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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유희-9화 (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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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신유성의 몸이 슬쩍 틀어지며 옆으로 비켜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칼을 든 남자, 자객은 눈을 빛내며 몸을 틀었다.

‘죽인다!’

죽여야 했다. 돈을 받고 고용된 닌자는 임무를 완수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 고용주가 죽이지 않아도 동료 닌자들에게 척살 당할 뿐이었다.

마사모리에게 고용된 닌자는 신유성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죽인다!’

눈에는 살의만이 가득했다.

피했다. 그래도 따라온다. 우연한 사고였다면 신유성을 따라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먼저 피해버린 덩치를 향해 몸을 돌리는 게 정상.

‘자객.’

단순히 피하는 것만으로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순식간에 파악한 신유성은 다가오는 남자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반격 불가.’

남자가 키도 더 컸고 힘도 더 강했다. 정면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회피도 어려웠다. 방향을 틀었음에도 남자는 금방 쫓아왔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결국 남자는 팔을 내밀기만 하면 신유성을 찌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수많은 싸움을 거듭하며 자신의 간격을 파악한 닌자는 망설이지 않고 칼을 내밀었다.

그 순간!

‘헛?’

신유성이 사라졌다. 허나 닌자는 경험이 많았다.

‘얕은 수를!’

발차기가 이어졌다. 낮은 발차기는 땅을 구르던 신유성의 몸에 박혔다.

“컥!”

키 큰 사람이 접근하면 아래쪽으로 순간적으로 사각이 생긴다. 신유성은 순간적으로 생기는 사각을 이용해 공격을 피했던 것. 모두 수련을 한 덕분에 짜낼 수 있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닌자들도 이와 같은 훈련은 수도 없이 받았다. 사각을 이용한 공격은 기본. 아주 잠깐 당황했지만 신유성이 빠져나가는 것을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신유성은 발차기에 맞고 날아갔지만 그만큼 시간을 벌었다. 닌자는 제2의 공격을 날릴 틈도 없이 달려온 차돌을 상대해야 했다.

쨍!

차돌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닌자는 등을 베였다.

“커헉!”

밥을 먹던 선원들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달려든 것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벌어진 것이라 반응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식사하면서 누군가의 공격에 대비하는 인간은 찾아보기 힘드니까.

허나, 신유성이 치명적인 공격을 피하며 시간을 번 것만으로 충분했다.

신유성은 죽다 살아났다.

보고를 받은 요시시게는 인상을 구겼다.

‘이런 일을 할 놈은 그 녀석 밖에 없지.’

이복동생인 마사모리는 요시시게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엇이든 경쟁적으로 덤벼들었다.

“그 놈들은 어찌 됐지?”

“두 놈 다 죽었습니다. 사로잡았던 녀석은 자결했습니다.”

스스로 독을 삼키고 죽었다는 것이었다. 신분을 증명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에게 고용되었는지도 불분명. 마사모리에게 따질 수는 있어도 확실한 증거도 없이 몰아붙이면 역풍을 맞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마사모리가 시기하는 것 같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성의 주변에 사람을 붙여서 보호하도록. 그리고 아랫사람들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알겠습니다.”

조치를 취했지만 요시시게는 걱정이 생겼다.

‘설마 떠나지는 않겠지?’

신유성이 충격을 받고 떠난다면 아쉬운 일.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요시시게의 예상대로 신유성은 왜관을 떠나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암살 시도 소식을 들은 신겸혁은 막무가내였다.

“안 된다. 한양으로 돌아가라.”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인들과 어울리다가 뭔가에 휘말렸다는 것이 신겸혁의 생각이었다. 엉뚱한 일에 귀한 자식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거 아쉬운데.’

자리에 누워있는 신유성은 사실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죽다 살아났지만 죽음의 공포에도 기가 죽지 않은 까닭이었다.

죽어도 또 다른 삶을 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죽음의 공포를 희석 시켰다.

‘지금이 기회야.’

일본이 혼란스럽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혼란이 끝나면 새롭게 질서가 생긴다. 혼란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권력을 쥐게 된다.

힘을 원하는 신유성에겐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일단 시간을 끌자.’

좋은 생각이 당장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아픈 척 했다.

“아버지. 소자 몸이 좀 아픕니다. 올라갈 땐 올라가더라도 좀 쉬었다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끙.”

아프다는 자식을 억지로 한양으로 올려 보낼 순 없었다. 어른스럽고 신동이라고 해도 아직은 아이의 몸. 아픈 몸으로 여행하다 탈이 나면 천추의 한을 남길 수 있었다.

“알았다. 대신 왜관 안에는 얼씬도 하지 말거라.”

“네.”

결국 신유성은 처음 지냈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깊은 밤.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에 신유성은 눈을 떴다. 밤의 고요함 속에 퍼지는 울음소리는 자뭇 음산하게 느껴졌다. 허나 귀신같은 것은 아니었다.

방 한 구석에 쪼그리고 누운 매화가 훌쩍이는 것이었다.

“왜 안자고?”

“죄송함니, 훌쩍.”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항상 밝게 웃기만 하던 매화가 울고 있으니 신유성은 가슴이 살짝 아려왔다.

“이리 와라.”

옆 자리를 툭툭 치니 매화는 엉금엉금 곁으로 다가왔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거냐?”

도리도리.

“그럼 왜?”

“도련님 다쳐서.......”

“내가 다쳐서?”

끄덕끄덕.

‘귀여운 것.’

꼭 안아주자 매화는 신유성의 품에 파고들었다. 작은 매화가 자신을 걱정해준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서럽게 울던 모습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이젠 괜찮다.”

“흑.”

