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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은화 한 닢을 받은 신유성은 대화에 응했다. 요시시게는 근처의 점포로 들어가 떡을 내오도록 했다.
“날 어떻게 안 거지?”
“왜관 밖에서 술을 팔면서 들었습니다.”
“집에서 술을 파나?”
“아니요. 제가 부탁해서 열었습니다.”
중요한 인물의 관심을 사기 위해 신유성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술을 팔면서 들락거리는 상인들과 대화하며 정보를 캐냈다. 대마도주의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왜 술을 팔 생각을 한 거지?”
“그거야 먼 곳에서 왔으니 대접하려고요.”
“하하, 벌써 그런 생각을 한 건가? 앞으로 상인이 되고 싶나?”
“아니요. 그냥 돈이 좀 필요했을 뿐입니다.”
“돈?”
“저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재미있게 살고 싶습니다.”
왕이 되고 싶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이 시대에 왕이 되고 싶다는 소릴 함부로 하고 다니면 목이 날아가니까. 주둥이 잘못 놀려서 멸문지화를 당하는 경우를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엄한 놈 옆에 있다가 날벼락을 맞는 일도 흔했다.
그러니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세상을 보고 싶다고?”
“세상의 음식도 다 먹어보고 여자들도 뭐 그렇고 그런 얘기입니다.”
“하하하하하! 벌써부터 여자를 찾는 건가? 남자답구나!”
음란하다고 놀리는 일은 없었다. 욕을 할 일도 되지 못했다. 일찍 성에 눈을 뜬다고 욕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아이를 낳아도 요절하는 일이 흔한 시대니까. 크다가 죽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다산은 장려해야 할 일이었고 다산을 장려하다보니 성에 관심을 갖는 것을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세상은 거칠다. 그건 알고 있는가?”
“그래서 걱정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호위를 늘려야 하는데 쉽지 않으니까요.”
“하하.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아이 답지 않은 이야기에 요시시게는 웃었다.
“그런데 네 아버지가 하는 일은 무엇이냐?”
“이곳의 향통사입니다.”
“오호. 그래서 우리말을 그리도 잘 하는 구나.”
“뭐 그렇죠.”
“그럼 잘 하는 것은 무엇이냐?”
“명나라 말 좀 합니다. 사서오경도 외웠고. 그림도 좀 그리죠.”
“어디 한 번 들어보자.”
요시시게는 얼른 명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상인을 불러왔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무역을 하며 이익을 취했다. 그러다보니 많은 상인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고 이들 중에는 명나라에도 오가는 이들이 꽤 있었다.
신유성은 명나라 말을 하는 상인과 대등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니, 오히려 압도하는 면이 있었다. 상인은 일상적인 대화에는 능했으나 학문과 관련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유성이 시조를 읊고 시까지 줄줄 외워대니 당해내질 못했다.
“대단하구나.”
요시시게는 신유성에게 감탄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할 줄 아는 말만 셋이었다. 여기에 학식을 겸비했으니 장래가 기대되는 인재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까?’
능력만 따지면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 욕심이 났다.
‘우리 가문에 힘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신유성이 양반집 자제였다면 하지도 않았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향통사의 아들. 요시시게도 조선의 신분 제도는 잘 알고 있었다. 장사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정보를 수집하는 일도 겸하고 있기에 조선에 대한 분석은 당연한 일.
“앞으로 자주 놀러오도록 해라.”
“제 시간은 비쌉니다.”
“하하. 그럼 묻겠다. 네 평생을 사는데 얼마면 되겠느냐?”
“평생은 안팝니다. 수지가 안 맞으니까.”
“하하, 알았다. 그럼 이건 어떠냐? 내가 이 안에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 장사를 하는 건?”
“저야 좋죠.”
공식적으로 점포를 신유성의 이름으로 내주는 것은 아니었다. 요시시게는 장소만 내주고 신유성이 알아서 장사를 해 돈을 벌라는 의미였다.
‘생각보다 좋은 인연을 맺었네.’
인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업적인 의미에서 좋은 인연이었다. 요시시게는 신유성을 더 가까이에서 볼 생각으로 점포를 하나 내주었다. 더구나 그냥 점포도 아니었다. 집이 딸린 점포였다.
“그러면 안에서 생활해도 되겠구나.”
