”
“그럼 그걸로.”
상인은 처음에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워져 나온 생선은 그냥 구운 것이 아니었다. 생선을 구우며 겉에 간장을 슬쩍 바른 것이었다.
두툼한 생선살과 바삭하게 구워진 껍질에 스며든 간장이 혀에 착 감겼다. 여기에 술을 마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술과 안주를 먹는 선원들도 다들 좋아했다.
한 달이 지나자 신유성은 주막을 세우며 든 돈을 배로 뽑아냈다. 맛있다고 소문이 나자 왜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한 번씩 와서 먹고 간 것이 컸다. 더구나 술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어서 모두 신유성에게 술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한시적이지만 신유성은 술을 독점해서 팔 수 있었다. 선원들이 마시는 양은 상당했다. 상인들도 술을 좋아했다. 뱃사람 치고 술 싫어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때문에 술은 엄청나게 빨리 팔렸다. 문제는 신유성의 경쟁자가 생겼다는 것.
주막에서 필요한 술을 많이 주문하다보니 소문이 났고 결국 다른 이들도 알게 되었다. 얼마나 장사가 잘 되나 살피고 간 이들은 그래도 기회라고 생각하고 왜관 근처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경쟁자가 들어서게 되자 신유성은 과감하게 장사를 접었다.
‘평생 술장사 할 것도 아니고.’
신유성이 장사를 접는다고 하자 얼른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원래 장사가 잘 되던 자리라 웃돈을 주고 들어오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자는 없었다.
오로지 흑자!
신겸혁은 이러한 신유성의 행보에 다시 고민했다.
‘상재가 보통이 아니네.’
잘하면 조선 최고 갑부를 노려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다. 하지만 이미 정한 바가 있으니 상인이 되어보라고 부추길 생각은 없었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대로!’
돈을 어느 정도 번 신유성은 왜관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왜관 밖에 나왔듯이 신유성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더구나 왜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신유성을 알고 있었다. 주막에서 모두 얼굴을 익혔기 때문이었다.
신유성은 서서히 자리 잡고 있는 왜관을 보며 생각했다.
‘이들에게서 살만한 것이라곤 은과 구리 정도뿐이구나.’
잡화가 있긴 했지만 신유성의 눈에는 그다지 차지 않았다. 반면 일본인들은 직물을 비롯해 많은 것을 원했다.
‘직물이라.’
면포와 쌀은 신유성이 어떻게 해보기가 어려웠다. 면포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이라도 만든다면 엄청나게 팔아먹을 수 있지만 공장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너는 누구냐?”
신유성이 상인들의 점포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한 점포에서 청년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신유성이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상대가 다짜고짜 반말을 하니 신유성도 똑같이 나갔다. 그러자 청년이 피식 웃었다.
“난 소 요시시게다.”
소 요시시게는 대마도의 도주인 소 야스하루의 아들이었다.
조선에서 왜관을 열었지만 왜관에 주로 들락거리는 일본인은 대마도 사람들이었다. 대마도는 일본과 막부 사이에서 장사를 하며 엄청난 이윤을 남겨 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마도주는 왜관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 아들을 파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대마도 도주님과의 관계가?”
“아버지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신유성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요시시게의 얼굴에 흥미가 돌았다.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 꼬맹이라면 딱히 오래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이름만 듣고 자신의 신분을 유추해내니 상당히 특별해 보였다.
“우리 얘기 좀 하는 게 어떤가?”
“제 시간은 비쌉니다.”
“하하! 그럼 조금만 나한테 시간을 파시게.”
신유성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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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