매화는 울음을 쉽게 멈추지 못했다. 매화에게 있어 신유성은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상전이었다. 그렇게 배웠기에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오직 신유성을 위해 살라는 말은 뇌리 깊숙이 각인된 것이었다. 그런데 신유성이 다쳤다. 이상하게 계속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신유성이 안아주니 안심이 되었다. 매화는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신유성은 그런 매화를 안고 눈을 감았다.

걱정 속에 눈물을 흘린 것은 매화만이 아니었다. 나츠 또한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나츠는 요시시게가 보낸 사람과 마주했다.

“가게 일은 맡겨두시고 신유성님을 찾아가세요.”

“알았다.”

신유성의 집은 조용했다. 신겸혁은 왜관에 갔고 집에는 노비들만 있었다.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자리에 누워있는 신유성을 볼 수 있었다.

“많이 아프신가요?”

“좀 아프네요.”

“죄송합니다. 가문의 일로.......”

“괜찮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이인가요?”

화끈. 얼굴이 뜨거워진 나츠는 고개를 숙였다. 단순한 말 한 마디였지만 나츠의 심장을 뛰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어쩌면 더 못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네?”

아니 이게 무슨 소릴까? 설렘 뒤에 찾아온 청천벽력. 나츠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몸이 낫는 대로 한양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안 돼!’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꼭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대로 보내면 안 돼!’

나츠는 대화를 어떻게 마쳤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요시시게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요시시게는 고민했다. 신유성은 탐나는 인재였다. 더구나 검술에도 나름 소질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닌자의 공격을 잠시지만 피했다는 게 크지.’

방심한 순간에 치고 들어오는 기습은 무사라고 해도 쉽게 피하긴 어려웠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듣기에 상당한 실력이라 했다.

‘그 상황에서 침착하게 굴러서 피하다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격이 들어오면 뒤로 피한다. 공격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신유성은 밑으로 굴렀다. 그것도 찰나에 생기는 사각지대를 이용해서.

‘검으로도 대성할 수 있겠구나.’

뛰어난 무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뛰어난 무사는 백 명을 벨 수 있지만 뛰어난 책사는 영주를 잡는다. 허나 아무리 뛰어난 책사도 죽으면 끝. 자신을 지킬 어느 정도의 무력은 있는 것이 좋았다.

‘뭘 하든 뛰어난 경지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요시시게가 신유성에 대한 평가였다. 알면 알수록 능력이 탐이 났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가?’

요시시게의 고민은 깊어갔다.

왜관의 향통사들 위에는 왜학훈도가 있었다. 왜학훈도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일본어를 하는 역관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향통사는 왜학훈도가 키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관의 향통사들을 선발하는 왜학훈도는 신겸혁을 불렀다. 신겸혁은 왜학훈도에게서 직접 일본어를 배우지는 않았으나 상관이라는 것은 변함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얘기는 들었네. 아들은 괜찮은가?”

“다행히 괜찮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왜인들은 성정이 거치니 조심해야하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왜학훈도는 말을 돌리며 안부도 묻고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신겸혁은 조용히 맞장구치며 들어주었다. 본론이 나오기 전에 먼저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들은 어쩔 건가?”

“한양으로 돌려보내야지요.”

“허어. 딴엔 그렇지만 좀 더 있는 것은 어떤가?”

“네?”

“아이만 따로 보내는 것은 불안하지 않나? 하루 이틀 거리도 아니고.”

왜학훈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람을 딸려서 보낸다고 해도 직접 눈에 닿는 곳에 있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은근한 설득에 신겸혁은 신유성을 당장 올려 보내지 않기로 했다.

‘뭔가 이상한데?’

허나, 의문을 느끼는 것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왜학훈도가 나서게 된 것은 요시시게의 술책이었다. 요시시게가 재물을 안겨주니 왜학훈도가 설득에 나서겠다고 한 것이었다. 딱히 큰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설득만 하면 되는 일이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왜학훈도는 은근히 집요하게 설득했다. 마치 아들을 홀로 보내면 독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을 돌린 것이었다.

신겸혁은 상관의 말에 일단 맞춰주었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뒤에 숨은 사정은 알아낼 수 없었다.

덕분에 신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도 한양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왜관 출입은 금지 되었다.

‘검로.’

허나, 신유성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한 번 검술에 눈을 뜨자 계속해서 검을 수련했다. 이제는 간격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 검로를 읽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빠른 성장이었다.

검로를 읽으면 정확한 방어와 공격이 가능해진다. 아울러 불필요한 움직임이 줄어든다. 허나 이를 읽어내는 것은 수많은 경험을 토대로 쌓아올린 감이 있어야만 했다. 신유성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었으나 매일 같이 차돌과 사나다를 비롯한 이들이 대련하는 것을 보았다.

검을 들고 대련하는 것을 보는 것도 훌륭한 간접경험이었다.

사나다를 비롯한 이들은 요시시게의 명령을 듣고 항상 찾아왔다. 아울러 신유성을 지키라는 명령을 들은 이들도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후우.”

검을 수련하고 대련을 지켜보는 시간은 영원할 순 없었다. 모두 돌아가고 나면 신유성은 다시 집에 남아 지루한 시간과 싸워야 했다.

검로를 상상하며 상상 속의 적과 싸우는 나날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책을 읽는 것도 쉬지 않았다.

허나 대부분 읽는 것은 병법서들이었다.

‘나중에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유학으로 성공하려면 경서를 읽어야 했으나 전쟁에서 단순한 병사가 아닌 우두머리가 되어 한 몫 잡으려면 병법은 필요했다.

대마도를 먹기로 했지만 아직 방법은 확실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최대한 준비를 하려는 것이었다.

‘내년에는 한 번 가봐야지.’

결심 속에 신유성은 준비를 해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해가 되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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