“그래야죠.”
원칙적으로는 허락되지 않을 일이었다. 허나, 왜관의 담이 사람을 막지는 못한다.
“그럼 난 이곳에서 생활할 테니 넌 안에서 지내도록 해라.”
그렇지 않아도 좁은 집이었지만 신겸혁은 이제 방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신겸혁은 집안일을 해줄 찬모로 쓸 노비 하나만 더 구하고 나머지는 모두 신유성을 따라가도록 했다.
점포는 꽤 컸다. 점포 뒤쪽에는 주거 공간과 창고가 함께 있었다. 이층은 잠을 자는 방이 있었다.
‘뭐로 채울까?’
조선 상인들과 일본 상인들의 거래는 한 달에 열리는 횟수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꼭 준수하지는 않았다. 많은 향통사들과 지역 유지들이 들랑거리며 슬쩍 물건을 사고파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일본어를 하는 역관들도 짭짤하게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거래를 하려면 향통사를 통하지 않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일단 먹는 장사를 하자.’
점포가 꽤 컸다. 하지만 신유성은 기존의 조선 상인들이 취급하는 품목은 하지 않기로 했다. 기존 상인들의 거래 품목에 손을 댄다는 것은 경쟁을 의미했다. 경쟁이 과열되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흔했다.
‘먹는 장사로 뭘 좋아하는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야.’
무엇보다 신유성은 아직 일본의 상황을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먹는 장사를 한다고요?”
“그렇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돈을 받고 싶네요.”
“흐음. 알겠습니다.”
신유성의 일을 돕기 위해 점포로 파견된 견습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시시게는 신유성의 일을 거들면서 잘 살피라고 견습 상인을 붙여 놓았다.
‘일단 메뉴가 중요한데.’
흔히 먹을 수 있는 것을 팔아봐야 돈이 되지 않는다.
‘돈까스를 팔면 참 잘 팔릴 텐데.’
하지만 돈까스는 만들 수 없었다. 아직은 빵가루를 만들기 위해선 밀가루가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 조선에서는 밀가루가 귀해서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굽거나 튀기는 것.’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어묵이었다.
‘어묵을 만들려면 녹말이 필요할 텐데.’
밀가루는 구하기 힘들었지만 녹말은 구할 수 있었다. 신유성은 바로 녹말을 비롯해 어묵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들을 구했다.
‘기름이 비싸긴 하지만.’
기름도 구했다. 한 번 튀긴 것은 맛있으니까.
“생선살은 곱게 갈아내고.”
어묵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반죽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대량의 기름을 끓이고 튀겨냈다.
‘흐음.’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신유성은 계속 튀겨내 한 바구니를 만들어냈다.
“이것 좀 주변에 돌리고 와주시죠.”
견습 상인은 어묵이 든 바구니를 받고 나가며 하나 입에 넣었다.
“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기름의 맛은 너무나 진했다. 느끼할 정도이긴 했지만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기름맛! 어묵을 아예 구경 못해본 것은 아니었으나 튀겨낸다는 발상은 처음이었다.
신유성이 주변에 튀긴 어묵을 돌리자 요시시게가 금방 찾아왔다.
“이게 뭔가?”
“튀긴 어묵입니다. 드셔보시죠.”
신유성은 납작한 것과 길죽한 어묵 두 종류를 만들었다.
튀긴 어묵을 맛본 요시시게는 감탄했다.
‘이런 것을 만들어 내다니. 처음 먹어보는 것을.’
맛이 조금 진하긴 했다. 느끼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맛있었다. 무엇보다 신기했다.
‘돈 좀 벌겠구나.’
요시시게의 예상대로 신유성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상인들을 따라온 선원들은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했다. 일을 하고 나면 맛있는 음식과 술로 하루의 고단함을 잊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와중에 튀긴 어묵 가게는 흥미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이것 참 맛있네.”
“그러게. 이 집 주인이 신동이라더니 대단해.”
무엇보다 신유성은 튀긴 것만 팔지 않았다. 아무리 맛있는 것도 매일 먹다보면 질리기 마련. 신유성은 매출이 둔화될 조짐을 보이자 새 요리를 선보였다. 그것은 바로 어묵탕이었다.
튀긴 어묵을 국물에 삶아서 파는 것.
이것은 또 다시 대박을 쳤다. 술안주로도 알맞아서 술꾼들은 더욱 환호했다.
“다음에는 또 뭘 팔 건가?”
이제는 요시시게도 단골이 되었다. 쉬는 시간이면 틈나는 대로 신유성을 찾아와 음식을 팔아주고 갔다.
“아직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나라 사정은 어떻습니까? 혼란스럽다고 들었는데.”
술을 마시면 술자리에서 대화가 오가기 마련이었다. 돈을 버는 일에서 음담패설까지 온갖 이야기가 다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는 일본의 사정에 대한 것도 있었다.
‘전국시대라. 그래, 지금 일본이 혼란스러운 시기라 이거지?’
각 지방의 영주들이 서로 군대를 일으켜 대립하고 있는 시기였다. 상대의 영지를 점령하고 빼앗는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찌 될지는 모르겠구나.”
요시시게로서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강력한 영주가 나타나 일통을 한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유명한 영주들이 있긴 하지만 얼마 안 가 무너지기도 했다. 힘이 비슷한 영주들도 여럿이었다.
‘전쟁을 하다 결국 통일되고 그 힘이 조선으로 향하겠지.’
임진왜란이 일어난 배경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은 잘 몰라도 임진왜란과 관련된 정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의 많은 이들이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 때 붕당 정치를 도입해 왕권을 강화할 시도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쟁을 대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제대로 막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의도야 어찌되었든 결과가 나쁘니 선조는 암군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럼 대마도는 어찌 하렵니까?”
“우리? 우리야 너무 멀어서 끼어드는 것이 이상하지.”
일본 전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대마도는 나름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요리를 만드는 사람을 나한테 넘기지 않겠나?”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사람을 데려다가 비슷한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를 키워볼 생각이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장사합니까?”
“얼마면 되나?”
“돈 보다는 사람을 구해주시죠.”
“그래? 내 그럼 금방 구해주지.”
얼마 안 가 요시시게는 젊은 여자들을 보내왔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수많은 미망인들을 양산했다. 전쟁터에서 남자들이 죽어나가니 여자들만 사는 집들이 늘어났다. 요시시게는 일본 본토에서 이런 여자들을 모았다.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 처한 여자들은 이에 응했다. 왜관에서 살면서 남자라도 잡으면 삶이 좀 더 편안해질까 싶어 응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시시게가 보낸 여자들은 전부 이런 여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츠라고 합니다.”
여자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있었다. 이름은 소 나츠, 이제 12살인 소녀였다.
나츠는 요시시게의 먼 친척이었다. 그러나 요시시게의 요청에 나츠는 소씨 가문의 당주인 하루야스의 양녀가 되었다. 목적은 오직 하나, 신유성을 잡는 것이었다.
혼담을 제의하는 것도 좋지만 요시시게는 일본에 대한 조선의 인식을 잘 알고 있기에 정식 혼담은 피했다.
‘일단 마음을 잡으라고 하셨지.’
순종할 것을 배우며 자란 나츠는 아무런 이의를 보이지 않고 명에 따랐다.
‘7살이라던데.’
나이에 비해 큰 신유성을 본 나츠의 가슴은 살짝 두근거렸다. 대단한 인재라는 말을 들었는데 본 순간 마음이 기울었다.
집안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다.
한편, 신유성은 요시시게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고민했다.
‘얘를 어쩌란 거지?’
일을 시키기 위해 보낸 거라면 너무 어렸다. 더구나 그냥 막 굴려도 되는 신분은 아니었다. 자신을 소개할 때 분명 요시시게의 동생이라고 했다.
‘일을 시키란 것은 아닐 거야. 그렇다면?’
신유성은 금방 진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친하게 지내란 것은 분명 날 잡고 싶다는 거겠지.’
대충 요시시게의 의도를 짐작한 신유성은 눈을 번뜩였다.
‘날 갖고 싶겠지만.’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이를 본 나츠의 얼굴에 붉은 빛이 감돌았다.
‘내가 가져주지. 대마도.’
탐욕이 가슴 속에서 활짝 피어났다.
“반갑습니다. 신유성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신유성은 부드럽게 나츠를 맞이했다.
“많이 피곤할 텐데 오늘은 쉬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첫 날은 조용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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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